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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FIFA 월드컵 프랑스/대한민국

여러분의 참담한 심정. 저와 똑같을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절대로 좌절을 해서는 안됩니다. 한국축구는 다시 일어설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16년 이후에는 도로아미타불(…)
- 네덜란드전을 직관한 이경규가 이경규가 간다에서 한 클로징 멘트.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에서 있었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경기내용과 이런저런 사연들을 정리. 몇몇 이들에겐 심한 상처를 남기기도 해서 대한민국 축구계에서 거의 흑역사취급을 받고 있었지만, 16년 후 이보다 더한 흑역사를 맞게 되었다. 차범근은 2010년 6월경 기사에서 무릎팍도사 출연 제의에 98년 월드컵이 자신과 가족들에게 큰 상처였음을 말하며 아직 출연할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무릎팍도사는 종방했지만(…) 차범근과 가족들이 받은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Contents

1. 조편성
2. 본선전의 기대감
3. 본선 최종 엔트리
4. 본선 경기 전적
4.1. 첫번째 경기 : 대 멕시코
4.2. 두번째 경기 : 대 네덜란드
4.3. 세번째 경기 : 대 벨기에
5. 후일담

1. 조편성

본선 이전까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 월드컵에서의 선전과 더불어 아시아 지역예선을 통쾌한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극적인 역전승을 하는 도쿄 대첩을 거치면서 가볍게 통과한 상태여서 조편성 여부에 따라 사상 최초의 16강 진출도 가능하다는 장밋빛 전망에 빠져있었다.

조추첨 결과 멕시코, 네덜란드, 벨기에와 E조에 편성되었고, "별로 좋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못할 것도 없다."라는 평가를 했다.

사실, 이 때 본선경기 이전까지는 세계축구와 한국과 아시아 축구의 현실을 인식하고 있던 극히 일부 계층을 제외하면 그나마 "해 볼만 하다.", "차범근 감독이 있기 때문에 그를 믿는다."라는 풍조가 강했다. 바로 이전 94 월드컵에서 당시 같은 조였던 스페인, 독일, 볼리비아라는 국가들의 면면은 일단 겉보기로는 98 월드컵보다 오히려 더 어려워 보였다. 그리고 한국은 이들을 상대로 2무 1패를 거뒀고, 경기 내용까지 따지면 아깝게 16강 진출 실패했다고 볼 수도 있을 정도였다.[1] 그리고 94 월드컵 조별예선은 이른바 도하의 기적이라는 똥줄 진출을 했으나 98 월드컵은 놀라울 정도로 쾌승을 거듭하며 비교적 간단하게 아시아 예선을 통과했기에 언론의 쓸데없는 호들갑과 설레발에 힘입어 기대감은 부풀어 오를 만했다.

2. 본선전의 기대감

사실 아시아 지역예선이 시작되는 1997년 초에만 해도 분위기는 매우 좋지 않았다. 바로 얼마 전에 아랍에미리트에서 열린 아시안컵 8강전 이란과의 경기에서 전반전을 2-1로 앞서고도 후반전 이란의 축구영웅 알리 다에이에게 완전히 농락당하며 4골을 허용. 지금도 붉은 악마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일명 씩스투 참사. 2-6 역전패라는 최악의 스코어로 패배를 한 뒤 박종환 감독이 경질되는 우여곡절을 겪었기 때문.[2] 새로이 대표팀 사령탑을 맡은 차범근 감독으로서는 이 난관을 뛰어넘어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해야 하는 무거운 과제를 안게 되었다.

범근호가 높은 기대를 받은 것은 이 난관을 압도적인 호성적으로 극복했다는데 기인했다. 당시의 차범근호는 아시아 최종예선 B조에서 중앙아시아의 떠오르는 강호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중동의 다크호스 UAE, 그리고 숙적 일본과 한 조라는 괜찮은 조편성을 만났다. 물론, A조에는 이란과 사우디가 있었지만 대신 중국, 쿠웨이트, 카타르라는 호구 3형제(…)가 있었지만… 그리고 이 때는 본선 진출권은 조1위에게만 주어졌고, 조2위는 반대편 조 2위와 플레이오프를 해서 이겨야만 마지막 티켓을 획득할 수 있었다. 여기서 지면 대륙간 플레이오프로 밀려나니…

그리고 차범근호는 그런 우려를 불식시키는 가공할 성적으로 손쉽게 월드컵 본선티켓을 획득했다. 첫 4경기에서 카자흐, 우즈벡, 일본, UAE를 모조리 쓸어버리며 4전 전승을 기록, 경기 절반 치루고 사실상 본선을 확정지었던 것이다. 특히 3차전 도쿄대첩은 그 절정이었다.

반대로 숙적이라던 일본은 1승2무1패로 UAE의 2승1무1패에 밀리 당시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이었던 가모 슈 감독의 교체론까지 나올 지경이었고 결국 경질되었다.[3]

물론 첫 4경기 중 일본전을 제외한 3경기가 홈이었기에 실제보다 과대평가되었다는 말도 있었으나, 뒤이은 5~6차전 중앙아시아 원정을 1승1무로 가볍게 마무리를 지은 것은 그런 비판을 해소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우즈베키스탄 원정 경기에서 1:5 대승을 거둔 것은 한국의 본선 진출을 확정지은 화룡정점.

8전 6승1무1패 승점 19점 19득점 7실점 골득실+12라는 가공할 성적은 아시아의 경쟁국들을 공포에 휩싸이게 했고, 국내 여론에게는 "이번에야말로 16강에 갈 수 있다!"라는 높은 기대감을 갖게 해주었다. 최종예선 B조는 결국 한국이라는 깡패에게 얼마나 잘 선방하면서 착실히 승점을 모으냐가 관건이었을 정도. 한국의 1패는 서울 홈경기에서 일본에 0:2로 패한 것인데, 이때 한국은 이미 본선행을 확정지은 상황에다가 일본은 지면 UAE와 플레이오프 경쟁에서 밀려 광탈할 수 있었고 비겨도 불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말 그대로 총력전이어서 한일전 패배였음에도 의외로 비난의 목소리가 별로 없었다. [4] 한국이 일부러 일본에게 져준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돌 정도. (차기 월드컵 공동 개최국이기도 했고) 결국, 일본은 한국에 총력전을 펼쳐서 승리하고 마지막 카자흐와의 홈경기에서 승리하여 기적같은 2위 플레이오프 티켓을 따낸다.

어찌되었던 이런 압도적인 성적을 배경으로 하는 데다가, 이기고도 자만하지 않고 다음 상대를 대비하는 듯한 겸손한 발언과 컴퓨터로 데이터를 관리한다고 알려진 차범근 감독에 대한 인기와 신뢰감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차범근의 리더십'류의 처세술류 책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차범근을 대통령으로'라는 반농담도 회자되었다. 당시 중앙일보에 도올 김용옥의 차범근 감독의 경기 후 기독교적 언행에 대해 자제를 부탁하는 정중한 칼럼이 실렸고, 차감독이 회답을 했는데 그 두 칼럼이 화제가 될 정도로 국민적 관심이 대단했다.

근데 당시 차범근 감독이 노트북을 그라운드에 가지고 다니면서, 하프타임이나 경기가 끝나고 난 후에 컴퓨터를 사용하여 무엇인가를 하는 장면이 예선전에서 방송국 카메라에 여러 차례 잡혔다. 그런데 루머로는 컴퓨터로 관리한다는 데이터 내용이 워드에다가 포메이션 입력한 정도라는 말이 있었다.(...) 흠좀무

역시 지역예선에서 바게리를 누르고 아시아 지역예선 득점왕을 한 독수리 최용수는 이번에야말로 확실한 골잡이가 생겼다는 기대감을 모았다. 그리고 황선홍은 94년 월드컵 볼리비아전에서의 부진을 씻을 기회로 절치부심하고 있었고, 대한민국의 불세출의 골키퍼인 김병지가 있었으며, 94년 월드컵에서 수비수이면서도 2골을 넣은 홍명보가 있는 등 선수진의 면모도 화려했다.

이대로 16강에 진출하기라도 하면 차범근은 스타선수 출신 감독으로서 가히 한국의 프란츠 베켄바우어가 될 기세였다.[5]

그러나 본선을 앞두고 벌였던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황선홍이 문전으로 쇄도하다가 중국 골키퍼 장진과 충돌, 공중에서 옆으로 한 바퀴 회전 후 떨어져서 큰 부상을 당해 출전이 불가하게 되어버린다.

이렇게 월드컵 첫 16강 진출을 기대하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앞길에는 알게 모르게 암운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정도가 아니다. 당시 차범근 감독은 황선홍이 부상당하기 전까지 그에게 깊은 신뢰감을 표시하였고, "황선홍은 대표팀 전력의 절반이상", "유럽 수비수들에게 통할 선수는 황선홍 정도"라는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할 정도였기에 심대한 타격이었다.

단, 황선홍이란 표현을 썼는지는 확실치 않다. 사실, 황선홍은 한국이 피크였던 아시아 예선전에서는 엔트리에도 없었고 예선이 끝난 이후에 팀을 재편하며 합류했지만 그 시기도 늦어서 당시로선 팀 전체의 전력을 논할 정도로 유력한 선수는 아니었다. 월드컵 직전에도 공격수는 단연 예선에서 폭풍활약을 했던 최용수에게 기대가 모아져 있었고 황선홍이 중국 전에서 부상을 당했을 때도 언론이든 국민여론은 아쉽지만 별 상관없다 수준. 되려 황선홍을 94년 이후로 좋게 보고 있지 않은 일부에선 차라리 잘되었다 소리까지 나오던 판국이다.[6] K리그의 팬이 아닌 국대축구만 보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당시에도 황선홍은 94년 월드컵의 이미지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터라 황선홍에 대해 긍정적인 여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황선홍의 부상을 언론이 걸고 넘어진건 월드컵 본선에서 참패한 이후로 패배의 원인을 이것저것 가져다 붙이다가 그 와중에 황선홍의 부재가 팀에 타격이 컸다는 식으로 지나치게 확대해석을 했다는 것이 일반론이다.

3. 본선 최종 엔트리

괄호 안은 당시 소속팀이다.

4. 본선 경기 전적

경기일시 라운드 상대국 점수 승패
6월 13일 조별리그 1 멕시코 1-3
6월 20일 조별리그 2 네덜란드 0-5
6월 25일 조별리그 3 벨기에 1-1

총 1무 2패로 16강 탈락

4.1. 첫번째 경기 : 대 멕시코

나넣고
점이나
다니 - 경기 후 한 PC통신 유저가 축구 게시판에 하석주 이름으로 지은 3행시.

일순간에 영웅에서 죄인에 역적신세로 전락한 하석주 선수. 이대로 프랑스를 통한의 무대로 남겨둘 것인지 주목됩니다. - MBC 기자 리포트 중에서.

과연 하석주가 퇴장되지 않았더라면 멕시코를 이겼을 수 있을까? 이번 경기에서 하석주에게는 잠깐의 행운이자 커다란 상처였다.

서정원 선수가 아직 회복이 안 되어서 기대보다는 못 미쳤지만, 최성룡 선수의 부상도 오늘 경기에서 간접적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 차범근(경기 이후 가졌던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 때까지로서는 김도훈 선수가 유일한 희망이었기에 김도훈 선수에게 기대를 걸었다. 최용수 선수의 경우, 체력이 약해서 기용했을 필요가 없었다. - 차범근(경기 후 가졌던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시작은 좋았다. 한국은 전반 28분경 하석주의 프리킥이 점프한 멕시코 수비수 다비노의 머리를 맞고 굴절되며 들어가 선제점을 얻는다. 이 선취골은 한국이 월드컵 본선에 출전한 이래 최초로 넣어본 선제골이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무대에서 이기고 있었다. 그러나 골에 대한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하석주는 3분만에 거친 백태클로 레드카드를 받고 퇴장을 당하고, 그렇게 수적 열세에 몰리게 된 한국은 경기주도권을 멕시코에 완전히 빼앗기게 된다. 그나마 전반전은 김병지의 선방 덕에 1 대 0으로 앞선 채 마쳤지만, 후반 5분만에 교체투입 된 펠라에스에게 코너킥 상황에서 동점골을 내주고 말았고, 이후 각각 29분과 39분에 멕시코의 스트라이커 에르난데스에게 2골 더 허용하여, 1 대 3으로 참담한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 당시 하석주에게 내려진 레드카드 판정을 놓고 말이 많았는데, 아무리 백태클에 대한 제재가 강화하겠다는 언급이 있었더라도 상대 선수가 크게 다치지도 않은 상황에서 방금 전에 프리킥 골을 성공시킨 선수를 퇴장시킨 것은 누가 봐도 뻔한 편파판정이라는 주장이었다. 또한, 차범근 감독의 부인이 언론 인터뷰를 통해 그 당시 FIFA 부회장이었던 정몽준이 이 경기를 보고 있었다면 기껏해야 경고에 그쳤을 것이라는 식의 말을 하면서 축구협회와 차범근의 갈등은 극에 달한다. 그리고 정몽준이 관전하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상기한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 당시 국대 축구팬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FIFA 부회장이면서 자국 선수들의 첫 경기를 관전하지 않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가는 부분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이 레드카드는 편파판정이라기 보단 재수없게 걸려든 시범케이스라고 보는게 더 맞다. 하석주 이후로 독일-크로아티아 8강전에서도 리스티안 뵈언스도 백태클을 시도하다가 걸려 레드카드를 받고 즉시 퇴장당했다. 뵈언스의 태클은 하석주와는 달리 크로아티아 공격수 수케르가 루즈볼을 잡기 위해 뛰어드는 것을 막기위해 발을 높게 들어 넘어뜨린 것으로 완벽한 백태클을 시전했던 하석주와는 상황이 다르다.[7]

하지만, 정몽준의 관전 여부를 제외하고라도 차범근 감독의 선수 기용에도 의문점이 있었다. 예선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으며 아시아 예선 득점왕이자 팀의 주축인 최용수를 내보내지 않았던 점,[8] 골대 윗그물에 맞는 위협적인 중거리슛을 날리며 펄펄 날아 다니던 고종수를 갑자기 교체해버린 점,[9] 경기 전 몸풀기에서 김태영이 찬 볼에 관자놀이를 정통으로 맞아서 기절한 뒤 간신히 깨어나 제정신이 아니었던 이상윤을 풀타임으로 뛰게 한 점[10] 그리고 원톱으로 출전한 김도훈은 다리에 쥐가 나서 벤치근처로 달려와서 침을 맞아 피를 빼고 들어가는 등 전반적으로 문제점을 드러냈다. 즉, 10 대 11로 불리한 경기를 하긴 했지만 퇴장만 아니었으면 문제가 없었다고 할만한 경기 운영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경기 후 비판의 도마에 오르며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은 (반쯤 마녀사냥에 가까웠다) 하석주는 경기 이후 두문불출하며 연락도 끊고 칩거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국축구 사상 최초로 월드컵 본선 선제골을 기록한 주인공으로서 구국의 영웅이 될 뻔했다가 2분만에 망국의 죄인이자 역적으로 급변한 충격과 후유증이 컸던 것으로도 알려졌다. 다음 경기인 네덜란드전에는 퇴장 페널티로 출전조차 하지 못했고.

여담으로, 멕시코의 콰우테모크 블랑코는 볼을 양다리 사이에 끼워 잡더니 펄쩍 개구리 점프를 하며 볼을 수비수 뒤로 던져넣는 돌파를 수차례 시전했다. 한국 수비는 그걸 못막고 번번히 뚫렸다. MBC 아나운서 송재익은 "아~ 저 짓을 또하는군요!"라고 중계했다. 이 개구리 점프는 일명 쿠아테미나, 피파온라인 게임에선 블랑코 바운스라고 부른다. 즉, 블랑코 특유의 기술인 것.

이후 한국과 멕시코는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재격돌했는데, 한국은 이 경기에서 멕시코를 2:1로 이기며 월드컵에서의 패배를 설욕했다. 이 경기에서도 블랑코는 개구리 점프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공을 한국 선수들에게 공을 빼앗겼다. 이 때 홈팀인 한국 관중석에선 비웃음이 흘러나왔고, 당시 경기를 중계하던 해설진은 통쾌하다는 듯 '이제는 안 통하죠!' 라는 멘트를 던지기도 했다. 또한 2006년 일본에서 열린 FIFA 클럽 월드컵에서도 전북현대와 멕시코의 클럽 아메리카와의 경기에서도 시도했지만 최진철의 수비에 막혔다. 이후 한국은 멕시코에 16년동안 무패행진을 이어갔으나 2014년 1월 평가전에서 4:0 완패를 당하며 이 기록이 깨졌다. 대다나다 홍명보호

여담으로, 이경규가 간다 월드컵 특집 촬영차 이 경기를 직관한 이경규는 나중에 녹화본을 보았을 때, "내내 욕만 하고 있더라."는 이야기를 후에 털어놓기도 했다. 결국 방송에 나간 분량보다 방송에 못나간 분량이 더 많다고.

한편, 같은 조에 속했던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0 : 0 무승부를 기록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서 한국팀의 16강 진출 진로는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다.

4.2. 두번째 경기 : 대 네덜란드

속수무책이네요. - 신문선 해설위원

완전히 오늘, 완패입니다. - 이용수 (당시) KBS 해설위원


5 대 0? 그거 사람 이름이에요?
너무도 창피스러워서 이불 속에서 나오기도 싫었다. 한국인이라는게 너무 창피했다.
한일전 때부터 알아봤는데 감독이 자기가 마음에 들어하는 선수만 기용하는 것 같다.
- 경기 후 반응

이번 경기를 끝으로 현 감독인 차범근을 전격 해임한다. - 대한축구협회

차범근 감독의 전술은 이미 실패작 수준이었고 선수기용도 도저히 이해못할 고집스런 수준이었다. - 축구협회 기술위원

2002 월드컵을 대비하여 다음 벨기에전 때 신인 선수들을 포함하는 새 진용을 갖추겠다. - 차범근(네덜란드전 경기 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당시만 해도 더욱 개념따윈 없었던 한국의 황색언론에 가까운 언론매체들(특히 스포츠 신문들)은 멕시코전의 패배는 잊었다는 듯 앞다투어 "네덜란드 해볼만 하다.", "네덜란드 약점은?" "네덜란드 격파 비책" 같은 제목으로 망상스러운기사를 쏟아냈다. 경기 당일 신문 제목들은 더욱 가관이었는데 "오늘 네덜란드 잡는다.", "차범근 비책", "네덜란드 잡으면 16강 청신호." 등이었으며 비겼을 때 경우의 수를 논하는 글들도 있긴 있었다.

네덜란드가 1차전인 벨기에전에서 비기는 것을 보고 우리도 해볼만 하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더욱 커진 것이었다. 이때의 네덜란드-벨기에전의 결과는 순수히 양팀의 실력만 보고 선수들의 멘탈을 좌우하는 양국관계를 몰라서 나왔던 말이다. 비록 벨기에는 유럽 중위권 팀이고 객관적인 전력으로 보면 네덜란드에 처지는 상태였지만, 과거 벨기에는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한 국가였고, 그것 때문에 네덜란드를 숙적으로 여기고 있어서 네덜란드와 경기를 할 때이면 항상 자기 실력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면이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네덜란드는 경기 중 클루이베르트가 레드카드를 받으면서 퇴장당하는 바람에 후반전 절반 이상을 10:11로 싸우고도 벨기에를 상대로 우세한 경기를 했다.

심지어는 네덜란드 팀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흑백갈등을 지적한 기사가 나오기도 했는데, 이는 파트릭 클루이베르트나 에드가 다비즈, 클라렌스 세도르프를 두고 한 얘기인 듯 한 얘기였고 실제로 당시 악동으로 불렸던 클루이베르트가 훈련 중 다툼을 일으켰다는 기사가 있기는 했으며 당시 네덜란드 팀 내에 흑백갈등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히딩크가 그 문제를 잘 통제, 관리하고 있었다는 것. 기사를 쓰려면 끝까지 보고 쓰는 게 기자인데, 자기가 좋아하는 말만 대충 듣고 쓰는 게 기자냐?[11]

정작 차범근 감독 본인은 "네덜란드와는 비기고 벨기에를 꺾는 것이 목표다" 라고 말했다. 당장 4년 전 월드컵에서 사우디가 돌풍을 일으킬 때 사우디를 꺾고 그 조 1위로 16강 진출했었고 8강에서 브라질 상대로 패하긴 했지만 2:3 접전승부를 연출했던게 네덜란드였다는걸 감안하면 얼마나 기자들이 멍청했는지 알 수 있다.

그나마 유일하게 "월드컵 16강? 꿈 같은 소리 집어쳐!"라라고 쓴소리를 한 언론이 딱 하나 있었는데 바로 주간지인 시사저널이었다. 이 당시는 외압에 흔들리지 않는 독립언론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시사주간지 중에서 판매량도 1~2위를 다투고 있었고... 2005년 삼성비판 기사 삭제에 따른 파업으로 주력기자들이 빠져나가기 전이다.

시사저널은 월드컵이 열리기 직전에 당시 기사를 통하여 상대들을 몰라도 너무 모르면서도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허접으로 본다면서 당시 여론 및 언론 보도를 비난했다. 시사저널에서 예상한 한국팀의 경기 결과는 그야말로 경악스러운 선견지명을 보여줬는데, "네덜란드에겐 한 0:4로 지며, 벨기에에겐 1~2점차로 지고 멕시코와 죽어라 경기를 해서 겨우 비긴다. 16강? 1승? 천만에, 1무 2패가 한국축구의 수준이다."라는 기사를 올려서 당시 많은 비난을 듣었으나 알다시피 벨기에와 멕시코가 바뀐 것 빼고 거의 들어맞았기에 경기 끝나고 나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월드컵이 끝나고 시사저널 독자란에 "어쩜 그렇게 예언 수준으로 잘 예측했느냐?"라는 글을 올렸는데 시사저널 측은 그게 한국 국대축구 실력이거든요."라고 응답했다.

물론 상대에 대한 정보가 없던 시절이긴 했어도 요즘처럼 정보를 얻을 수 있었어도 글쎄? 홍명보호/2014 FIFA 월드컵 브라질를 봐도 알겠지만 어차피 언론이 묻지마 기사를 써재끼는 투로 쓰기에 "16강 가능성 크다. 네덜란드 이긴다~"라고 설레발로 썼을 것이다.

아무튼 스포츠 신문과 방송의 희망적인 예측에 들뜬 많은 국민들도 네덜란드 정도면 그래도 해볼만하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만 해도 위성방송이나 케이블이 널리 퍼지지 않았을 때였고 해외 축구의 흐름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PC통신 축구게시판에서 활동하는 몇몇 사람들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대부분의 국대팬들은 축구강국하면 브라질, 아르헨티나, 독일, 이탈리아 정도를 생각했고, 유럽 만년 콩라인 네덜란드가 어느 정도로 강팀인지는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독일은 원래 강호라는 인식이 있었지만 바로 4년전에 미국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더욱 잘 알려진 상태. 하지만 98 월드컵 당시에는 녹슨 전차였지?

결국 대다수 국민들은 언론의 보도대로 네덜란드를 '유럽의 강호이긴 하지만 해볼만한 팀' 정도로 알고 있었다. 우승후보라는 이야기가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여담으로 경기 끝난 다음 여러 사람들 인터뷰가 보도되었는데 한 직장인은 동료들과 내기에서 그냥 생각없이 네덜란드에게 5점차 정도로 크게 질 것같다며 1만원 내기를 했단다. 그리고 경기 끝나고 30만원이 넘는 내기금을 받았다고(...). 그 때 스포츠토토가 없어서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한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국대 역사상 두 번째로 강한 올스타 팀이었고[12], 10여년이 지난 후에도 회자될 정도로 강팀이었다. 당장 스쿼드만 유럽의 유수 명문 클럽의 올스타라도 명함조차 못내밀만큼 어마어마한 선수들로 가득 차 있었다.

면면을 살펴보면 당시 최고의 전성기에 접어들고 있었던 데니스 베르캄프를 필두로 세계 정상급 스피드 윙어였던 르크 오베르마스, 94-95 시즌 아약스UEFA 챔피언스리그의 우승을 안긴 최고의 공격수 파트릭 클루이베르트,[13] 중원의 싸움닭 에드가 다비즈, 루드 굴리트 이래로 네덜란드 최고의 테크니션이라 평가받던 클라렌스 세도르프, 철의 장막 야프 스탐, 그리고 최고의 골키퍼 에드윈 반 데 사르 등 당대 세계 올스타급 수준의 선수들이 즐비했다. 그것도 포지션 편중은 커녕 공수 전반에 걸쳐 고루 분포함은 물론 골키퍼까지 완벽했던 것이 98 네덜란드의 스쿼드였다. 네덜란드는 결국 이 대회 준결승전에서 브라질에 패했지만 객관적인 경기력은 브라질을 앞섰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으며, 히딩크가 98 월드컵 이후 사임한 것도 저런 스쿼드를 가지고 고작 4강에 그치고 말았던 것이 실망스러운 결과였기 때문이라는 말이 신빙성있게 들릴 정도.

물론 상기한대로 당시는 유럽축구에 대한 인식이 지금에 비하면 너무나 떨어졌던 시기였기에 (그나마 월간축구(현 베스트일레븐)을 통해서 유럽축구가 많이 알려지긴 했다.) 많은 국내의 축구팬들에게 기껏해야 베르캄프를 제외하고 나머지 선수들의 이름이 낯설게 들렸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14] 경기를 중계하던 송재익과 신문선은 영상 자막에서 다비즈의 영문 스펠링만 보고 "다비드스"라고 발음했을 정도로 유럽 선수들의 정보에 무지했다.

결국 대표팀은 거스 히딩크가 이끄는 네덜란드에게 5 대 0으로 선전 참패했다. 그나마 김병지의 선방이 아니었다면 5:0으로 끝나지 않고 더 많은 실점을 당했을 것이다.

전반 초중반까지는 그런대로 잘 싸웠으며, 종종 기회를 만들기도 했다. 전반 8분에 김도훈이 옆그물을 맞추는 강력한 슈팅을 날렸는데, 이 때 카메라 각도가 절묘해서 해설진과 팬들이 잠시 골로 착각하고 환호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경기는 하프코트 게임으로 돌변하기 시작했고, 전반 37분 필립 코쿠에게 선제골을 허용한 데 이어 42분 르크 오베르마스에게 추가골까지 허용하면서 0대2로 전반전을 마쳤다. 이 때 이용수 KBS 해설위원은 전반전을 마치고 "아이, 37분까지는 잘 개겼는데~" 라고 말하기도(...).

그리고 후반전 헬게이트가 열렸다. 전반전을 통해서 대한민국의 전력을 간파한 네덜란드에 대한민국의 수비진은 더 이상 상대가 되지 못했다. 후반 26분 베르캄프가 대한민국의 수비진을 완벽히 농락하면서 세번째 골을 넣었고[15] 후반 33분 교체되어 들어온 반 호이동크가 오베르마스의 크로스를 받아서 헤딩으로 골을 기록했고, 후반 37분 날드 데 부어가 다섯번째 골을 넣으면서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처참하게 구겨버렸다. 이는 50년대 처음으로 본선에 진출했을때를 제외하면 가장 큰 대패기록이었고 내용은 더 참혹했기에 많은 국대팬들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준 경기이다. 홍명보는 네덜란드 전에 대해 후일담에서 "경기가 빨리 끝나기를 바랐다."라고 회고하였고, 당시 경기를 생중계하던 KBS 서기철 캐스터 역시 5번째 골이 들어가자 망연자실하여 "차라리 경기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네요"라는 말까지 남겼다. 그때 새벽잠 설쳐가며 경기를 시청한 사람들 대부분 역시 맨정신으로 끝까지 경기를 지켜볼 수 없어 경기 종료 전에 TV를 껐을 듯. 많은 축구팬들에게 네덜란드 트라우마를 안겨 준 경기이다. 이 경기 이후로 네덜란드 대표팀이 국내 팬들의 관심팀이 되는데 잊혀질만하면 유로 예선에서 중하위권 팀들에게 대량 득점을 하며 "역시 네덜란드는 양민학살의 달인"이라는 평을 하게끔 하였다. 98년 이후 네덜란드와 몇 차례 평가전을 하였지만 히딩크 이후로 네덜란드 축구를 이식한 대한민국 대표팀은 데드카피의 한계인지 원조를 상대로 좋은 경기를 펼쳐본 적이 없어서 더욱 네덜란드 공포증을 갖게 했다. 특히 당시 국내 최고의 준족을 자랑하던 서정원이 앞이 탁 트인 상황에서 공을 잡았음에도 뒤따라오던 다비즈에게 따라잡히는 모습을 보이는 등,[16] 지역예선의 선전으로 우쭐해있던 한국축구가 우물안 개구리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줬다.

당시 이 경기를 광화문에서 단체 관람한 초창기 붉은악마들은 새벽이슬을 맞으며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직관한 이경규는 네덜란드전에 대해서 "멕시코전 녹화분을 보고 2차전에서는 울어서 감동을 줘 보자고 생각했는데, 경기를 보고 진짜로 울게 되더라."며 이때를 회고했다. 그리고 경기를 직접 보러온 가수 김흥국도 방송 카메라로 안타까워하는 얼굴을 하며 보고 있던 게 찍혔다.

그러나 이 경기에서 빛났던 한국 선수가 있었으니 바로 김병지. 자세한 사항은 김병지 항목 참조. 또 당시 19세의 이동국은 후반에 교체로 들어가 네덜란드의 골문을 위협한 날카로운 중거리슛을 날리면서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다음 혹은 다다음 대회를 기약하는 희망을 주기도 하였다. 경기가 끝난 후 외신과 네덜란드 언론이 김병지와 이동국만 언급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부상이 심했으나 혹시 나을지도? 하는 생각에 데려갔던 황선홍은 벤치에서 분루를 삼키며 진통제를 맞고라도 뛰겠다는 이야기를 했으나 차범근 감독이 이 대회가 끝이 아니라며 만류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경기 후 나온 석간판 신문 제목들은 흔한 클리셰 중 하나인 "세계의 벽 높았다." 일색… 그나마 일간지들은 저 정도였지, 이날 저녁에 나온 스포츠신문 석간판 1면은 온통 "이 치욕 잊지말자"라느니, "김병지가 불쌍했다"라느니 "이날 전국은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등등 원색적인 병맛헤드라인으로 도배되었다. 특히 스포츠조선은 이날 저녁에 나온 석간판 헤드라인에 아예 5대빵이라는 문구를 선보이기까지 했다.

결국 차범근은 네덜란드전 참패 직후 전격 경질되었고, 대표팀은 김평석 수석 코치를 감독 대행으로 하여 마지막 벨기에전을 준비하기에 이른다. 이에 앞서 당시 사우디 대표팀 감독으로, 94년 월드컵에서 브라질을 우승으로 이끈 파레이라 감독이 프랑스에 0:4로 참패한 직후 대회 도중 경질된 바 있다.

당시 한국과 네덜란드가 경기를 벌였던 곳이 프랑스 마르세유 축구 경기장이었기 때문에 마르세유의 치욕 또는 마르세유의 굴욕이라고도 불렸다.

이 경기를 계기로 처음으로 한국인들에게 알려지게 된 당시 네덜란드 축구팀 감독 거스 히딩크는 이 때까지는 한국팀에게 통한의 눈물을 흘리게 하고 비수를 꽂은 적장(敵將)이라는 인식을 만들게 하였다. 그러나 4년 후 바로 이 적장이 대한민국 대표팀 감독이 되어서 대한민국팀을 4강 신화로 이끌어내게 된 역사적인 영웅이 되리라는 것은 이 때까지는 한국인 그 누구도 생각하였거나 예상하지 못하였으니.

4.3. 세번째 경기 : 대 벨기에

그나마 이 경기 덕분에 월드컵 전패(全敗)는 어렵게 면했다. 다만 16강 진출이 좌절되었을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축구! 이것이야말로 월드컵! - 이 경기를 중계한 일본 아나운서

져도 좋다. 그러나 후회없이 끝까지 싸워라. - 대한민국 응원단

한국인이라는게 자랑스러웠다. 정말 속이 후련했다. - 응원단 참가자

오늘같이 싸워준다면 2002년 때 우리나라는 16강에 꼭 들어요 - 시민 그리고 결국 이 말이 드디어 현실이 되었다.

잃을 게 없는 놈들과 반드시 이겨야 하는 놈들의 단두대 매치.

네덜란드전 대패로 조별예선 광탈이 확정된데다 감독까지 잘린 가운데 맞이하는 벨기에전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는 그야말로 땅에 떨어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표팀 선수들은 1승이라도 국민들에게 선사하고자 했고, 벨기에 역시 이 경기를 반드시 이겨야만이 16강에 진출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멕시코와의 골 득실을 고려하면 적어도 3골 차 이상으로 이겨야 했다.

그렇게 빗속에서 벌어진 혈투의 결과는 1:1 무승부. 후에 이 경기는 98 월드컵 최고의 명승부 중에 하나로 꼽히기도 하며 한국 축구 명승부를 거론할 때 언급되는 경기가 되었다. 경기는 한국 대표팀이 강팀을 만나면 늘 그랬듯, 먼저 골을 먹고 나중에 따라잡는 경기가 됐다. 전반 7분에 코너킥 혼전상황에서 흘러나온 공이 당시 PSV 소속으로 뛰고있던 닐리스의 강력한 중거리 슈팅으로 연결되면서 선취골을 내줬지만, 대표팀은 계속된 벨기에의 공세를 온몸으로 막아내면서 간간이 역습의 찬스를 만들어 나갔다. 당시 대표팀의 중앙 수비수였던 이임생은 이마가 깨져 피가 나던 상황에도 교체카드를 다 써버려 붕대를 감고 다시 운동장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그리고 후반 26분 마침내 하석주가 중원 왼쪽에서 얻은 속죄의 프리킥을 유상철근성으로 골 에어리어 오른쪽에서 발을 대 득점을 했다. 이후 경기의 주도권을 잡은 대표팀은 여러 차례 벨기에의 골문을 두들겼지만, 최용수가 문전에서 2차례나 크로스바 위로 넘어가는 헤딩슛을 날리며 안타깝게 찬스를 무산시켜 결국 이기지는 못하고 1:1 무승부를 기록하게 된다.

한국 선수들은 이길 수도 있는 경기를 이기지 못했다는 생각에 허탈해했고, 벨기에 선수들은 만만하게 봤던 한국을 이기지 못하면서 3무무재배로 16강 진출이 좌절된 분을 이기지 못하고 단체로 통곡해 동병상련을 겪었다.[17] 벨기에 축구의 레전드 빈첸조 시포는 벤치에 앉아 쓸쓸하게 자신의 마지막 국가대표 경력의 끝을 지켜봐야 했다. 당시 벨기에 감독 레겐은 경기종료 휘슬 소리가 들리자마자 곧바로 라커룸으로 들어갔다.

멕시코전과 네덜란드전에서 대량 실점을 한 탓에 만약 이 경기에서도 패배를 했더라면 이 대회에서 3전 전패를 기록한 일본과 미국에게도 골득실이 밀려 전체 꼴등을 찍을 뻔도 했으나 유상철의 골로 무재배를 해서 위기를 모면했다. 그래봤자 32등에서 30등으로 겨우 2계단 올라간 거지만... 그리고 이 경기의 1실점까지 합쳐 총 9실점으로 똑같이 9실점을 기록한 나이지리아, 자메이카와 함께 대회 실점 공동 1위를 기록하는 굴욕을 남기게 될...뻔 했으나, 조별리그부터 실점을 착실히 쌓아 총 7실점으로 결승에 진출한 브라질이 프랑스한테 0:3으로 거하게 털리는 바람에 한 골 차이로 세 팀의 실점 공동 1등은 면했다. 더 자세한 내용을 보고 싶으면 이곳을 참조.

5. 후일담

차범근 호가 지역 예선에서 준수한 성적을 거둘 때는 칭찬하고 띄워주기에 바빴던 언론들은 본선 경기에서 패배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비난 일색으로 돌아섰고 차범근은 국민영웅에서 순식간에 패장을 넘어 역적의 위치까지 떨어진다. 그리고 결국 네덜란드 전에서의 5대0 패배 이후 전격 경질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차범근의 언론 대응도 그다지 좋지 못했는데, 1차전 패배 원인으로 퇴장 판정 탓만 한 것. 특히 앞서 언급한 부인의 쉴드는 납득이 가는 면이 분명 있는 얘기였으나, 되려 '자신의 잘못은 생각도 않고 남 탓만 하는 감독' 이미지를 키우며 역풍을 불러왔다. 조선일보 광수생각에서도 이 부분을 깠다. 누가 할 소린데?

이후 차범근은 한국 축구의 승부조작과 여러 어두운 면을 폭로했고 축구협회에선 5년 동안 한국축구계 활동을 금지한다는 엄벌에 처하려다가 아시아축구연맹(AFC)에게 아시아 축구영웅을 박대한다는 비난을 듣고 3년으로 줄인다. 결국 차범근은 중국 슈퍼리그에서 활동하며 지내며 한동안 국내 축구계에서 자취를 감췄다가 2002년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서 MBC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며 좋은 모습을 보여 명성을 약간이나마 회복한다. 이제와서는 98년 언론의 '차범근 죽이기'가 과도했다는 것이 축구 팬들의 중론이지만 이미 당사자와 그 가족에게는 지우기 힘든 상처가 남기며 좀처럼 언급조차 되지 않는 흑역사가 되어버렸다.

언론에서는 겉으로는 16강 진출에 대해 '해볼만 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으나, 언론사들의 해당 기자들이 실제로는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당시 월드컵 취재기자들 중 아무도 조별 예선 이후의 숙박예약을 잡아 놓지 않고 전부 조별 예선 후 귀국하는 비행기를 예약했다는 말이 었었는데, 사실 여부는 확인바람. 그러나 숙박예약은 물론이요 이미 축구협회에서는 16강 이후의 일정까지 선수단의 비자 기간이 발급되어 있지 않았었다.

월드컵 직전 가진 중국과의 친선경기에서 당한 부상 때문에 벤치에 앉아있다가 돌아온 황선홍은 '또 실수할까봐 겁먹고 일부러 안 나온 거 아니냐?' 라는 비난까지 받자 '한국에서는 도저히 축구를 할 수 없겠다' 라고 판단해 일본 J리그로 진출한다. 2010년 6월 방송한 무릎팍도사에서 털어놓은 바로는 동네 수퍼마켓에 갈 수조차 없었다고... 그리하여 일본에서의 영입 제의가 없었음에도 본인이 건너가 적극적으로 알아봤다고 한다.

참고로 E조의 조별예선 6 경기 중, 승패가 갈린 건 한국이 패한 2경기 뿐이었다. 나머지 4경기는 전부다 무재배. 결국 한국을 더 큰 점수차로 바른 네덜란드가 조 1위, 한국을 적당히 발라먹은 멕시코가 조 2위로 16강에 진출했고, 한국과 비겨버린 벨기에는 예선탈락했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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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94 월드컵은 본선진출팀이 24팀이여서 조 3위를 해도 2/3의 확률로 16강에 진출하는데 반해 98 월드컵은 32개팀으로 늘어났기 때문에 16강에 진출하려면 반드시 조 2위를 해야 한다. 실제로 94 월드컵 및 그 이전 월드컵에서의 대한민국 16강 진출 전략은 일단 만만한 팀 하나 이기고 중간 정도 팀과는 비기는 작전을 통해 1승 1무 1패로 16강에 오른다는 것이다.
  • [2] 여기에 관해서 당시의 대표팀 일부 선수들이 박종환 감독을 쫓아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태업성 플레이를 해서 대패했다는 설이 있고 심지어는 사실상 정설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 [3] 실제로 가모 슈 감독은 명목상 건강상의 이유로 자진사퇴했으나, 누가 보더라도 성적에 따른 경질이라는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일본은 이후 남은 예선 기간을 당시 수석코치의 감독대행 체제로 마무리 하며 예선 이후 이 사람을 정식 감독으로 임명한다. 그 인물이 바로,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일본을 16강으로 이끌었던 오카다 타케시 감독. 같은 기간동안 감독직을 수행한 탓인지 차범근 해설의 말에 따르면 특별한 선물까지 줄 정도로 절친한 관계라고 한다.
  • [4] 물론 '의외로 별로 없었을' 뿐 당연히 홈에서 완전 쳐발린 경기이기에 당연히 욕은 먹었다. 상대적으로 덜했단 얘기.
  • [5] 사실 프란츠 베켄바우어처럼 선수와 감독 커리어에서 모두 성공한 감독은 그리 많지 않다.
  • [6] 황선홍이 없었다 하더라도 지역예선 때 최용수를 받쳐줬던 김도훈이 있었기 때문에 저런 반응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김도훈 자체도 상당히 준수한 플레이를 했던지라 큰 걱정을 하지 않았던 셈이다.
  • [7] 당장 판정 강화를 감안해 봐도, 조별 예선에서만 16장의 레드 카드가 나왔다. 32개팀으로 늘은 걸 감안해도, 이전에는 조별 예선에서 10장 넘게 나온 적이 없었고, 16개팀 출전 시절에는 5장 전후에 그쳤다는 걸 생각하면.....월드컵이라는 대회의 중요성이 겹쳐 과격한 반칙이 나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디에고 마라도나가 대표적인 희생자. 헐리우드 액션과 신의 손 사건으로 욕도 많이 먹었지만.) 피파가 마음 먹고 판정을 강화시켰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
  • [8] 공식적인 이유는 연습 중에 당한 부상 때문이었다. 이후 최용수는 네덜란드전에서는 여론에 떠밀려 출전은 했지만 팀 전체 조직력이 붕괴된 속에 아무런 활약을 못했고, 마지막 벨기에전에서도 최용수는 세 번의 결정적인 찬스를 날려먹는 등, 매우 부진했다.
  • [9] 이후 고종수와 차범근은 은근히 사이가 안좋달까 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대표적으로 차범근이 수원의 감독으로 오자 고종수는 방황하다가 수원을 떠났다.
  • [10] 물론 이는 이상윤 본인의 책임도 있다. 본래라면 경기를 빠졌어야 정상인 상황에서 경기에 대한 사명감 때문에 차마 팀닥터에게 상황을 말하지 못하고 경기를 그냥 뛰어버린 것, 이상윤 자신도 이를 매우 후회했다고 한다.
  • [11] 실제로 차범근 감독의 아들 차두리는 스포츠 기자를 꿈꾸는 지망생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아버지를 반쯤 매장에 가까운 기사를 써재낀 기자들에게 학을 떼고 꿈을 축구선수로 바꿨다고...
  • [12] 참고로 제일 강했던 시기는 1988년이었다. 당시 네덜란드는 마르코 반 바스텐, 루드 굴리트, 랭크 레이카르트를 앞세운 환상의 삼각편대로 유로 88 우승을 차지했다.
  • [13] 다만, 클루이베르트는 벨기에전에서 퇴장을 당해 한국전은 결장했다.
  • [14] 그나마 해외 유선방송이나 신문, 잡지등을 통해 유럽축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던 극소수의 축구팬들은 대한민국이 1~2점차로 진다면 정말 잘한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 [15] 간결한 볼컨트롤만으로 수비수들을 제끼고 골을 넣었다.
  • [16] 물론 당시 서정원은 프랑스에 오기 전 아들에게 옮은 수두 때문에 정상 컨디션이 아니긴 했다.
  • [17] 그런데 이듬해 친선 경기에서 한국 선수들을 상대로 폭력을 휘둘렀다. 프랑스에서 뺨 맞고 한국에서 화풀이?
  • [18] 사실 지금까지의 대회에서 한국을 이긴 팀은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무조건 16강에 진출했다. 유일한 예외는 54 스위스 월드컵 당시 터키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