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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덕

last modified: 2018-09-29 09:01:12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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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 되면서 기른 수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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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센스.

두산 베어스 No.89
한용덕(韓容悳)
생년월일 1965년 음력 6월 2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대구광역시
출신학교 대전천동초-충남중-천안북일고-동아대학교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7년 빙그레 이글스 연습생
소속팀 빙그레 이글스 (1987~1993)
한화 이글스 (1994~2004)
지도자 한화 이글스 투수코치 (2004)
한화 이글스 재활군코치 (2007~2008)
한화 이글스 투수코치 (2009~2010)
한화 이글스 재활군/수석코치 (2011~2012)
한화 이글스 감독대행 (2012)
두산 베어스 퓨처스 총괄코치 (2015)
두산 베어스 1군 투수코치 (2015~2017)
두산 베어스 1군 투수코치 및 수석코치 (2016~2017)
한화 이글스 감독 (2018~ )
프런트 한화 이글스 단장 특별보좌 (2013~2014)

한화 이글스 역대 감독
한대화 (2010~2012.08.28) 한용덕 (대행, 2012.08.29~2012.10.07) 김응용 (2013~2014)
이상군 (대행, 2017.5.23~2017.10.30) 한용덕 (2018~ ) 현직


Contents

1. 개요
2. 불우했던 젊은 시절
3. 연습생 신화
4. 지도자 시절
4.1. 한화 이글스
4.1.1. 투수코치 시절
4.1.2. 감독대행 시절
4.1.3. 감독대행 사퇴 이후
4.2. 두산 베어스
4.3. 한화 이글스 감독 시절
5. 통산성적

1. 개요

무관의 투수왕[1]
이글스의 또다른 연습생 신화
한화의 10년 암흑기를 종결시킨 명감독

한화 이글스의 감독이자 이글스의 숨은 명(名)투수 중 한 명. 이글스연습생 신화에 타자로 장종훈이 있다면 투수에는 한용덕이 있다. 그리고 영어로 쓰면 용덕한이 된다고 한다 하이키킹[2] 후 대충 던지는 듯한 상당히 특이한 투구 폼을 지니고 있었다.

2. 불우했던 젊은 시절

그의 젊은 시절은 고난으로 가득했다. 원래 고향은 대구지만, 부친의 사업 실패로 8살 때 대전으로 이사하여 가난에 찌든 유소년기를 보냈다. 대전 천동초교 때 유격수로 야구를 시작했지만 덩치가 작은데다 실력도 그저 그래서 홀대를 많이 받았고, 천안북일고를 졸업하고 동아대 야구부에 진학하면서 덩치는 커졌지만 이번엔 중학교 시절에 부상당한 왼 무릎의 관절염이 재발하여 결국 1년만에 자퇴해야만 했다.

그 뒤로 자포자기하여 술에 찌들어 사는 나날을 보내는가 하면, 야구를 잊기 위해 관절염과 약시를 숨기면서까지 16개월 방위 판정을 받아 군 복무를 하였고, 제대한 후엔 잡부나 트럭 운전도 했다. 그러나 야구를 끝내 잊지 못해 대전구장을 자주 기웃거리다, 결국 1987년에 고교 시절 은사이자 당시 한화의 전신 팀인 빙그레에 막 감독으로 부임한 김영덕 감독에게 "배팅볼 투수라도 시켜 달라"고 하소연하여 허락을 받고 연습생 신분으로 야구 인생을 재개했다."선생님…야구가…야구가 하고 싶어요…." 그 뒤 3개월 후에 연봉 600만원[3]#에 정식 선수로 등록, 포지션도 투수로 바뀌었다. 배팅볼 투수로 입단하여, 배팅볼을 던져주며 제구하는 법을 익혔다 한다. 특유의 하이키킹 후 대충 던지는 듯한 투구 폼도 (현역시절 투구영상), 배팅볼을 상체를 이용해 던지면 팔이 아프니까, 조금이라도 오래 던지려고 연구하다가 하체를 활용하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해서 배팅볼을 던지면서 완성한 것이다. 첫 1군 데뷔전은 1988년 7월 1일.

3. 연습생 신화

(출처 : 포토로)
험난했던 빙그레 이글스 선수 시절

처음엔 구종이 직구밖에 없는 등 투수로서도 그저 그랬으나, 1990년 전지훈련을 다녀온 뒤로 슬라이더를 장착하며 화려하게 변신하여 그 해 13승을 기록하는가 하면 1991년에는 17승을 거두며 한일 슈퍼게임 대표선수로 선발, 4차전에서 승리투수가 되는 영광도 누렸다. 그 뒤 1992년과 1993년엔 다소 부진했다.

(출처 : 포토로)
어느새 마지막이 되버린 한화 이글스 선수 시절
1994년에 해태의 '팔색조' 조계현과 다승 경쟁을 벌이며 16승을 올렸으나 강병철 당시 감독과의 불화, 대형 교통사고로 인해[4] 시즌 아웃이 된 이후 과거의 기량을 되찾지 못했다. 그 뒤 떨어져 가는 기량 속에서도 묵묵히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다 결국 2004년에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된 후 은퇴를 결정하여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그의 최종 성적은 통산 472경기 출장, 120승 118패 24세이브, 방어율 3.52, 개인통산 1341탈삼진. 통산 다승 11위, 통산 탈삼진 7위, 통산 이닝 5위이다. 이쯤 되면 네임드 레전드의 성적이지만 정작 같은 팀의 송진우, 정민철, 구대성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5] 게다가 팀이 비인기 팀이어서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역대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레전드임은 확실.

그의 탈삼진 기록인 1,341삼진은 파이어볼러가 즐비한 역대 탈삼진랭크 중 7위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최고 구속은 140대 초반, 평균 구속 130대 중후반 정도로 강속구 투수라고 보기 어려운[6] 그가 탈삼진 랭크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활약한 이유는 칼같은 제구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통산 9이닝당 볼넷 평균 허용개수는 2.19로 역대 12위. 10년 이상 선수 생활한 선수 중 4위이다.[7] 그의 주무기로는 1990년 전지훈련 때 익힌 슬라이더와 투심이 있는데, 그의 제구력은 상당히 절묘하여 카운트를 잡고 스트라이크존에서 공 반개 정도 빠지는 투심을 꽂아넣어 헛스윙을 유도, 삼진을 잡아내는 스타일이였다.

참고로 현역 당시의 등번호는 40번이었는데 이 번호를 선택한 이유는 은퇴할 때까지 40승 정도만이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담아서 고른 번호라고 한다. 그런데 은퇴할 때까지 거둔 승수는 40의 3배. 또 다른 설로 김은식의 야구의 추억에서는 40살까지 야구하고 싶다고 해서 달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확실한건 은퇴 년도인 2004년이 대한민국 나이로 딱 40세가 되던 나이였다.

특이하게도 120승을 거두는 가운데 사직 야구장에서는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다고 한다.

흑역사라 하긴 뭣하지만 불명예 기록도 가지고 있다. 11타자 연속 피안타(1993년 5월 9일 대 LG전~1993년 5월 18일 대 삼성전)와 4연타자 피홈런(01년 8월18일. 상대 타자는 이승엽-마해영-매니 마르티네스-카를로스 바에르) #

4. 지도자 시절

4.1. 한화 이글스

4.1.1. 투수코치 시절

(출처 : 포토로)
용덕매직 이 한마디로 설명 가능
그 후 투수코치로 변신했는데, 자신의 불우했던 시절 경험에 바탕한 투수 조련에 일가견이 있어 이상군 투수코치의 별명인 '상군매직'(또는 SG매직)과는 반대의 의미로 용덕매직이라고도 불린다. 무능력자들이 넘쳐나는 한화의 코치진 중 제구실을 하는 몇 안되는 코치라는 평. 2009년에는 190센티미터가 넘는 큰 키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못미더운 공만 던지던 양훈을 준수한 불펜으로 개조하는 데 성공했다.[8] 재미있는 것은, 한용덕 코치는 투수 조련에 있어서 제구보다는 구위를 상대적으로 더 강조하는 타입이다. 과거 유원상김혁민에게도 구위 강화를 위해 팔 각도를 더 올릴 것을 주문한 바 있으며, 양훈의 경우에도 제구보다는 구속과 구위 위주로 개조했다.

한화 팬들이 원하는 것 중의 하나가 이상군 코치의 퇴출과 한용덕 코치의 1군 투수코치 복귀[9]였는데 2009년 6월 22일 1,2군 코치의 이동으로 이상군 코치와 자리를 맞바꿔 1군 투수코치로 승격되었다. 다만 자신에게 찍힌 사람은 잘 안쓰는 김인식 감독의 특성상[10] 프런트의 개입이라든가 차기 감독감으로 꼽히는 이상군의 화살 막아주기가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나왔으나 다행히 이상군은 2010년에 스카우터로 자리를 옮겼다.(…)

2010년에는 이상군 코치가 짤렸고, 다른 투수코치도 정민철 코치여서 1군 코치로 자리잡을거 같…았는데, 성준[11]이 영입되면서 2군 투수코치로 밀려났다.(…) 2010 시즌까지, 1군에서 망가져 내려오는 한화 투수들 응급수리해서 올려 보내고, 또 다른 망가진 투수들 내려받아 고치는 '응급실 전문의' 신세였다.

결국 성준삼성으로 떠난 2011 시즌에서야 다시 한화의 1군 투수코치가 되었다. 초반에 류현진이 부실한 모습을 보여 불안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한화 투수진의 방어율은 정말 마법을 부린것 마냥 쭉 내려갔다.오오 용덕매직 오오

그런데 중반 시점에 어째서인지 2군 투수코치로 내려가고, 정민철 투수코치 혼자서 투코를 보고 있는 상황. 아무래도 현재 1군에 있는 불펜들의 불질(유전어라든가, 윤불진이라든가...)때문인지 새로운 불펜진 수혈을 위한 보직이동이라는 카더라도 있는듯.

근데 아닌게 아니라 불펜진을 보면 정민혁, 신주영과 같은 필승계투들이 하나둘 올라오고 있는 모습을 보자면 보직 이동이 단순히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얼마 못 가서 (타자들의 득점지원 기복도 요인이지만) 1군 투수들이 대거 몰락했다. 류현진은 어깨 부상이 우려되어 전력 이탈[12]했고, 이어서 양훈도 허리 통증으로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되었다. 김혁민, 장민제 등도 이전만 못한 부진을 보이고 있고, 그나마 안정적인 안승민도 역시 조금은 버거워하는 모습이다. 불펜이야 뭐어... 노장인 박정진이 2이닝이나 그 이상을 소화해야 하는 판국이고(쿠옹 빙의), 나머지는 이른바 '필승조'가 사실상 없다. 이젠 응급실 전문의도 모자라 주치의를 하셔야할 판.

어쨌거나, 그가 살려내거나 키운 투수들의 면면을 보면 한화의 암흑기 마운드를 책임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양훈의 성장이 대표적이지만, 이후 망가진 양훈다시 부활시켰고, 여러가지 문제점이 지적되던 안승민은 2010년 8월에 1군 선발로 등판해 환골탈태에 가까운 변화를 보여주며 한화 마운드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여기에 송창식장민제 역시 한용덕 코치의 작품이다. 완전히 무너졌던 김혁민까지도 부활시켰다. 정말이지 경탄이 절로 나온다. 지금은 LG 트윈스로 이적한 유원상의 슬라이더의 경우에도 한용덕 코치가 전수해준 슬라이더이다. 그리고, 이 중 한화 소속 투수들은 용덕매직이 떠난 2013년에 제대로 폐품이 되었다.

2012년 7월 20일, 잠실 야구장에서 개최된 한-일 레전드매치에서 중간계투로 나와 2이닝을 먹으면서 탈삼진도 빼앗아내는, 여전히 현역과도 같은 폼을 보였다.

인터뷰에 따르면, 은퇴 후 팔꿈치 수술을 받고 나서는 팔이 잘 안 올라가 예전처럼 던지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런데도 저 정도이니... 오죽하면 경기중 실시간 댓글에 (지금 계투 내리고) 용덕이 형 투입시키라는 말까지... 그럴싸한데?

2012년 다시 1군 투수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고, 5월 12일 코칭스태프 개편 때 수석코치로 승격되어 임무를 수행하였다. 8월 10일 부친상을 당했다.

4.1.2. 감독대행 시절

(출처 : 포토로)

8월 27일, 한대화 감독이 전격 경질되면서 남은 2012 시즌 감독의 빈 자리를 대신하는 감독 대행을 맡았다. 8월 29일 넥센전에서 6:7로 감독 대행으로서의 첫 승리를 거두었으며, 9월 1일에는 KIA 타이거즈를 상대로 3:2로 승리를 하여 감독대행 이후 3연승을 거두었다. 한용덕이 감독대행을 맡은 이후 팀은 9월 21일까지 12승 6패를 거두며 이전에 비하면 엄청난 선전. 그리고 지난 9월 20일 LG 트윈스와의 경기를 앞두고 LG를 잡아 탈꼴지 욕심도 드러냈다.관련 기사 9월 21일까지 7위 LG와의 승차가 2.5게임차였으니 불가능은 아니었다. 하지만...

결국 선수층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꼴찌로 시즌을 마무리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한용덕을 욕하는 사람들은 전혀 없었다.

꼴찌로 떨어진 팀을 묵묵히 수습하면서 이전같이 허무하게 지는 경기를 줄여나가는 모습으로 한화 이글스 갤러리에서는 "용왕"[13]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2대왕 용왕 시즌 막판 활약으로 감독 후보로 고려되기도 했으나, 결국 김응용 감독이 부임했고 2012년 10월 14일 사의 의사 표명을 했다. 관련기사 후임으로는 김성한이 수석코치로 임명.

참고로 2012년 한화 이글스의 승률은 53승 3무 77패, 승률 0.408였는데 이중 한용덕 감독대행 시절 성적은 14승 1무 13패, 승률 5할 1푼 9리로 상당히 선방한 편이다. 최근 5년간 한화 이글스 감독 중 가장 좋은 성적을 낸 감독인 셈.

4.1.3. 감독대행 사퇴 이후

시즌 후 거취를 바로 정하지 않아 몇몇 팀에서 러브콜이 들어와 많은 팬들이 불안해했다. 한편 구단에서는 해외 연수를 권유하였다.[14] 투수 때문에 골치 썩는 팀들은 다들 침 질질 흘렸겠지... 한화 마운드를 채울 용병 투수를 고르는 작업에 들어갔다. # 휴 다행이다.

그러던 와중,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을 앞두고 류중일 감독에 의해 투수 파트를 전담하는 코치진으로 내정되었다. 타이중 참사 이후, 당시 불을 질러댔던 차우찬을 추천했다는 사실이 알려졌으나 야구팬들 대부분이 류중일 감독이나 양상문 코치에게 책임을 물어서 크게 추궁받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WBC가 끝난 후 2013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산하 마이너리그 팀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았다. 마침 LA에 입단한 류현진에게도 든든한 동반자가 되었다. #

마이너리그 시절 손수 캐치볼을 던졌는데 하루에 200개를 던져도 멀쩡했다고...

괴물투수의 파츠 중 슬라이더 파츠를 붙여주셨다

2013년 6월 12일 모친상으로 잠시 귀국했으며 9월 14일 코치 연수를 마치고 귀국, 이후 은퇴한 신경현과 함께 공익근무 복무 중인 선수들의 훈련을 돌보고 있다.

2014년 1월 시점에서도 한화 이글스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아직 코치진에 그의 이름이 올라와 있지 않다. 앙대! 투수진 정비는 어찌 하라고?! 결국 프런트로 간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정확하게는 노재덕 단장의 요청으로 단장 특별보좌역이 되어 현장과 프런트의 가교 역할을 할 예정.

단장 보좌역으로 간 뒤에도 신설된 2군 구장인 서산 야구장메이저리그식 카메라 장비 도입을 건의하여 실행시키거나 '다른 팀에서 제의가 와도 절대 이글스를 떠나지 않겠다 라고 인터뷰에서 언급하는 등[15] 한화 팬덤 사이에서 한용덕의 지지도는 점점 치솟으며 갓용덕이 되고 있다.

14시즌 5월 15일, 갑작스럽게 김성한 수석코치가 사임했다. 김응용 감독은 수석코치 없이 시즌을 마무리한다고 언급했지만 낮을 많이 가리는 노감독의 성격상 코칭스태프와 선수단의 가교를 맡아줄 수석코치의 필요성은 절대적이다. 그 때문에 후임 수석코치로 기용설이 있다. 차기 감독 물망에서 이정훈이 짬밥에서 더 우세한 것도 있고 그러나 김종모 타격코치가 수석코치로 선임됐다.

베이스볼긱과의 인터뷰 #1, #2, #3, #4, #5, #6, #7, #8, #9, #10, #11

2014년 시즌 후에는 한화팬들 사이에서 차기 감독문제로 논란이 되고 있다. 구단 측에서 이상학을 내세워 내부 승격설을 언론에 퍼뜨렸는데 이 내부승격의 유력한 후보로 언급되고 있는 까닭에 한화팬덤은 김성근 데려오고 칰무원 싸그리 방출vs한용덕 승격vs이정훈 승격의 세갈래로 나뉘어 내분 조짐을 보이고 있다. 임시감독 시절 성적만 놓고 봐도 무난하지만 썩 뛰어난 정도는 아니었으며 또한 검증이 가능할 정도로 장기 시즌을 뛰어본 게 아니기 때문에 미지수라는 것이 내부승진을 비판하는 측의 의견. 그리고 25일 저녁에 김성근 감독 영입이 공식화되면서 논란은 수그러들었다. 괜찮아, 투수 재활 잘 하시면 되지 뭘... 신동아 12월호에 실린 박동희의 기사에 따르면 한화 구단에서는 내부승진으로 한용덕을 밀었는데 그룹에서 김성근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고 한다.

그런데 투수코치 자리에 '김성근 사단' 출신인 박상열,계형철 코치가 영입된데다가 정민태 전 롯데 코치마저 한화와 계약하게 되어 입지가 더 좁아졌다. 게다가 김성근 사단의 핵심인 계형철 코치와 선수 시절 견원지간이었다는 소문이 도는데다가#1#2, 김승연 구단주가 그의 선수보는 능력학맥을 높게 평가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피차 얼굴 붉힐 일 없게 프런트에서 남은 생을 보낼 듯 싶다.

4.2. 두산 베어스

그런데... 놀랍게도 두산 코치로 떠난다고 한다. (이 때문에 계형철과의 악연도 새삼 재조명되고 있다.) 칰무원 둘(강석천, 조경택)도 같이 두산으로 갔다고 한다.# 팬들은 뒤의 둘은 제껴놓고(...) 후에라도 돌아오길 바라며 크게 아쉬움을 나타내고 있다.

후속 기사에 따르면, 이미 시즌 후 김성근 감독이 부임한 직후 사표를 제출했으나 노 전 단장이 만류하는 바람에 수리가 늦어진 것으로, 특보라는 어정쩡한 자리에 오래 앉을 수 없다고 생각했으며 특히 현장에서 더 일하고 싶은 생각에 결국 사표를 제출했고, 사표가 수리된 직후 두산 김태형 감독이 투수력 보강을 목적으로 직접 제의했다고 한다. 한용덕 씨는 두산에서 '화수분 야구'가 어떤 건지를 배우고 싶다는 취지를 밝혔다.

그 뒤 두산 베어스의 투수코치 및 수석코치로서 두산의 2번의 우승과 1번의 준우승 업적에 기여한다.

2017 포스트시즌 기간 중에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곧 선임될 것이라는 하마평에 올랐다. 코치진을 11명이나 대거 재계약 불가 통보를 내리고도 새로운 감독에 대한 말을 아끼는 한화 구단의 모습에서 기자들과 업계 관계자들은 당시 두산이 포스트시즌을 치르는 중이라 이에 영향을 끼쳤다는 논란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몸을 사리는 것으로 분석했고, 결국 한국시리즈가 종료된 직후에야 이에 대한 기사가 대거 쏟아졌다.

4.3. 한화 이글스 감독 시절

결국 2017년 한국시리즈가 끝난 다음날인 10월 31일에 공식적으로 한화 이글스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계약금은 3년 12억원(3년간 연봉 3억원, 계약금 3억원). 한편 수석코치에는 장종훈 전 롯데 타격코치, 투수코치에는 송진우, 배터리 코치는 강인권 전 두산 코치가 선임되었다.


11월 3일에 열린 취임식에서 한용덕 감독은 현재의 이글스에 대해 "좋은 선수들은 많지만 내구성이 부족했다"면서 선수들의 줄부상을 거론하는 한편 신인 선수들에게 기회를 많이 주는 '리빌딩'을 피력하였고, 선수단의 패배의식을 지우고 자신이 감독으로 있는 3년 내에 팀을 우승권에 올려놓겟다고 포부를 밝혔다. 물론 팬들은 다른 건 몰라도 맨 마지막 부분에서는 전혀 믿지 않고 있다(...). 팀의 현재 상황도 상황이거니와 이제까지 워낙에 속아왔던 것도 있고...

그러나, 이 해 초반부터 한화는 작년까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우선 송진우 코치와 함께 투수진, 특히 불펜의 수준을 끌어올렸는데, 지난 3년동안 순 먹튀였던 송은범을 수준급의 땅볼형 투수로 개조하는 등의 성과를 올려 불펜진을 리그에서 최저 평자점을 기록하게 만들었고, 특히 자신감있는 투구를 강조하며 이상군과 마찬가지로 유망주 발굴에도 힘을 쏟았다.

여기에 박종훈 단장이 영입한 외국인 선수들 중 키버스 샘슨과 제라드 호잉이 대박을 치면서 리그 수위의 에이스 투수와 리그 최고급 클린업을 얻게 되어 팀 전력이 크게 향상됨으로서 작전 수행에 큰 도움을 얻었다. 수비 부문에서도 정근우와 이용규의 급격한 노쇠화에도 불구하고 정은원을 비롯한 유망주들이 그 자리를 훌륭하게 메꿔주었고, 비록 타선은 장종훈 코치의 트롤링 어긋난 코칭 때문에 전체적으로 변비야구가 되는 부작용을 얻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열이 커리어 하이를 찍었고, 다른 타자들도 작년까지와는 달리 적극적인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심지어 노쇠화를 보인 정근우와 이용규도 각각 포지션 변경과 몸을 사리지 않는 플레이로 팀에 크게 기여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팀의 최고 프랜차이즈라는 김태균은 부상과 기량 저하로 짐짝 신세가 됐다(...).

그 외에, 김성근 감독 시절과는 달리 펑고나 특타 같은 기술 주입보다 장기 레이스에 대비한 체력 단련을 강조하였으며, 또한 주전 선수들만 주구장창 기용하지 않고 다소 모험을 감수하며 유망주들을 중간중간에 기용하기도 했는데, 이는 후반기에 한화의 경착륙을 막아주는 안전판이 되었다.

이러한 호재에 힘입어 한화는 초반부터 돌풍을 일으켜, 시즌 전 최하위 후보라는 주변의 평가를 비웃듯이 5할 승률을 꾸준히 유지하며 "전반기 2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한다. 비록 후반기에는 선수들의 체력 저하와 원래부터 얇은 팀 선수층[16]으로 인한 로테이션의 한계, 다른 팀들의 분석과 견제로 인해 전반기에 비해 크게 약진하진 못했으나 이 때도 급격하게 무너지지 않는 끈질김을 보여주며 5할 승률을 유지, 결국 9월 28일 두산전에서 정규시즌 최소 5위 확보에 성공하여 팀의 지긋지긋하던 10년 암흑기에 마침표를 찍게 된다.

5. 통산성적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8 빙그레 이글스 12 41⅓ 2 1 0 - 0.667 3.05 39 9 21 16 15 14 1.452
1989 23 67 2 2 1 - 0.500 3.22 64 5 29 46 25 24 1.328
1990 38 171 13
(5위)
9 3 - 0.591 2.53
(5위)
147 10 65 99 59 48 1.199
1991 31 201⅔
(5위)
17
(2위)
6 2 - 0.739
(2위)
2.23
(3위)
164 10 56 122 59 50 1.046
1992 29 186⅓ 9 11 3 - 0.450 2.99 144 16 65 122 69 62 1.052
1993 27 172⅓ 10 11 5 - 0.476 2.98 143 13 36 112 61 57 0.981
1994 한화 이글스 27 177⅓ 16
(3위)
8 0 - 0.667 3.25 168 22 33 105 71 64 1.111
1995 26 180⅓ 8 13 0 - 0.381 3.29 162 13 51 121 72 66 1.126
1996 21 111⅓ 8 8 1 - 0.500 4.37 111 13 29 57 59 54 1.195
1997 25 93 1 8 1 - 0.111 4.16 89 10 25 61 45 43 1.183
1998 56 131⅔ 7 3 4 - 0.700 2.26
(3위)
104 9 38 96 38 33 1.010
1999 23 90⅓ 2 7 1 - 0.222 7.47 123 21 39 51 83 75 1.705
2000 38 130⅔ 7 13 0 4 0.350 4.68 133 17 50 85 81 68 1.316
2001 31 144 8 10 0 2 0.444 3.56
(4위)
150 14 40 112 65 57 1.271
2002 33 116⅔ 8 7 2 1 0.533 4.94 116 17 30 86 68 64 1.174
2003 32 55 2 1 1 3 0.666 4.91 59 5 14 42 31 30 1.236
2004 10 10 0 0 0 1 0.000 9.00 17 2 4 8 13 10 1.900
KBO 통산(17시즌) 482 2080
(5위)
120 118 24 11 0.504 3.54 1933 206 625 1341
(7위)
914 819 1.173

완투, 완봉기록
년도 완투 완봉
1990년 3완투 1완봉
1991년 12완투
(2위)
4완봉
(1위)
1992년 9완투 2완봉
(4위)
1993년 12완투
(1위)
3완봉
(5위)
1994년 4완투 1완봉
1995년 9완투
(3위)
3완봉
(2위)
1996년 3완투 1완봉
1997년 2완투 0완봉
1999년 1완투 0완봉
2000년 3완투
(3위)
0완봉
2001년 2완투 1완봉
(4위)
통산 60완투 16완봉
(7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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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통산 기록으로 보나, 전성기였던 1990년대 초반 단일 시즌 기록으로 보나 당대의 에이스 중 한 명이었지만 막상 타이틀을 차지해 본 적이 없다. 다만 1999년에 팀이 우승하여 우승 반지는 있다.
  • [2] 다리를 최대한 높게 들어올리는 것
  • [3] 그나마도 원래는 300만원을 제시해 때려치려던 걸 김영덕 감독이 프런트를 윽박질러 2배로 받은 것이었다. 김영덕 감독은 한화그룹이 운영하던 북일고등학교 야구부를 사상 첫 전국대회 정상에 올린 경력으로 입지가 탄탄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 [4] 그 자신도 크게 다쳤고, 아들도 크게 다쳤으며, 아내 역시 다리 절단까지 고려할 정도로 심한 중상이었다. 다행히 회복했지만.
  • [5] 이럴 수 밖에 없는게, 야구붐이 불었던 2008년 당시까지 이 세명은 여전히 선수였고 살아있는 전설로서 언론과 팬들 사이에서 과거 전성기 모습을 종종 회자시켜주는 설왕설래가 있었지만 한용덕은 아니었기 때문.
  • [6] 최고 구속은 145km 정도였으나 한 경기에 이 정도 구속의 볼을 많이 던지지는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당시 선발 투수는 길게 던지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언급된 것 정도의 구속으로 던지다가 위기 상황에서만 저 정도의 구속으로 타자를 상대했다.
  • [7] 제구력도 좋았지만, 구위가 좋아 '볼이 매우 무거운 선수' 중 하나였다. 윗 기술만 따르면 한용덕은, 동 시대에 활약했던 이상군이나 주형광과 비슷한 것처럼 생각되나, 실제로는 그 당시 기준으로 강속구 투수까지는 아니어도 볼이 빠른 군에 속했다.
  • [8] 그러나, 2009년 양훈김인식노예가 되어 골수까지 빨아먹혔다. 처음에야 "이제야 밥값한다" 정도였지만, 그것도 정도껏이지...
  • [9] 실제로, 한용덕이 1군 코치로 있던 2007 시즌의 한화 이글스는 '선발 투수 방어율'이 전 구단 1위(아는 사람은 아는, 류현진-정민철--비-비, 류현진-정민철-세드릭-비-비)였으나, 이상군 코치가 1군으로 맡은 2008년에는 참담한 성적을 기록. 2007년 부활투를 선보였던 정민철이상군이 올라왔던 2007 시즌 후반 이후에는 포스트 시즌 부상으로 조기강판과 이듬해 부진 등으로 추락.
  • [10] 2007 시즌 중 류현진의 투구수 문제로 대립후 찍혀서 재활군으로 떨어진 적이 있다는 얘기가 파다하다. 단, 김인식 항목의 윤규진 관련 루머와 같이 김인식 감독에 대한 반감으로 인한 루머임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이런 인식빠들!
  • [11] 롯데 투수코치 시절 박동수아로요에 비해 아무것도 한 게 없다.
  • [12] 그 동안의 혹사로 인한 후유증을 많이 거론하지만, 반대로 한대화 감독의 투수 컨디션을 도외시한 등판간격 늘어뜨리기식 조정도 역시 문제를 키운 측면이 있다.
  • [13]덕 + 야
  • [14] 2012 시즌 종료 후, 광주 지역신문을 통해 KIA 타이거즈가 오퍼를 넣은 사실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선동열도 자기가 투수 못 키우는 걸 자각했나...
  • [15] 실제 한용덕은 '검증된 투수코치'라고 볼수 있기에 감독대행을 마친 후 복수의 구단에서 제의가 왔다고 한다. 본인 또한 한화에서 감독 대행을 하다가 다시 코치를 하는건 부자연스럽다고 느껴 고민이 많았는데, 구단에서 코치직 대신 미국 연수를 제의하여 가게 된 것이라고.
  • [16] 특히 백업 선수군과 선발투수감이 부족한 게 시즌 내내 아킬레스 건으로 작용했고, 이 때문에 팀에서 10승 이상 승수를 기록한 투수가 에이스 샘슨 1명 뿐이었다. 이를 커버해준 것이 바로 앞에서 이야기했던, 철벽으로 개조된 불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