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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석주

last modified: 2015-04-10 17:31:10 Contributors




전남 감독 시절

이름 하석주 (河錫舟 / Ha Seok-Ju)
생년월일 1967년 2월 20일
국적 대한민국
174cm
선수 커리어 부산 대우 로얄즈(1990~1997)
세레소 오사카(1998)
비셀 고베(1998~2000)
포항 스틸러스(2001~2003)
지도자 커리어 포항 스틸러스(2003~2004/코치)
경남 FC(2005~2007/코치)
전남 드래곤즈(2008~2010/코치)
아주대학교(2011~2012/감독)
전남 드래곤즈(2012~2014/감독)
아주대학교 (2015~ /감독)
선수시절 포지션 왼쪽 윙/윙백
국가대표 95경기 23골[1]

1996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라데
FW
세르게이
MF
신태용
MF
데아
MF
홍명보
MF
하석주
MF
김현석
DF
윤성효
DF
김주성
DF
기태
GK
김병지

Contents

1. 소개
2. 선수 시절
3. 지도자 시절
4. 기타


1. 소개

대한민국의 전 축구선수, 전 축구감독. 가린샤 클럽 회원. 별명은 왼발의 달인

2. 선수 시절

아주대학교를 졸업했고 1990년 K리그 드래프트에서 대우에 지명되었다. 데뷔시즌부터 주전으로 뛰며 4골 3도움을 기록하며 활약. 비록 신인왕은 현대의 주석에게 넘겨줬지만 1991 시즌에도 소포모어 징크스 따위 씹어먹는 활약으로 34경기에서 7골 5도움을 기록.스탯만 보면 공격수[2] 팀의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이 해에 처음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도 승선하여 A매치 데뷔전을 치른다.

1993~94 시즌 동안에는 국가대표팀 차출 관계로 클럽에서 많은 경기를 뛰지는 못 했지만 국가대표팀에서의 활약으로 전국구급 유명세를 얻는다. 특히 월드컵 1차예선 여덟 경기에서 여섯 골을 넣으며 대중들에게 하석주 석 자를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하석주 하면 왼쪽 윙백이 떠오르지만 예선전만 해도 본업은 공격수였다. 데뷔한 대회인 대통령배국제대회에서 MVP와 득점왕도 차지할 정도였으며 이땐 등번호도 9번이었다. 또한 94월드컵 1차 예선에서는 6게임 연속 골을 기록할 정도로 시작은 공격수였다. 이는 아직도 A매치 최다 연속골로 남아있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키크고 떡대되는 대형 스트라이커를 선호해서(황선홍-최용수) 자연스럽게 왼쪽 윙/윙백으로 전환되었다. 카타르 도하에서 열렸던 최종예선에서도 이란, 북한을 상대로 각각 골을 넣었다. 그러나 1994 미국 월드컵 본선에서는 두 경기 교체출전에 만족해야 했다. 이 대회에서 볼리비아전에 교체로 투입되어 후반 추가시간에 황선홍의 멋진 힐패스를 이어받아 1:1 결정적인 찬스를 맞이하였으나 키퍼 선방으로 골을 넣지 못하였다. 비록 황선홍에 비난이 집중되어 묻힌감이 있으나(...) 하석주도 만만찮게 개발이라는 욕을 얻어먹었다. 그때 비난과 부담감을 못이겨서 김호 감독에게 다음 경기인 독일전은 도저히 못 뛰겠다고 하소연하였으며 결국 독일전은 결장했다.

그러나 그때 찬스를 놓친 왼발슛이 한이 되어서 매일 왼발킥을 미친 듯 연습했다고 한다. 그렇게 하석주는 왼발의 달인이 되었다. 이후 하석주의 기량은 만개하여 국가대표에서도 왼쪽 미드필더 자리를 꿰찼고, K리그에서는 1996 시즌 두자릿수 득점(...)까지 기록한다.[3] 이런 활약을 바탕으로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축구선수단에 감독인 아나톨리 비쇼베츠의 강력한 요청으로 와일드카드로 선발되었다. 당시 소속팀인 대우에서는 보내기 싫어서 기브스까지 하면서 선발을 물러주길 바랐으나 비쇼베츠가 지정병원에 보내서 다시 검사를 하기까지 하면서(...) 끝끝내 올림픽에 데려갔다. 그정도로 큰 기대와 비중을 가지고 있었단 얘기...[4] 1997년을 맞아 기량이 절정기에 달해 97년에만 A매치 3골-8도움을 기록했고 대통령배의 후신인 코리아컵에 출전하여 도움 4개로 대회 MVP가 되었으며[5] 소속팀 대우로얄즈의 3관왕, 즉 트레블을 이끌었다. 개인적으로도 20-20클럽을 달성했으며 프리킥으로만 4골을 넣었을 정도로 리그에서도 맹활약했다. 1998 프랑스 월드컵 최종예선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했고 UAE전에서 특유의 공격가담으로 선제골을 넣기도 한다. 이렇게 하석주는 차범근호 체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선수였고 월드컵 본선에서도 활약이 기대되었는데...

멕시코전 초간단 요약

전반전 28분에 왼발로 벽을 넘기려고 찬 프리킥이 수비벽에 맞고 방향이 꺾이면서 절묘하게 반대편 골대로 들어갔다! 대한민국의 월드컵 출전 사상 처음으로 넣은 선제골이었다. 즉 한국은 월드컵 사상 처음으로 '이기고' 있었다. 당시 조 편성상 한국은 첫 경기 멕시코를 반드시 이겨야 16강 진출을 노려볼 수 있었기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골이었다.

그러나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인 전반전 30분, 그러니까 골을 넣고 3분여 지났을 무렵에 상대 선수에 백태클을 걸었다는 이유로 레드카드를 받고 퇴장당했다! 골을 넣은 그 경기에서 퇴장당함으로서 가린샤 클럽 가입 확정.[6] 그리고 한국은 후반전에 급격한 체력저하로 3연속 실점하며 1-3 역전패했다. 「나 넣고 점이나 다니!」 라는 삼행시를 만든 바로 그 경기.

이 퇴장 판정에 대해 말들이 많았는데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다리가 아닌 공을 향해 태클이 들어갔고 실제로 공을 터치하기도 했기 때문. 하석주 자신도 퇴장은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가 레드카드를 보고 어이없어하고, 옆에 있던 고종수도 판정에 놀라는 모습이 보인다. 국내에선 한국이 약소국이라서 판정에서 피해를 봤다는 흔한 레퍼토리가 반복되었다.그럼 멕시코는 강대국인가? 이 때 이미 OECD 회원국이었던 건 제껴두자. 정몽준 당시 대한축구협회 회장이 FIFA 회장 선거에서 제프 블라터의 반대파로서 나르트 요한손 당시 UEFA 회장을 지지한 데 대한 보복이라는 음모론도 나돌았고 여튼 이래저래 설들이 많았다. 일각에서는 차범근 당시 감독이 선제득점으로 고양된 선수들을 잘 컨트롤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었다. 하석주도 나중에 인터뷰하기를 골을 넣고 너무 기쁘고 흥분되서 뭘 어째야 할지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 다분히 의도적으로 위험하지 않은 지역에서 파울을 하고 맘을 좀 다스리려고 했다고 한다. 스스로 옐로카드까지는 각오했다고... 그런데 심판이 빨간 카드를 꺼내서 처음엔 심판이 잘못 꺼낸 거 아닌가 의심했다고 한다. 백태클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었고, 설명도 잠깐 들었을 뿐이라 그걸로 퇴장까지 당할 줄은 몰랐다고(...) 참고로 하석주 개인적으로도 축구를 시작한 이래 공식경기에서 퇴장 당한 것은 이 경기가 처음이었다. 첫 끗발이 개끗발이여

아무튼 누구나 동의하는 것은 하석주가 시범케이스로 재수없게 걸렸다는 것이다. 당시 FIFA에서는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비신사적인 백태클에 대한 제재에 중점을 두었고, 바로 퇴장까지 줄 수도 있다고 공언한 바 있다. 그런데 말은 뱉어놨지만 막상 1라운드가 절반이 지나도록 퇴장 사례가 하나도 없으니 엄포가 머쓱해질 수 있던 상황에서 하석주가 재수 없게도 그 엄격한 판정의 시범케이스에 걸려 퇴장당한 것이라 볼 수 있는 것. 그 증거(?)로 옐로카드 없이 바로 퇴장당한 경우에는 보통 2경기 출장정지인데 하석주는 고의성이 없었고 심판의 미숙함도 있다고 판단되어 1경기 출장 정지로 완화되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여하튼 하석주는 프랑스 월드컵 1호 퇴장 선수로 기록되었고, 한국 축구팬들은 이후 같은 대회에서 다른 나라 선수들이 하석주보다 더 거친 백태클을 하고도 옐로카드나 구두경고 정도로 넘어가는 걸 보며 아쉬운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7]

그래도 1경기 출장정지로 완화된 덕분에 벨기에전에 다시 선발로 출전할 수 있었고 전매특허인 기가막힌 왼발 프리킥으로 유상철의 동점골을 어시스트하며 약간의 명예를 회복했다. 왼발로만 1골 1도움, 한국이 기록한 두 골에 모두 관여하며 사실상의 팀의 에이스[8]의 면모를 보여줬지만, 그걸 모두 덮어버릴만한 한 번의 실수로 비난을 받아야 했던 불운의 선수. 2번의 월드컵에서 이래저래 욕만 먹었다(...) 하석주는 퇴장 이후 팀이 지고 차범근까지 경질당하는 걸 보면서 이번 월드컵을 끝으로 국대은퇴까지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벨기에전에서 1어시도 하고 팀이 투혼을 보이면서 어느정도 마음의 위안을 삼았다고...

이후로 2000년 아시안컵까지 계속 부동의 왼쪽 윙백으로 국대에서 맹활약했으며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 무대를 마지막으로 대표팀에선 완전히 물러났다. 이후 그 자리는 이영표가 물려받았다.[9]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이 하석주도 히딩크사단에서 제법 오래, 많은 경기를 뛰었다. A매치 100경기가 눈 앞이기도 하고 또 한 번의 월드컵을 노려볼 만했으나...물론 하석주가 경쟁을 이겨서 02월드컵에 나간다는 보장은 없었으나 98월드컵 퇴장이 트라우마로 남아서 본인이 스스로 그만둘 때가 됐다고 생각해서 센츄리클럽 가입을 얼마 안남겨두고 국대은퇴를 결정했다고 한다. 퇴장이 얼마나 큰 트라우마가 되었는지 아직도 퇴장 당하는 선수를 보면 자기일 같고 '나와 같은 상처를 입으면 안되는데'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고 한다.

Ha_Seok-Ju_Vissel_Kobe.jpg
[JPG image (Unknown)]


대우에서 쭉 뛰다가 J리그를 잠시 다녀온 후 포항 스틸러스 유니폼을 입고 선수생활의 황혼을 장식하다 2003년에 공식적으로 은퇴했다.프로리그 수상은 91년에 대우로얄즈가 21경기 무패라는 기록을 세우며 우승을했으며 97년에는 소속팀 대우가 트레블을 달성했다. J리그에서는 세레소 오사카비셀 고베에서 뛰었는데 세레소에서는 외국인 3명 출전쿼터에 걸려 당시 황선홍과 마니치 등에 밀려 많이 뛰지 못했고 비셀 고베로 이적하면서 팀의 중추로 펄펄 날았다. 당시 비셀 고베의 하석주-김도훈-최성용 한국인 3인방은 만년 하위권인 비셀 고베를 1부에 잔류시켰고 심지어 8위라는 호성적까지 찍었다. 당시 팀내에서는 최고참 하석주를 '오야붕'이라고 불렀다고...팀내 최고참이기도 하고, 한국국대가 3명이나 있는데 2부로 강등되면 이후 후배들의 진출길도 막고 망신이라 생각해서 더 열심히 뛰었다고 한다.[10] 그리고 1년 더 뛰고 싶었는데 가족때문에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성공적인 J리그 진출을 이룬 선수 중 한 명. K리그 통산 기록은 285경기 45골 25도움.

플레이스타일은 전형적인 클래식윙어로 탁월한 왼발 킥력을 바탕으로 대표팀의 셋피스를 담당했으며 일본 진출 소속팀인 비셀 고베에 진출해서도 팀의 셋피스를 담당했다. 97년에는 국대에서 셋피스로만 2골 6도움을 기록할 정도(...) 강력한 킥보다는 정확하고 엄청난 커브를 자랑하는 킥으로 프리킥시 슛-크로스에서 모두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으며 특히 페널티박스 오른쪽에서 니어포스트로 날카롭게 감기는 프리킥은 백미로 많은 프리킥골을 성공시켰다. 정확한 킥을 바탕으로 98월드컵 예선부터 한국팀의 주요 공격루트는 '하석주 크로스-최용수 헤딩'일 정도로 정확한 킥을 자랑했으며 당시 한국 선수 중 몇 안되는 달리면서 크로스를 올릴 수 있는 선수였다. 참고로 97~98년 당시 한국팀의 경기운영은 미드에 유상철-김도근을 박아 놓고 중앙을 커버하고 당시 하석주, 고정운, 서정원, 이상윤 등 우수한 윙자원이 넘쳐나던 행복한 시기라 양 사이드에서 하석주, 서정원이 무한 크로스를 올리고 최용수 or 황선홍 or 김도훈 헤딩이 주요 공격루트였다. [11] 이 전술로 당시 탈아시아급 피지컬을 가지고 있던 한국은 월드컵예선을 승승장구하며 아시아를 평정하였고 최용수는 예선 득점왕에 등극하였으며 해외에서도 아시아 최고 공격수로 주목을 받았다.[12]

한국의 이 공격루트에서 실질적으로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주로 하던게 하석주였다. 그 공적을 인정받아 당시 한국국대에서 잘하면 무조건 사고보던 J리그에도 진출했고 J리그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참고로 당시 위상을 알 수 있는 대목으로 엉뚱하긴 하지만 당시 플스게임 위닝일레븐에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주력18-패스17을 찍은 선수가 하석주다.

킥 뿐만 아니라 주력도 빨랐으며 드리블도 아시아에서는 충분히 먹혔고 수비도 세계와는 격차가 있었으나 적어도 아시아에서는 탑급으로 안정적이었다. 아시아에서는 완벽하다시피한 N0.1 윙백이며 스타일은 발도 빠르고 드리블도 되는데 킥은 A급인 완전한 클래식 윙어. 또한 공격수 출신다운 득점본능으로 중요한 순간에 은근히 멋진 골도 많이 넣었다. 1995년 마라도나의 보카주니어스 초청경기에서 1:0으로 뒤지고 있던 경기에서 8만 관중앞에서 그림같은 다이빙헤딩슛으로 동점을 만들기도 했으며[13], 1996년에는 마찬가지로 유벤투스 초청경기에서 국대로 출전, 종료직전 골을 넣으며 4:0 완승을 이끌기도 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2000년 잠실에서 열린 한일전에서 통쾌한 왼발 중거리슛으로 1:0 승리를 이끈 모습은 두고두고 회자가 되었다.[14]

11년간 A매치 통산 95경기 23골 기록으로 역대 득점 순위로만으로도 열손가락 안에 들어가며 센츄리클럽급의 맹활약을 했으나 백태클의 임팩트가 너무 강렬해서 백태클로만 기억이 되지만 한국을 넘어 아시아의 한시대를 풍미한 왼쪽 윙/윙백으로 한국축구의 레전드 중 한명이다. 다만 당시 한국은 포백이 아닌 스리백을 쓰던 시절이며 따라서 윙백이라고 해서 포백의 풀백으로 생각하기엔 무리가 있으며 국대 스리백-포백 변화시기에서 전문 스리백 윙백이자 02년 이후 박지성, 이천수, 설기현 등 클래식윙어와는 다른 우수한 윙포워드가 나오면서 국대 클래식 윙어의 마지막을 장식한 선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골을 넣은 뒤 고유 세리머니가 있는데 양팔을 쭉펴고 계속 달리는 속칭 '비행기' 세리머니이다. 어릴적 비행기를 타는 사람들이 부러워서 골넣을 때마다 기분이나 내려고 그 세리머니를 하게 되었다고(...)
하석주를 상징하는 고유 번호는 17번으로 94월드컵때는 16번을 달았으나 이후 쭉 국대 17번은 하석주의 차지였다.

3. 지도자 시절

프로팀 코치로 지도자 수업을 받다가 모교인 아주대학교의 사령탑을 맡으면서 지도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부임 첫 해에 전국대학선수권에서 우승했고 다음 해에는 1, 2학년 대회에서 우승.

2012년 8월 시즌 도중 해성 감독의 사임으로 공석이 된 전남 드래곤즈 감독직에 부임하면서 K리그 사령탑으로 데뷔했지만, 이미 하위권으로 떨어져버린 전남의 성적에는 큰 변화를 주지 못했다.

2013 시즌은 완전 젊은 선수들로만 꾸려나가게 되면서 하석주 유치원이라는 소리까지 듣게 된다. 44세였던 김병지를 영입했음에도 팀 평균 연령은 24.9세. 김병지마저 빼버리면 24.3세까지 떨어지는 판국이었다. 경험이 부족한 선수진 덕분에 좋은 성적을 내기가 어려웠으며, FA컵 16강전에서는 김병지마저 빼버리고 2군을 내보냈다가 K리그 챌린지수원 FC에게 3:4로 덜미를 잡혀 탈락해버리는 비극을 맛보게 된다. 리그도 하위권인 10위로 마무리하지만 하석주는 아직 이를 갈고 있었다.

2014 시즌에는 어린 선수들의 중심을 잡아줄 베테랑 필드 플레이어로 수원과 계약이 만료되어 한국을 떠나 있었던 스테보와 성남 소속의 현영민을 낙점한다. 이외 대구 소속이었던 레안드리뉴와 노상래보다 잘 한대서 영입했더니 투명인간에 쿠크다스 멘탈이었던 크리즈만, 동의대의 도움왕이었던 안용우를 영입했고, 이들은 취소선 처리된 한 분만 빼고는 대체로 기존 선수진과 좋은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이종호의 포텐이 터지면서 작년 전남의 골칫거리였던 빈약한 공격력을 완벽히 보완함에 따라 요 몇 년간의 전남답지 않게 상위권에 머무르며 성공적인 시즌을 보내고 있다.

그렇지만, 정말 아쉽게도 7위로 하위스플릿으로 떨어졌다. 주요 선수들인 이종호, 안용우, 김영욱을 아시안 게임 차출로 한동안 쓰지 못 하면서 성적이 떨어진 데다 10월 26일 있었던 33라운드 인천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어처구니 없는 오심 판정들로 3-3으로 비기면서 7위로 떨어진 것.

2014년 11월 12일 구단의 재계약 제의를 거절하고 노상래 코치를 후임으로 천거한 다음 감독직을 사퇴하였다. 사퇴 이유는 가족. 아내가 갑상선암으로 투병하며 너무 고생했고 자녀들이 한참 아버지의 손길이 필요한 때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한가정의 가장으로서 내린 결단에 팬들은 아쉬워하면서도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이별을 고했다. 그리고 자기의 원래 본 소속팀(?) 이였던 아주대로 돌아간다고 했다.

4. 기타

의외로 학부 전공이 경영학이다. 다만 예전 대학교 체육특기생들은 운동과 상관없는 전공에 적을 걸어놓는 경우가 흔했다는 것을 알아둬야 한다.[15][16]

하석주 감독의 아들 윤수도 축구선수이다. 나이키 찬스[17]에 참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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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언론에 따라 94경기 22골이라고 하는 곳도 있으나 대한축구협회 정식 기록을 따름
  • [2] 후술하겠지만 하석주는 본래 공격수였다.
  • [3] 이때는 이미 공격수에서 윙백으로 포변한 상황이었다.
  • [4] 이 대회에서 한국은 가나를 1:0으로 이기고 멕시코와 0:0으로 비기면서 2패였던 이탈리아와의 최종전에서 비기기만 해도 올라갈 수 있었으나 1:2로 패하면서 탈락했다. 참고로 이 올림픽대표는 윤정환-최용수라인의 시작이었던 대표팀으로 기형, 최성용도 이 당시 멤버이며 당시 와일드카드로 황선홍, 이임생, 하석주를 뽑아가면서 꽤나 화려한 멤버였으나 무리한 와일드카드 기용으로 조직력이 맞지 않아 탈락했다.
  • [5] 전신인 대통령배 포함 코리아컵에서 MVP를 2번 받은 선수는 하석주가 처음이다.
  • [6] 가린샤의 퇴장 이후 36년 동안이나 같은 사례가 없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면서 해외에서도 비상한 관심사가 되었다고 한다.
  • [7] 멀리 안 가고 2010년 남아공 월드컵때 김남일이 백태클반칙을 하고도 옐로카드로 끝난것을 생각해보자.
  • [8] 황선홍은 부상으로 아웃. 서정원이나 이상윤은 본선에선 부진. 차범근 전술의 키맨이었던 수비형 미드필더 도근은 에이스라는 칭호가 어울리지 않는 포지션이었다. 그리고 팀의 실제 에이스였던 아시아예선 득점왕 최용수는 컨디션 난조인지 정작 본선에서는 제대로 써먹지 못했다.
  • [9] 이영표의 국대 데뷔는 1999년 6월이다. 98월드컵 이후로도 적어도 2000년까지는 하석주가 부동의 왼쪽 윙백이었다.
  • [10] 가시와 레이솔도 황선홍-유상철-홍명보로 외인용병 슬롯을 몽땅 한국인으로 채우기도 했다.
  • [11] 사실 이 전술은 당시 감독이던 차범근이 본인이 뛰던 80년대 독일스타일을 그대로 한국축구에 접목한 전술로 '타겟놓고 양사이드 무한 크로스'는 이후로도 차범근을 상징하는 전술이다.
  • [12] 그러나 월드컵 본선에서는 탈아시아이긴 하지만 세계와는 격차가 있다는 것만 보여주며 1무 2패로 탈탈 털리고 차범근은 중도 경질(...)
  • [13] 이 경기는 35세의 마라도나의 복귀전으로 주목받았으며 이후 후반 종료직전 보카가 골을 넣어 1:2로 한국대표가 패배하였다.
  • [14] 참고로 이 경기가 대표팀이 잠실주경기장을 홈으로 쓰는 사실상 마지막 경기다. 이후 대표팀의 홈은 상암이 대체하며 잠실주경기장은 사실상 축구국대와 작별하였으며 2013년 7월 한일전으로 13년만에 다시 국대축구경기가 열렸다.
  • [15] 체육 특기생들은 무조건 체육 관련 학과 (체육교육과 or 사회체육과 등)에 진학해야 한다는 규정은 2000년대 이후에 생겼다. 일례로 중앙대 농구부는 1990년대 중반까진 무조건 경영학과였다. 허재, 강동희도 공식적으론 중앙대 서울캠퍼스 경영학과 졸업이다. 수업은 단 한시간도 안들었다고 하지만.
  • [16] 야구 해설가 허구연 같이 입시로 법학과에 들어가서 대학원까지 나온 특이케이스도 몇 있긴 하다.
  • [17] 맨유의 크리스 스몰링을 배출한, 세계 각지의 유망주 발굴 프로젝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