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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 다쓰노리

last modified: 2015-04-03 16:35:15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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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 자이언츠 No.88
하라 다쓰노리(原辰徳)
생년월일 1958년 7월 22일
국적 일본
출신지 가나가와사가미하라
학력 도카이대학
포지션 3루수, 2루수, 1루수, 좌익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0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드래프트 1순위 지명
소속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981~1995)
지도자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야수종합코치 (1999)
요미우리 자이언츠 수석코치 (2000~2001)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 (2002~2003, 2006~)

1981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신인왕
오카다 아키노부
(한신 타이거스)
하라 타츠노리
(요미우리 자이언츠)
츠다 츠네미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83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MVP
나카오 타카요시
(주니치 드래곤즈)
하라 타츠노리
(요미우리 자이언츠)
기누가사 사치오
(히로시마 도요 카프)

요미우리 자이언츠 역대 감독
나가시마 시게오(1993~2001) 하라 타츠노리(2002~2003) 호리우치 츠네오(2004~2005) 하라 타츠노리(2006~)

Contents

1. 소개
2. 선수 시절
3. 은퇴 이후

1. 소개

일본 야구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감독. 등번호는 88번.

2. 선수 시절

후쿠오카 현 오무타 시 출신으로 가나가와 현 아쓰기 시, 사가미하라 시에서 자랐으며 도카이 대학을 졸업, 1980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1순위로 지명을 받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였다. 포지션은 3루수와 외야수였으며, 1981년 22개의 홈런과 67타점을 기록하여 신인왕을 수상했고, 1982년~1983년에는 2년 연속 최다 승리 타점을 기록, 1983년에 시즌 최다인 103타점을 기록하여 타점왕에 오른 것과 동시에 센트럴 리그 MVP를 석권했다. 같은 3루수고 잘생긴 외모 덕분에 제2의 나가시마 시게오라 불릴정도로 요미우리에서 인기가 많았던 선수. 현재 감독으로 부임하면서도 티셔츠 판매량은 꾸준히 많다고 한다.

1986년 9월 24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경기 도중 타석에서 상대 투수였던 츠다 츠네미가 던진 공에 왼쪽 손목이 골절되는 부상을 당하면서 팀 전력에서 이탈되는 상황이 발생(정확히는 공에 맞은게 아니라 배트로 공을 맞쳤으나 츠다의 직구의 위력과 정확한 타격실패로 골절상을 당한것, 츠다는 직구로만 승부하던 남자였다!),[1] 프로 데뷔 이후 처음으로 개인 최저인 113경기 출장에 그쳤다. 1987년과 1988년에 2년 연속 타율 3할대와 30개째의 홈런을 기록하여 베스트나인과 골든글러브상을 동시에 수상, 1989년~1992년에는 일본 프로야구 선수회 회장을 지냈다. 1995년 10월 8일에 도쿄 돔에서 열린 은퇴 경기(대 히로시마 27차전)에 출장, 타석에서 좌중간을 가르는 개인 통산 382호 홈런을 기록, 통산 1697경기 출장, 타율 2할 7푼 9리, 1675안타, 382홈런, 1093타점을 기록하여 선수 생활을 은퇴했다. 대학졸업 선수치고는 괜찮은 통산성적이긴 하지만 명성에 비해 부족한 성적이기 때문에 가와카미, 왕정치, 나가시마 급의 레전드는 못되지만 그레도 요미우리에서 준레전드 대접을 해준다. 구단 측은 그의 등번호인 8번을 "준영구 결번"으로 제정, 신인 때부터 은퇴할 때까지 팀에서 간판 4번 타자로 맹활약을 하였다.그런데 은퇴하자마라 바로 다음 해에 등번호 8번을 신인인 니시 도시히사에게 줬다. 게다가 니시에게 8번을 준 이유는 드래프트 1순위 지명의 유망주이기도 했지만 이름이 니(2)와 시(4)라서 2·4=8 이라는 이유에서(...)

3. 은퇴 이후

NHK 야구해설위원 등 야구 평론가로 활동했고, 1999년~2001년에는 친정팀인 요미우리로 복귀하여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의 지휘하에 타격 코치를 지냈다.

2002년에 나가시마 감독의 후임으로 차기 요미우리의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부임 첫 해인 2002년에 86승 2무 52패의 성적을 기록하여 센트럴 리그 우승을 제패했고, 이후 일본 시리즈인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경기에서 4전 전승으로 세이부를 누르고 우승을 제패했다. 시즌 종료 뒤 팀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를 동시에 우승을 이끈 공로로 일본 야구계의 최고상인 쇼리키 마쓰타로상을 수상했다.

2003년에는 구단 수뇌부와의 갈등으로 2년만에 감독직을 사임했고, 2005년 시즌 말미에 전임 감독이었던 호리우치 츠네오가 팀 성적 부진으로 감독직을 사임하여 다시 요미우리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2]

그러나 이듬해인 2006년에는 주전 선수들의 성적 부진과 부상으로 악재가 겹치면서 65승 2무 79패라는 성적을 기록, 4위로 추락하여 팀이 2년 연속 B클래스(하위권을 지칭하는 일본 언론의 표현)로 기록되는 불운을 겪게 되었다. 2007년에는 2위팀이었던 주니치 드래곤스와의 반경기차로 리그 우승을 이끌었지만, 플레이오프라고 일컫는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당시 2위팀이었던 주니치와의 대결에서 완패를 당해 일본 시리즈 진출 티켓을 따내는 데 실패했고, 2008년에 팀의 리그 우승을 제패한 후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당시 3위팀인 주니치를 꺾으며 일본 시리즈 진출에 성공했지만,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일본 시리즈 맞대결에서 3승 4패의 성적을 기록하여 우승에 실패하는 고배를 마셨다.

2008년 10월 28일에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대표팀 차기 감독으로 부임하여 "사무라이 재팬(侍JAPAN, サムライジャパン)"이라는 팀의 슬로건을 내걸었고, 등번호는 83번으로 결정하였다. 2009년 3월 24일, 결승전인 대한민국과의 경기에서 연장 10회의 접전 끝에 5대 3으로 누르고 팀을 2회 연속 우승을 이끄는 위업을 달성했다. 그리고 그해 감독으로 지내던 요미우리 자이언츠도 센트럴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끌어 맡은 팀을 모두 우승시키는 최고의 한해를 보냈다.

사실 감독이 된거 자체가 쿄진의 철저한 성골주의 때문이지, 그나마 젊은 덕장 외엔 감독으로서 특징같은 것은 없다. 그냥 일본 야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 그대로 답습하는 작전 구상에 상황판단력도 그냥 그래서 은근히 호구라고 많이 까이는 감독. 게다가 말투가 좀 질질 끄는 경향이 있어 2ch 등에서는 멍청해 보인다고 자주 까인다(...). 어찌보면 오치아이 히로미츠와는 스타일 상 정반대에 서있는 감독이다.[3]

대신에 야구 외적인 인간관리 부분에 있어서는 인정받을 정도로 호인이라는 평가가 지배적. 자잘한 작전 구사나 기술적인 면 보다는 선수 자체에 대한 관리능력과 선수단을 운영하는 능력은 확실히 있는 편이라 딱 감독에 어울린다는게 일본 내의 평가이다. 또 립 서비스가 좋아 인터뷰 등에서 자기 팀 선수뿐만 아니라 상대 팀 선수들에 대해서도 칭찬을 자주 하는데 이런 점 때문에 신사감독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4]

2009년 들어서는 아니지만 2008년까지만 해도 이승엽에 대해 상당한 신뢰를 보였으며 외적으로 까이면서도 이승엽을 많이 변호해주고 주전으로 썼는데, 이건, 선수생활 시절에 하라가 이승엽과 비슷한 스타일의 선수였기때문에 그의 스타일을 잘 이해하고 있어서 라는 면이 강하다. 2008년에 베이징 올림픽 야구 4강전에서 벌어질 일을 예언한 것은 그야말로 신화. 당시 한국이 일을 낸다면 승짱이 일낸다고 예언했는데 그 결과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특히 2008년은 정규리그에서 부진을 보인 이승엽을 어떻게든 기용해보려 했으며, 2008년 일본시리즈에서는 7경기동안 삼진만 12개를 먹으며 .111이라는 극악의 부진을 보였는데도 이승엽을 쓰지 말라는 언론과 요미우리 OB의 압박을 물리치면서 마지막 7차전까지 끝까지 믿고 선발 라인업에 기용했다. 그리고 팀은 졌다. [5]

물론 2009년에 그리도 이승엽을 내친것은[6]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말할것도 없이 이승엽 자체가 슬럼프에서 벗어날 기미가 안보이는거랑 두 번째는 자기가 발굴한 신인 돌려 써먹기에 맛들려서 이승엽이 아오안이 되어버린것(...). 실제로 하라가 발굴한(물론 코치가 잘 키운거지만(...)) 카메이, 마츠모토, 야마구치 등이 우승에 원동력이 될정도로 A급 활약을 해왔고, 그러다보니 성적 안나오는 용병을 밀래야 밀수가 없었던것.(...)[7]

그런데 2012년. 불륜 추문 및 협박 사건이 매스컴에 폭로되면서 하라 보살이라던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았다.#

일단 20일 사죄문을 발표했지만 조폭이 개입된 것까지 확인되면서 이미지를 중시하는 요미우리 측에서 이후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지 관심이 주목되고 있다. 이후 유야무야 됬는지 조용한 상태다. 사실 OB측에서 이 사람을 당장 자른다고 해도 당장 감독직을 수행할 사람이 없다. 타카하시 요시노부마쓰이 히데키가 유력 감독 후보지만 타카하시는 인성에 문제가 있는 평가가 있어서 팬들이 별로 지지하지 않고 있고 마쓰이는 코치로 발을 들이기 시작했지만 하라 본인이 그랬던 것처럼 벤치코치 등으로 최소 3여년 이상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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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얼마 전 LG 트윈스오지환도 비슷한 부상을 당했다. 공을 쳤다가 손등에 뼜조각이 떨어지는 부상을 당했다. 물론 하라에 비한다면 경미한 수준이지만. 이런류의 부상은 생각외로 많다. 하라 다쓰노리가 공치다 부상입은건 정도가 엄청 심했던 것이었지만... 팔뼈가 세조각났다. 부상회복 후에 결국 타격폼까지 수정해야 했다.
  • [2] 그렇게 당하고도 감독 자리를 다시 맡냐는 말들에 대해, "자이언츠에 대한 제 사랑에 비하면 그런 문제는 사소한 것입니다."라는 대인배적인 발언을 남겼다. 오오...
  • [3] 하지만 둘 다 연상녀와 결혼했다.(...)
  • [4] 실제로 2009년 WBC 결승전 직후 인터뷰에서 한국 팀에 대한 인상을 묻는 질문에 "그야말로 세계적인 수준의 팀"이라는 극찬에 가까운 표현을 했다. 물론 이겨서 기분 좋은 것도 있고 결승전까지 두번이나 패했으며 결승전에서도 경기가 끝날 때까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접전을 펼친 탓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공개석상에서 상대 팀에게 긍정적인 발언을 하는 하라의 성향이 드러난 인터뷰라고 할 수 있다.
  • [5] 괜히 우스갯소리로 '하라 보살' 내지는 '세계 6대 성인' 이야기가 나오는 게 아니다.(참고로 세계 6대 성인은 스포츠팬들이 농반진반으로 만든 용어로 공자 석가모니 예수 소크라테스의 기존 4인에 하라와 사우스게이트가 추가되어 6대 성인이라 일컫는다.)
  • [6] 편집전엔 '매몰차게'라는 표현이 있었으나 삭제했다. 당시 플래툰으로 이승엽을 돌려 기용한 것을 가지고 국내 언론에서 잘하는 선수를 지바 롯데 시절처럼 플래툰으로 망치고 있다는 식으로 언플 했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아예 라인업에도 못 들어갈 성적의 용병 선수를 현지에서 하라 감독도 한국계 아니냐는 소리 들어가며 플래툰으로라도 기용해주고 있다는게 당시 객관적 입장의 야구팬 및 관계자들의 의견이었다. (2009년에 이승엽은 35타석 연속 무안타, 이후 24타석 연속 무안타 등 극악의 부진에 시달렸다. 그런데도 어떻게든 이승엽을 쓰려 했다!) 국내 야구 게시판에서 괜히 '하라 보살' 별명이 나오는게 아니다. 2011년에 터진 '이승엽, 하라에게 인사하기 싫었다.'기사 사건도 국내 찌라시 기레기가 반일감정을 이용해서 거의 소설을 쓴 것이라는게 밝혀 졌을 때도 게시판 반응은 "그럼 그렇지. 하라 감독이랑 이승엽이 그럴리가..." 라는 반응이었으니...
  • [7] 거기에 외야쪽에 특급신인 쵸노 히사요시까지 첫해 주전을 맡으며 맹활약한 탓에 타카하시 요시노부가 1루로 내려오고 이승엽의 출전시간은 더더욱 줄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