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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코뮌

last modified: 2018-03-04 01:00:41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탄생
3. 진행
4. 결말
5. 영향


1. 개요

1871년 3월 28일부터 5월 20일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났던 공산주의 운동이자 이 운동으로 70일간 존속했던 인류 역사 상 최초의 공산주의 정부.

2. 탄생

프랑스가 보불전쟁에서 참패를 당하고 황제 루이 나폴레옹백부님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너무나도 한심한 대처를 보여주다가 결국 포로가 되는 지경에 처하자 결국 루이 나폴레옹은 폐위되고 파리에서는 제3공화정이 수립된다.

하지만 새로 들어선 공화정부도 나폴레옹 3세 못지않은 무능한 모습을 보여주고[1] 결국 굴욕적인 조약으로 전쟁을 끝내야 했다. 빌헬름 1세의 즉위가 베르사유 궁에서 이루어졌으니 말 다했다... 거기다가 새로운 국민의회가 자리를 잡은 도시가 하필이면 또 앙시앵 레짐의 상징이던 베르사유.[2] 파리가 혁명이 일어났던 바로 그 도시인만큼 파리 시민들은 왕당파와는 정 반대인 매우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안 그래도 전쟁의 굴욕적인 패배로 불만에 차 있던 시민들은 이런 일로 인해 더더욱 분노를 쌓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쌓여가던 불만이 폭발한 것은 공화정부가 소집한 국민위병의 처리 문제였는데, 안 그래도 불신을 받던 임시정부가 사실상의 파리 수비대 역할을 하던 이들을 무작정 무장해제시키려 하자 파리 시민들과 의용군의 불만은 폭발했고, 의용군은 이를 거부했다. 더욱이 이들의 무장해제를 담당해야했던 파리의 정규군이 이들과 손을 잡으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치달았고, 곧 3월 26일 선거가 실시되어 파리 코뮌 정부가 수립되었다.

3. 진행

파리 코뮌 정부는 자코뱅파,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 등 다양한 이념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었고, 여성 참정권의 보장, 최대노동시간 제한 등 당시로써는 상상도 못할 만큼 진보적인 정책을 폈다.

코뮌 정부의 활동에 호응하여 프랑스의 다른 여러 도시에서도 코뮌 운동이 일어났지만, 이것이 단결되어 거국적인 혁명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4. 결말

프로이센군과 프랑스 정규군은 무리하게 파리를 공격하지 않았는데, 만약 그랬다면 시가전으로 발전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시가전은 현재만큼, 아니 현재보다 더 골치아픈 전투였고[3] 따라서 시민과 국민의용군, 파리 주둔 정규군이 일치단결해있던 파리에 진입하는 것은 프로이센군의 막대한 피해를 초래할 수 있었다.

프로이센군과 프랑스 정규군은 대신 파리를 포위하고 말려죽이기로 결심한다. 파리가 아무리 대도시였어도 도시 안에서 모든 물자를 충족할수는 없었고, 식량부터 생필품까지 공급이 차단된 파리는 동물원의 동물들까지 잡아먹을 정도로 궁핍해졌다.

포위작전이 어느 정도 효과를 보이자 5월 21일 파리 정규군은 마침내 병력을 파리 시내로 진입시켰고, 시가전이 전개되면서 유명한 "피의 일주일"이 시작되었다. 이 때 죽은 사람의 숫자는 대략 3만명 정도로 잡는데#, 파리 인구가 현재도 250만명이 안 되니 이때는 더 적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인구의 1%가 넘는 사람들이 죽어나간 대학살극이었던 셈이다. 이 학살극 이후 코뮌 정부는 마침내 해체되었고,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5. 영향

비록 코뮌은 실패로 끝났지만,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의 시도는 이후 세계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훗날 러시아 혁명을 통해 사실상의 세계 최초의 공산국가 소련을 세우는 데 성공한 블라디미르 레닌부터 파리 코뮌을 사회주의 혁명의 예행 연습이라고 말할 정도로 중요하게 취급했으며, 이후 전세계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의 본보기/반면교사가 되기도 했다. 특히 소련은 자국 함대의 핵심전력 중 하나였던 강구트급 전함 3번함 '세바스토폴'을 '파리쥐스카야 코뮤나'로 개칭하기까지 했다.

또한 프랑스 혁명사에 비춰보면, 파리 코뮌은 그간 프랑스 혁명을 이룬 상퀼로트들의 최후의 폭력을 동반한 혁명이라고도 할 수있다. 역사가 데이빗 톰슨에 의하면 파리 코뮌은 1789년 이래의 프랑스 혁명적 전통의 매듭 중 가장 큰 것으로서, 파리 코뮌이 문명에서 보기 힘들 정도로 야만적으로 끝나자 이후 폭력에의 호소를 불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프랑스가 평화적 타결로 혁명을 이어가는 이유가 파리 코뮌에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또한, 뷰리라는 역사가는 파리 코뮌을 통해 프랑스가 얻은 영향으로 우선 파리 코뮌을 통해 혁명의 중점이 파리에서 벗어났으며[4], 폭력과 불안정 및 사회적 위기는 늘 동반된다는 생각을 버리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파리 코뮌의 실패로 조직화된 사회주의의 성장을 다시 지연시켰으며[5] 마지막으로 파리 코뮌이 해체되면서 국민위병 부대도 해체, 19세기 내내 정부와 별개로 민중을 대변했던 힘이 소멸됐다는 점도 지적했다. 파리 코뮌을 통해 제2제국으로부터 제3공화국의 실현이 한층 더 빨라졌다는 것이다.[6]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인터내셔널가가 이 사건으로 인해 탄생했다는 것이다. 인터내셔널가의 탄생에 대해서는 해당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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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변명을 하자면 프랑스의 병력 대부분을 이미 루이 나폴레옹이 말아먹은 직후라 공화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국민위병이 대부분이었다.
  • [2] 전쟁 직후에는 보르도에 수립되었으나 임시정부가 완전히 구성되고 베르사유로 옮겼다고 한다.
  • [3] 이 시대에는 당장 포병의 화력도 지금보다 훨씬 미흡했다!
  • [4] 이전까지 프랑스의 정치적 중심은 파리였으며, 프랑스 혁명을 시작으로 모든 혁명은 파리에서 시작되고 지방의 반발은 파리의 중심을 차지한 혁명세력에게 짓눌렸다. 그러나 파리 코뮌은 '파리를 차지했는데도 지방에 밀려서 패배'했다. 파리의 절대 우위가 사라진 것이다.
  • [5] 물론 이후 프랑스에서도 사회주의는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가졌다.
  • [6] 노명식 저, <프랑스 혁명에서 빠리 꼼뮨까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