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HRSS

추승균

last modified: 2015-04-07 14:56:33 Contributors



이제는 KCC의 코치!
전주 KCC 이지스 감독대행
추승균(秋承均)
생년월일 1974년 12월 6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부산광역시
출신학교 부산중앙고 - 한양대학교
포지션 포워드
신체사이즈 190Cm, 90Kg
프로입단 1997년 현대전자 농구단 입단
소속팀 대전 현대 걸리버스/전주 KCC 이지스 (1997~2012)
지도자 전주 KCC 이지스 코치 (2012~2015)
전주 KCC 이지스 감독대행 (2015~)

1998~1999 한국프로농구 최우수수비상
김영만(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추승균(대전 현대 다이넷) 양경민(원주 삼보 엑서스)

2004~2005 한국프로농구 최우수수비상
김주성(원주 TG삼보 엑서스) 추승균(전주 KCC 이지스) 김주성(원주 동부 프로미)[1]

2000~2001 한국프로농구 모범선수상
추승균(대전 현대 걸리버스) 임재현(서울 SK 나이츠)

2008~2009 한국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MVP
김주성(원주 동부 프로미) 추승균(전주 KCC 이지스) 함지훈(울산 모비스 피버스)

전주 KCC 이지스 영구결번
No.4

Contents

1. 개요
2. 선수 생활
2.1. 아마추어 시절
2.2. 소리없이 강한 남자의 전설
2.3. 쇠퇴하지 않는 남자
3. 지도자 경력
4. 스타일

1. 개요

전주 KCC 이지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실업 현대전자부터 대전 현대, 전주 KCC까지 모두 지킨 선수. 별명은 소리없이 강한 남자. 추겨털 등등. 한국프로농구를 대표하는 최고의 스몰포워드 중 한 명이다. 등번호 4번 역시 영구결번.

2. 선수 생활

2.1. 아마추어 시절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의 권유로 농구를 시작했다. 그런데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갑자기 별세하면서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일을 했다. 홀어머니가 장사를 하면서 뒷바라지 해주면서 다행히 농구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원래는 가드였지만, 중학교 2학년 때, 키가 12cm가 크면서 포워드 포지션으로 옮겼다.

부산중앙고 시절 활약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원래 그를 스카우트 하기로 한 고려대학교가 갑자기 동기인 훈근박규현을 잡았다는 이유로 그를 포기하면서 붕 뜨게 되었다. 다행히 한양대학교가 그를 잡으면서 대학 진학에는 성공. 한양대 진학은 결과적으로 추승균에게 도움이 되었는데, 추승균 혼자 북치고 장구치면서 1학년부터 4년간 주전으로 뛰면서 경험을 쌓을 수 있었고, 수비력에서도 팀 사정상 더 많이 뛰어야 했기 때문에 성장 속도가 빨랐다. 그 결과 졸업 무렵에는 자타공인 포워드 랭킹 1위의 선수로 급부상.프로에 온 이후 스몰포워드로 정착,성공하기는 했지만,사실 대학 때의 주포지션은 파워포워드였다.인사이드가 상대적으로 약했던 팀사정으로 인해 센터도 자주 보았을만큼,대학까지의 그는 사실상 인사이더였다.

그를 두고 치열한 스카우트전, 특히 새로 생긴 신생팀 진로와 기존의 현대전자 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진로는 신생팀의 특권을 내세워 추승균의 영입을 희망했지만, 서장훈을 가져간다는 이유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결국 추승균을 영입하는데 성공한 것은 계약금 5억원을 제시한 현대전자였다.

2.2. 소리없이 강한 남자의 전설

1996-97 농구대잔치를 끝으로 아마 무대를 떠나 1997-98 시즌부터 프로에 데뷔했다. 군에서 돌아온 이상민, 조성원과 전설적인 외국인 선수 니 맥도웰이 가세하면서 전년도 최하위였던 현대는 단숨에 우승 후보로 치고 나갔고, 결국 정규리그 3연패와 챔피언 결정전 2연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이른바 이-조-추 라인의 결성.

이-조-추 라인이 조성원의 트레이드로 해체되고, 신선우 감독이 토털 바스켓볼이라는 라인업의 장신화를 구상할 때, 추승균은 여전히 그 구상의 핵심이었다. 이 구상은 어느 정도 실현이 될 듯 하다가, 결국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이 구상이 한창 가동되던 2001-02, 2002-03 시즌 각각 평균 16.3, 17.5득점으로 팀의 주포로서 역할을 다 했다.

그 뒤로도 추승균의 활약은 변함없었다. 매년 두 자리수의 평균 득점은 꾸준히 찍어주었기 때문에, 팀에서는 그를 절대 놓치려고 하지 않았다. 실제로 이상민은 보상 선수로 풀었던 KCC였지만, 추승균만은 절대 보상선수로 풀지 않았다. 멤버는 자주 바뀌어도 팀의 주전 스몰포워드는 오로지 추승균.

2003-04 시즌에는 돌아온 이-조-추 라인과 스 민랜드와 함께 다시 챔피언 결정전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이상민이 FA 보상선수로 이적하고, 조성원이 은퇴한 뒤에도 팀의 주전 3번 자리를 이어갔다.

다만, 이 기간동안 추승균은 지지로도 상복이 없었다. 주전이니까 식스맨 상은 받을 수 없고, 기량 발전 운운하기에는 추승균의 성적은 너무 좋았다. 그런데, 그렇다면 받을 수 있는 상은 MVP인데, 현대가 왕조를 구축하던 시절에는 스포트라이트는 이상민에게 맞춰졌고, 토털 바스켓볼에서 그가 활약하던 시절에는 KCC는 프로농구의 중심이 아니라 조연이었다. 결국 추승균은 그렇게 상복없이 은퇴하는가 싶었고, 이 때문에 그가 얻은 별명은 소리없이 강한 남자라는 참으로 역설적인 말이었다.

2.3. 쇠퇴하지 않는 남자

나이가 들면서 기량이 쇠퇴할만도 하지만, 추승균의 자기 관리는 무서울 정도였다.[2] 여전히 두 자리수 평균 득점을 기록하면서 최고의 기량을 보여줬다. 2008-09 시즌 정규리그 3위로 챔프전에 올라간 KCC는 챔피언결정전에서 서울 삼성 썬더스와 맞서며 접전을 벌였는데, 7차전까지 가는 접전에서 웃은 것은 추승균과 KCC였다. 추승균은 이 챔프전에서 평균 14.6득점을 집어넣으면서 맹활약했고, 마침내 생애 첫 챔피언결정전 MVP를 수상했다. 이 수상이 KBL에서 10년 넘게 뛰면서 받은 추승균의 생애 첫 개인 타이틀이라는 점은 뭔가 아이러니했지만.

추승균은 그 다음 시즌인 2009-10 시즌에는 다소 부진하며, 생애 첫 두 자리 수 평균 득점에 실패했다. 하지만 챔프전에서는 12.0 득점을 기록하며 건재를 과시했다. 그리고 2010-11 시즌에 다시 정규시즌 평균 10.1득점을 기록하며 부활에 성공했다. 팀의 주축은 이제 하승진, 강병현 등에게 넘어갔고, 본인은 조연에 더 가까워졌지만, 팀의 기둥으로서 추승균이 가진 위상은 감히 이 둘이 넘보기 어렵다. 불행히도 챔프전에서 3차전 무릎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면서 이렇다 할 활약은 보여주지 못했지만, KCC의 우승으로 추승균은 생애 다섯 번째 우승 반지를 차지했다.

2011-12 시즌에는 전성기만큼의 활약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확실히 나이가 든 모습이기는 했다. 하지만 꾸준하게 득점을 쌓아가더니 마침내 2012년 2월 26일, 전주에서 열린 SK전 2쿼터에 KBL 두 번째로 1만득점을 기록했다.[3]

2011-12 시즌 PO에서 분투했지만, 전태풍의 부상 공백을 막을 수 없었던 KCC는 모비스에게 0:3 완패를 당했고, 추승균은 3차전 종료 때 가진 인터뷰에서 은퇴에 대해서는 구단과 상의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결국 3월 15일 은퇴 기자회견을 가지기로 하면서 코트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15시즌 동안 남긴 기록은 통산 738경기 10,019득점(역대 2위) 1,715리바운드(역대 15위) 2,066어시스트(역대 8위) 552스틸(역대 13위).

3. 지도자 경력

은퇴 후 KCC의 코치로 활동하다 2015년 2월 허재 감독이 자진 사퇴하자 감독대행을 맡게 되었다.

덧으로 추승균이 은퇴한 뒤 전주 KCC 이지스는 추승균의 공백을 잘 메워내지 못하고 있다. 당장 2012-2013 시즌 초반에는 김태홍이 주전을 보는데 영 좋지 못했고, 결국 이한권을 영입했지만 이한권 마저 부상을 당하며 희재, 최지훈등의 선수가 스몰포워드로 출장했고, 심지어는 수비가 영 좋지 못한 김효범마저도 뛸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2013-2014 시즌에는 장민국이라는 루키의 발견으로 조금 나아지나 싶었는데, 장민국도 아쉽긴 했지만 발전의 여지를 보여주려는 찰나에 김태술과의 트레이드로 팀을 떠나갔고, 이후 2014-2015시즌 부터는 김태홍정민수가 주로 출장하는데 김태홍의 플레이는 가히 OME급이라...

4. 스타일

추승균이 팀에서 맡은 일은 스몰포워드 포지션에서 슈팅과 상대의 주축 선수들을 봉쇄하는 수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추승균은 성실하고 꾸준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데뷔 이후, 40경기 밑으로 뛴 시즌은 딱 한 번은 1998-99 시즌. 그나마도 45경기 체제에서 34경기를 뛴 것이니까 결코 적게 뛴 것은 아니었다. 부상 없이 꾸준하게 뛰면서 현대-KCC의 3번 자리를 굳건하게 지켰다.

무엇보다 대단한 것은 꾸준한 득점력. 팀의 주 공격원은 슈터 조성원이나 용병이었고 추승균은 조력자 포지션이었던지라 이러한 꾸준한 득점기록은 대단한 일이다. 정규시즌에서 추승균이 평균 두 자리수 득점을 넘지 못한 것은 단 한 번. 2009-10 시즌 뿐이다. 그 외에는 모두 두 자리 수 득점을 넘겼다. 한 마디로 팀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꾸준하게 활약해 줄 수 있는 선수가 없고, 공격과 수비에서 모두 건실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팀에서 절대 없어서는 안 되는 선수가 바로 추승균이다.

그의 공격옵션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위치를 가리지 않는 중거리슛이었다.페인트존 바로 바깥에서 3점슛 레인까지의 어느 위치에서든 노마크 찬스가 나면 여지없이 중거리슛을 성공시켰고,당시에 뛰던 용병들도 그의 시그네쳐 기술로 인정했다.

특히 수비력은 KBL에서도 최고 수준이다. 비록 나이가 먹은 이후로는 다소 쇠퇴한 감이 없지 않지만, 전성기에는 우수 수비 선수에 2회 뽑히기도 했고[4], 수비 5걸에 7회 선정되기도 했다. 공격력도 좋은데, 수비력까지 우수하기 때문에서 상대 입장에서는 정말 까다로운 선수.

PO에서도 뛰어난 선수라서 PO에서 평균 두 자리수 득점을 기록하지 못한 시즌은 2007-08 시즌이 전부. 챔프전만 따로 한정지으면, 1998-99, 2004-05 시즌과 부상으로 빠진 2010-11 시즌이 전부다. 그 외에는 모두 두 자리수 득점을 넘기면서 활약했다. 한 마디로 어떤 상황, 어떤 순간에도 꾸준한 능력을 보여주는 선수다. 다만, 너무 꾸준하니까 화려한 맛이 없어서 투표에서 매번 물을 먹어서 그렇지...

또한 문경은과 같이 대한민국 농구선수 중에 득점순위 2위를 다퉜다. 1위인 서장훈이 너무 넘사벽이라 그렇지... 추승균과 문경은 이 두사람이 8~9000득점을 기록하는 가운데 서장훈 혼자 12000득점이 넘어간 상태이기 때문. 결국 문경은을 제치고 2위 자리를 굳힌 후에, 통산 10000득점도 돌파하면서 KBL에 한 획을 그었다.

다만 특출난 장점이 없는 탓에 국대에서는 큰 활약은 하지 못했다. 3번으로서 190이라는 신장은 결코 큰 신장이 아니며 운동능력이 아주 뛰어난것도 아니였고 문경은 처럼 3점슛이 특출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
  • [1] 최우수수비상은 2004~05 시즌 이후 7년간 수상하지 않다가 2011-12 시즌 부활했다. 김주성은 2011-12 시즌 수상자.
  • [2] 카더라 뉴스에 따르면, 늦여름 오프시즌이 되면 용인 KCC 훈련체육관 뒷편 산으로 KCC 선수들이 자주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추승균은 맨 선두에서 후배들을 끌고 올라가고 있었다.(...) 이상민은 중간에서 켁켁 대며 쉬고 있었다 카더라.
  • [3] 하지만 여기서 KBL의 병크가 일어났다. 어떤 프로종목이든지 간에 마일스톤이 달성되면 협회 측에서 큰 기념행사를 벌여줄만 한데, KBL 측에서는 달랑 꽃다발과 기념패를 전달한게 전부였다. 보고있나? 병맛스런 KBL 관계자들
  • [4] 이 상은 지금은 폐지된 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