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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보성

last modified: 2015-01-24 17:59:40 Contributors


이름 천보성(千保成)
생년월일 1953년 01월 01일
국적 한국
출신지 전라남도 보성군 경상북도 영천시
출신학교 경북고 - 한양대
포지션 유격수
투타 우투우타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1982~1984)
감독 LG 트윈스(1997~1999)
지도자 경력 삼성 라이온즈 수비코치(1986~1990)
LG 트윈스 1군 수석코치(1993)
LG 트윈스 1군 수비코치(1994~1996.7.)
LG 트윈스 1군 감독 대행(1996.7.~1996 시즌 종료)
LG 트윈스 1군 감독(1997~1999)
한양대학교 감독(2004~2012)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번(1982~1984)
팀 창단 천보성(1982~1984) 김용국(1985~1993)

삼성 라이온즈 역대 주장
배대웅 천보성[1](1984) 함학수

LG 트윈스 역대 감독
이광환 (1992~1996) 천보성(1997~1999) 이광은 (2000~2001)

Contents

1. 소개
2. 아마추어 선수 시절
3. 프로 선수 시절
3.1. 연도별 성적
4. 지도자 시절
5. 흑역사

1. 소개

대한민국의 前 야구선수 및 감독.
그리고 한국프로야구 제 1호 타자. 그리고 제 1호 아웃을 당한 타자.[2]

그리고 이광은,양승호,정진호 등으로 대표되는 입시비리의 문제를 보여주는 인물

2. 아마추어 선수 시절

경북고 시절 명성을 날리던 유격수였다. 1971년, 그와 고 3 동기생이던 남우식, 정현발 등은 사상 초유의 고교 대회 전관왕 신화를 쓴다. 즉, 출전한 모든 대회에서 우승했다는 것인데, 고교 대회가 토너먼트로 치뤄지니까 거의 전승을 한 것이다.[3] 그 뒤, 경북고등학교의 신화를 쓴 동료들과 함께 운동부 육성에 적극적이라 스카우트를 적극적으로 하던 한양대학교에 입학한다.[4] 졸업 무렵에는 당시 창단한 실업야구단 롯데 자이언트[5]에 입단, 공군 군복무를 거쳐 프로 출범 직전에 은퇴하고 롯데호텔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3. 프로 선수 시절

프로 출범은 그의 인생을 바꾸었는데, 그의 동기인 남우식이 일찌감치 야구계를 떠나(1980년 은퇴) 직장인이 된 반면.[6] 그는 다시금 그라운드에 뛰어들기로 결심한 것이다. 1982년 고향팀인 삼성에 입단해서 3년간 선수 생활을 한다. 다만, 이미 출범 당시 32세의 선수에게 두터웠던 삼성의 선수층은 주전 자리를 허락하지는 않았다.

3.1. 연도별 성적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1982삼성 라이온즈 36 90 .267 24 6 0 0 10 13 2
1983 71 174 .247 43 8 1 6 25 23 3
1984 64 180 .217 39 8 0 2 20 20 5
통산 171 444 .239 106 22 1 8 55 56 10

4. 지도자 시절

3년 선수 생활 후에 코치로 변신한다. 당시 프로선수 출신 최초의 코치 2인 중 1명이었다.[7][8]

그 뒤 1990년대 초에 미국에 야구 유학을 갔다 온 후, 1993년 이광환 감독이 이끄는 LG 트윈스의 코치로 부임한다. LG의 전성기와 함께 했지만, 그와 이광환 감독 간에 불화가 있었다고 한다. 송구홍의 2루수 기용 문제, 심재학의 투수 전향 문제를 두고 갈등을 빚었다고 하며, 결국 이 갈등과 성적 부진이 원인이 되어 이광환 감독은 물러나고, 후임으로 그가 감독에 취임하게 된다.

감독으로서의 성적은 나쁘지 않았는데, 1997년 정규시즌에서 1위 해태 타이거즈와 1.5게임 차 뒤진 2위를 기록하면서 LG의 전성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과시한다. [9] 그러나 PO에서 4위로 준PO을 뚫고 올라온 삼성에게 2승 후에 2패하면서 고전하다가 5차전을 잡고 한국시리즈에 올라가기는 한다. 그러나 힘이 다 빠진 상태라 해태에게 1승 4패로 패배.

삼성이 유독 독기를 품고 덤빈데는 1997년 어린이날 대구 경기에서 삼성에게 대패하면서 그가 부정배트 시비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게 양 팀의 감정 싸움으로 번지면서 나중에는 백인천 삼성 감독과 LG의 외국인 코치 조 알바레스 간의 몸싸움까지 일어나게 된다. 결국 이는 백인천과 천보성 개인의 사이를 벌어 놓았고, 사제지간이던 김용달 당시 LG 코치와 백인천의 관계도 이 때 틀어지게 된다.

1998년에는 정규시즌 3위를 기록하면서 나름대로 지도력을 보여준다. 당시 이상훈의 해외 진출, 임선동의 이적[10]으로 인해 약화된 투수력을 잘 추스리면서 거둔 성과였다. 그러나 PO에서 삼성을 3승 1패로 꺾고, 한국시리즈에 올랐지만 당시 현대 유니콘스는 선발 전원이 10승 투수였던 괴물팀. 결국 4승 2패로 패한다. 하지만, 2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팀을 올려놓은 공로로 재계약에는 성공한다.

그러나 1999년, 팀의 세대교체를 이유로 심재학의 투수 전향[11], 김광삼, 김상태의 로테이션 기용을 승부수로 걸고 시즌을 시작하지만, 사상 최악의 타고투저 시즌에 경험이 부족한 3명의 선발은 그야말로 배팅볼 투수였고, 투수진이 무너진 상황에서 자연히 팀 성적도 무너졌다. 여기에 트레이드 문제를 두고 프런트와 갈등까지 빚으면서 팀 성적은 추락을 거듭한다. 최종적으로 1999년에 LG가 기록한 성적이 매직리그 3위인데, 4위인 쌍방울이 재정난으로 주전선수를 모두 팔아치운 최악의 전력을 가지던 것을 비춰볼 때, 그냥 꼴찌나 다름없는 성적이었고 결국 사임하게 된다. 여기에는 트레이드 시도와 신인 중용으로 인한 기존 선수들의 반발도 한 원인이었다고 전한다.[12]

그 뒤 KBO 경기운영위원으로 있다가 2004년 모교인 한양대학교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2012년경까지 감독으로 재직하였다. 나름대로 성과를 낸 감독이었기 때문에 프로 감독으로 한 번은 더 기회가 올 법도 한데, 그 기회가 잘 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2011년 야구월드컵 대표팀 감독에 선임되었다. 예선라운드는 5승 2패로 2라운드로 진출했으나 여기서 2승 5패의 성적을 거두며 6위로 광탈했다.

5. 흑역사

2012년 8월 20일 한양대 야구부 입시 비리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기사 게다가 이와 별도로 학생들에게서 전지훈련비를 요구한 사실이 드러나 이미 지난 5월달에 한양대 측에서 해임 결정을 내렸다. 프로야구계에서도 본인에게도 흑역사 확정. 정삼흠, 지명수배를 피해 도피생활을 하다 자수한 이광은과 함께 LG 출신 아마야구 지도자의 삼대 흑역사로 남을 것은 확실하며 더 이상 야구계에서 그의 모습을 볼 일도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근데 이와 비슷한 사건에 연루된 어떤 감독도 프로로 복귀한 걸 보면 또 모른다 이 와중에 천보성 본인은 이 사건 이후로 부인이 투신자살을 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2013년 2월, 징역 2년과 추징금 6천만원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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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원래 1983년 말까지만 하더라도 우용득이 선수 복귀를 하며 동시에 팀 주장을 맡을 계획이었으나, 우용득의 선수 복귀 자체가 무산되었다.
  • [2] 참고로 그 천보성을 상대해서 제 1호 아웃을 잡아낸 프로야구 제 1호 투수는 MBC 청룡의 이길환
  • [3] 실제 전승은 아닌데 그 이유는 승자 결승에서 한 번 패배했으나 패자부활전을 통해 돌아왔다.
  • [4] 얼마나 적극적이었냐면 천보성의 경우 체육학과 정원 초과로 입학이 어려워질거 같자, 학교측에서 그나마 비슷한 계통인 무용과로 인원을 배정해서 어거지로입학시켰을 정도. 이러한 대학들의 관행은 훗날 8~90년대에 대학 농구리그의 인기를 중심으로 법학, 경영학, 통계학, 신문방송학 등 체육계통과는 전혀 관계없는 전공에까지 정원을 편법으로 넣으며 절정을 달하게 되었다가 논란끝에 폐지되었다.
  • [5] 현재의 프로팀 롯데 자이언츠의 전신.
  • [6] 남우식은 결국 푸르밀(옛 롯데우유)의 CEO에 오르니, 그의 선택도 충분히 대단했다.
  • [7] 다른 1명은 롯데 자이언츠의 김성관
  • [8] 제대로 주전 자리를 잡지 못했다지만, 충분히 당시 프로야구 팬들의 뇌리에 남을정도로 이름이 회자됐고 활약을 했다. 당시 막강한 삼성 라이온즈 타선의 수많은 거포중 하나로, 이만수,김성래, 박승호 같은 숨막히는 거포라인 안에서도 나름 활약했으며, 특히 찬스에 강했다.
  • [9] 바로 전 해인 1996년에 2차 1번 지명권을 두고 OB 베어스와 꼴찌 경쟁을 하던 추태를 벌였기 때문에 전성기가 끝나지 않았음을 과시했다는 표현이 나온 것이다.
  • [10] 해외진출 문제로 이미 관계가 악화된 상태에서 2년 후, 이적을 조건으로 입단한 상황이었다.
  • [11] 아이러니하게도 이광환 감독이 이를 실행하려고 할 때, 가장 반대한 것이 그였다고 한다.
  • [12] 뒤에 알려진 바로는 김동수김기태의 맞교환, 김재현양준혁의 맞교환을 추진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