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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린드버그

last modified: 2015-04-02 00:48:05 Contributors

Charles Augustus Lindbergh. (정확히는 2세)
1902~1974.


< 1927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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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45.32 KB)]
찰스 린드버그 월터 크라이슬러

소형 비행기로 미국~프랑스를 착륙없이 단독으로 처음 비행한 사나이. 그리고 생리학자 A 카렐과 협력하여 장기를 몸밖에서 산채로 보존하는 카렐-린드버그 펌프를 만들기도 했다.

Contents

1. 개요
2. 대서양 횡단
3. 아들 유괴사건
4. 그 뒤에
5. 기타

1. 개요


텍사스의 육군비행학교 출신[2]으로 전역 후에 우편항공기 조종사로 일했다. 그리고 33시간동안 미국~프랑스 대서양 무착륙 단독비행을 해서 세계적 영웅이 되었다.

그리고 프랑스로 이주하여 생리학자 A 카렐과 함께 장기를 몸밖에서 산채로 보관하는 카렐-린드버그 펌프를 만들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장기 이식 자체가 발달못했다) 이렇게 육군 본부에 들어가기도 하고 미국에서 민간인으로써 살다가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전쟁에 참가하기도 하고, 미국 예비역 공군 준장이 되기도 하는등 성공한 인생을 살았으나....

2. 대서양 횡단

1927년, 33시간 무수면 단독 비행을 마치고 파리에 도착한 뒤 린드버그의 비행기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 린드버그는 파리 시간으로 밤 10시에 도착했으므로 도착 순간은 아니다.

33시간동안 미국~프랑스 대서양 무착륙 단독비행을 해서 세계적 영웅이 되었다. 린드버그가 최초로 대서양을 날아서 횡단했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실제 린드버그는 67번째로 대서양 비행에 성공한 사람이며, 정확히 표현하면 무착륙 단독으로써는 최초로 성공한 사람이었다. 사실 도착지가 파리였던 덕[3]에 유명해져버려서 앞의 66명이 희미해져버렸다. 그 탓에 린드버그의 횡단이 최초인 것처럼 알려져버린 탓이 크다. 참고로 도착지가 파리였던 것은 대서양 횡단에 25000달러의 상금을 건 오티그 상이 목적지를 뉴욕-파리 코스로 지정했기 때문이다[4].

아무튼 대단한 모험이기는 한데, 린드버그가 탔던 "스피릿 오브 세인트루이스(Sprit of St.Louis)"[5]는 굉장히 작고 가벼운 비행기였기 때문에 2명 이상이 탑승할 크고 엔진이 여러 개 달린 비행기를 준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경쟁자들에 비해서 더욱 돋보였다. 린드버그의 전기를 보면 그가 출발하기 전에 시도한 경쟁자가 4명이나 탑승할 수 있고 침대까지 탑재한 비행기를 사용했다가 중량이 너무 무거워 이륙하지 못하고 불길에 휩싸인 사례가 나오는데, 린드버그는 그래선 안 되고 1그램이라도 무게를 줄여야 한다고 계속 생각한다.

이렇게 작은 비행기를 선택한 건 교대할 수 있는 예비 조종사가 타거나 엔진이 추가로 달려 비행기가 크면 클수록 연료 소비량이 오히려 더 커진다는 판단 때문. 실제로 린드버그는 분의, 조명탄, 무전기, 전등 등 자기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짐을 모두 버리고 지도조차도 필요 없는 부분은 잘라내버리는 철두철미함을 보여줬다. 이렇게 해서 그 작은 비행기에 1703리터(2750갤런)의 연료를 실었고 항속거리는 7200km가 되었다. 필요한 비행거리는 5760km이므로 비행기의 능력은 충분했다.[6]

린드버그의 비행에서 가장 큰 난관은 혼자 있으면서도 33시간 동안 을 자지 않아야 했던 것이다. 조종간 잡고 있는 사람이 린드버그 뿐이고 특별히 자동 조종 장치가 있는 것도 아니니, 깜빡 잠들기라도 하면 그 즉시 대서양으로 다이빙 하게 된다. 말 그대로 "잠자지마! 잠들면 죽어!"
무게를 줄이려고 음식물도 샌드위치 다섯 조각과 물 1리터밖에 싣지 않았기 때문에 배고픔과 갈증에도 시달려야 했다. 화장실변기도 없는 만큼 나올 게 있어서도 곤란했고.

비행 도중에 성제를 좀 쓰기도 했는데 크게 도움은 안 되었던 듯.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비행장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인사만 하고 일단 호텔에 가서 잠부터 푹 자고 나왔다.지금 졸려 죽겠는데 파리가 문제냐

이래서 린드버그 위인전을 읽으면 "잠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3. 아들 유괴사건


...여기까지는 인터넷 백과사전만 봐도 충분히 알수있는 사실이지만 린드버그에게는 끔찍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

1932년 그의 만 2살난 아들인 찰스 린드버그 주니어가 유괴되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었다.[7] 아내인 앤 모로 린드버그(그녀는 나중에 린드버그와 같이 비행기로 대서양도 횡단했다)사이에 태어난 주니어가 유괴되자 전세계가 난리났다. 당시 린드버그는 레전드 인물이라서 미국에서도 너도 나도 린드버그의 아기를 찾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린드버그는 조용히 거절하고 암흑가 인물과 접촉하는등 망신을 샀고 콘돈박사와 협력하여 수사를 했다. 어느날 협박장이 날아와서 그에게 큰돈을 요구했고, 돈을 주고싶으면 신문광고에 실으라는 대담한 범행을 했다.

협박장 사진.

결국 범인의 요구대로 당시 거액인 5만 달러를 아내랑 린드버그와 단 둘이서 복면을 쓴 범인에게 돈을 건네주었지만 아들은 결국 린드버그 집주위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8]

당연히 린드버그와 미국은 뒤집어졌고 다행히 지폐의 일련번호는 기록되어있었다.

몇년뒤 어느 주유소에서 이 일련번호의 지폐를 썼다는 제보가 왔고 차량번호를 기록해놔서 찾을수있었다.


(범인으로 잡힌 하우프트만)

범인은 독일출신의 목수인 리차드 하우프트만(Richard Hauptmann/1899~1936)이였고(협박장에도 독일식 영어가 쓰였다고한다) 콘돈박사가 들은 범인 목소리와 일치했으며 린드버그가 범인에게 준 지폐일련번호와 일치하는 돈다발이 발견되었다. 범인은 이게 자기에게는 독일로 이주한 친구가 있는데 그가 맡겼으며 지금은 죽었다고 말했다. 그는 재판에서도 이 증언을 반복하는데 이 말도 안되는 증언은 배심원의 괘씸죄를 사기에 충분했다.

범인의 아내는 남편이 무죄라고 1994년 죽을때까지 주장했지만 결국 범인은 끝내 범행을 자백안했어도 결정적인 증거가 충분해서 사형당했다. 사실 증거 일부는 검찰에서도 조작했었다고 했지만 범행에 쓰인 사다리는 목수가 아니면 만들수없었는데 조잡하긴해도 충분히 사다리로써의 기능이 작동했다.

그리고 훗날 재감정했는데 사다리는 범인의 목재소의 목재와 일치하고 필적도 일치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건이 린드버그가 장난으로 아기를 숨겼는데 그만 죽자 난처해서 자작극을 했니 어쩌니 하지만 증거는 너무 뚜렷했다.

이렇게 사건은 끝났지만 기레기들의 같잖은 취재로 아내인 앤 모로우 린드버그(1906~2001)와 둘째 아들인 존(1932~ )까지 충격을 받은 것[9]에 분노한 린드버그는 프랑스로 이주하여 카렐-린드버그 펌프를 만들고 몇년뒤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4. 그 뒤에

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태평양 전쟁에서 민간인 신분임에도 지원하여 300번이 넘는 폭격기 조종을 맡으며 종전 후 훈장 수여 및 예비역 공군 준장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1974년 하와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5. 기타

  • 타임지가 선정하는 올해의 인물의 초대 선정자다. 1927년 타임지에서 한가한 주에 뉴스거리가 될만한 이야기를 선정하려고 했었는데 마침 그 해에 린드버그의 대서양 횡단 비행을 커버 스토리로 싣지 않기로 결정했던 상황이었고 이러한 편집국장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 연말에 린드버그를 올해의 인물로 수상한 것이 그 시초였다.

  • 린드버그의 장인은 부자에 외교관이자 미국 상원의원을 지낸 고위 정치인 드와이트 모로 (1873~1931). 1927년 모로의 딸인 앤 모로와 결혼하면서 정치적으로 꽤 유명인이 되었다. 다행인지 몰라도 (?) 장인 모로는 손자인 주니어가 죽기 1년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 손자의 비참한 죽음을 못보게 되었다.

  • 린드버그의 가족 역시 나름 탄탄한 집안이었는데 아버지는 미국의 1차대전 참전을 반대한 하원의원 찰스 린드버그(1859~1924)다. 좀 웃긴 일화가 있는데 원래 아들이 조종사가 되는 걸 반대했지만 아들이 조종하는 비행기를 생전 처음 타보곤 이렇게 기분 좋은 적이 없었다며 이후로도 아들에게 비행기 태워달라고 조르던 했단다.

  • 성을 보면 알겠지만 유태인(하지만 유태교를 믿지 않았다)이었음에도 나치 정권 초기에는 히틀러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10] 물론 2차대전 발발 후에는 그런 거 없다.

  •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 오리엔트 특급살인은 린드버그 유괴사건을 모티브로 삼있다. 그나마 일가족이 비참하게 무너진 소설에 비하면 린드버그 일가는 나름 추스리고 산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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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올해의 인물 최초 선정자다.
  • [2] 당시에는 공군이 따로 없었다.
  • [3] 1919년에 정말 최초로 대서양을 무착륙 횡단한 2명의 영국인은 뉴펀들랜드를 출발하여 아일랜드에 도착했고, 이들 역시 일리 메일지가 건 1만 파운드의 현상금을 노리고 참가했었다.
  • [4] 오티그 상은 1919년에 선언됐으며, 무착륙으로 뉴욕과 파리를 연결하기만 하면 그 외에는 어떤 제한도 두지 않았다. 그래서 린드버그 1인승 비행기를 준비하고 다른 사람들은 대형기를 준비한 것이다.
  • [5] 린드버그의 비행을 후원하고 비용을 대 준 사람들이 세인트루이스의 기업가들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했다.
  • [6] 다만 린드버그보다 1주일 뒤에 시도한 2인승의 콜럼비아호도 성공했다. 이쪽은 조종사 1명에 승객 1명이었으므로 교대를 할 수 없었기에 사실상 이 조종사도 혼자 대서양을 건넌 셈이다.
  • [7] 범행이 정말 대담한 게 아기가 집안에 있었음에도 어른들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납치됐다는 점이다. 베컴 등 유명인들이 자기 자녀를 언론에 가급적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
  • [8] 범인이 처음부터 죽일 작정이었는지 납치 과정에서 실수로 사망하게 한 건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 [9] 어느 정도냐면 아이를 태우고 차를 몰고가던 아내를 다른 차로 교통을 방해한 다음 기레기들이 몰려들어 닥치고 사진이나 찍고는 그걸 대문짝처럼 신문 1면으로 싣고 린드버그 부인 슬픔을 잊고자 한다~ 이런 투로 보도했다. 이 신문을 본 린드버그는 신문을 찢으면서 인터뷰고 뭐고 모조리 거부하며 미국을 떠난다고 일갈했다.
  • [10] 사실 1936년 이전만 해도 히틀러는 서방 국가 정치인들에게 '막장이던 독일 경제를 살려낸 젊은 리더' 정도로 인식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