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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

last modified: 2013-07-31 19:19:44 Contributors

Giovanni di bicci de' Medici

Contents

1. 개요
2. 생애
3. 개인적인 성품과 처세술

1. 개요

1360년~ 1429년 2월 20일(또는 28일). 메디치 가문의 창시자라 불리는 피렌체의 은행가.

2. 생애

그가 태어날 당시에는 가문이 풍족하지 못해 부친의 얼마 안 되는 유산을 미망인과 다섯 아들에게 나누어줬다고 하며, 베스트로 데 메디치처럼 치옴피의 난을 일으킨 일반 평민 층에 해당하는 미누토 포폴로에 공감했다. 그러나 미누토 포폴로들이 인기가 많았지만 피렌체인들은 지나친 야심가를 불신하는 것을 알았으며, 이들이 몰락한 이후에도 메디치 가문이 평민의 당과 연계되자 이러한 의혹을 없애기 위해 급속히 팽창하는 은행업으로 돈을 벌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으려고 했다.

초창기에는 로마에서 사촌인 에리 디 캄비오 데 메디치의 견습 사원으로 일하다가 제노바에 신규 지점, 로마에 두번째 지점, 피사 정복으로 활발해진 무역 서장 덕분에 브뤼주와 런던에 거래를 세우거나 피렌체에서 모직업이 번성해 성공을 거두었으며, 아내인 카르다 부에리와 결혼해 상당한 지참금 덕택에 재산이 더욱 증대했지만 아내와 두 아들인 코지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 로렌초 디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와 함께 비아 라르가의 수수한 집에서 살았다. 비아 라르가에서 두오모 광장의 저택으로 이사했으며, 두오모 광장의 저택은 크기는 약간 더 컸지만 전혀 허식이 없으면서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1402년에 역병이 돌아 산 조반니 바티스타라는 성당에 새 문을 만들자 당대의 예술가 일곱 명이 도안 제출을 할 때 심사 위원으로 나섰으며, 피렌체에서 부유한 상인은 정부에 관여해야 번성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1402년, 1408년, 1411년에 시뇨리아의 프리오리 직을 맡았다가 1421년에는 곤팔로니에레 직을 수락했다. 업무 시간 이외에는 정산소에서 조용히 일을 보면서 공공 재단이나 사적인 자선 단체에 폭넓게 기부하면서 부유한 알비찌 가문이 친지들이나 시뇨리아의 임명자들의 통해 정부를 통제하는 것도 묵과했으며, 피렌체에 모직 작업장 두 곳을 소유한 근거로 아르테 델라 라나의 회원이 되었으며, 주된 관심사인 은행업에 따라 아르테 델 캄비오의 회원이기도 했다.[1]

그를 은행가로 유명하게 한 것은 교황의 은행가로서의 위치를 확보한 것 덕분으로 대립교황 요한 23세[2]의 즉위 기간 동안에는 메디치 사람들이 교황청의 업무에 가장 밀착되어 있었는데, 메디치 가문이 1만 두캇을 제공해 매입하게 한 결과로 이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대립교황 요한 23세와 교류하면서 많은 사업을 하였으며, 교황에게서 나의 매우 절친한 친구라 불렸다.

교황청의 예산을 집행하는 교황 의회와 매우 유리한 관계를 맺어 그레고리우스 12세를 지지하는 나폴리의 라디슬라우스 왕과 교황 요한 23세 사이의 전쟁에서도 요한 23세를 전폭적으로 지지했으며, 1412년 6월에 교황 요한 23세와 라디슬라우스 왕과 협정을 맺을 때 나폴리에 지불할 9만 5000플로린을 확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반니는 이런 거래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교황의 재정을 처리하면 나오는 거대한 이익이 있기 때문에 처리했는데, 그 이득은 메디치 은행의 수입 중 반 이상이 로마 지점 두 군데에서 나온 것이다.

1414년 10월에 교황 요한 23세를 따라 콘스탄츠 공의회로 떠났다가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대립교황 요한 23세가 이단, 성직 매매, 배반, 알렉산드로 5세의 독살, 볼로냐의 200명 이상의 여인들을 유혹하는 죄에 대한 혐의로 폐위되고 하이델베르크 성에 3년간 투옥되어 병이 들자 3만 8500길더를 지불해 풀려나게 했다. 요한 23세가 르톨로메오 데 바르디를 동반하고 피렌체로 오자 그를 받아들여 거처를 마련해주면서 교황 르티누스 5세에게 부탁해 요한 23세를 투스쿨룸의 추기경 주교로 임명되게 했다.

요한 23세가 폐위된 이후에 알프스 북쪽의 도시들을 여행해 독일, 프랑스, 플랑드르 지방의 여러 지점들을 방문하면서 2년 동안 돌아다녔으며, 1419년에 요한 23세가 죽을 쯤에 피렌체로 돌아왔다가 로마 지점장이 되면서 아내에게 두 아들인 코지모와 로렌초를 맡기고 또다시 로마로 떠났다고 한다.

아들 코지모와는 달리 서책에 전혀 관심이 없어 1418년에 재산 목록은 성 마르그리트의 라틴어 일대기, 라틴어로 된 조반니 수사의 설교집, 이탈리아어로 된 복음서 사본 세 권이 보유한 서책의 전부이며, 그 대신 시의 명예를 중시하면서 명예를 중시하는 부유한 시민들이라면 공공 건물과 설립과 기존 건물의 치장에 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420년 9월 9일에 마르티누스 5세가 12명의 추기경을 대동해 피렌체에서 로마로 향할 때 황금 박차를 달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영예로운 피렌체 시민인 카발리에리의 자격으로 대열에 따라갔는데, 이 때 교황청의 사업에서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았지만 요한 23세 때 누렸던 여러 특권을 향유할 수 없었다.[3] 1420년경 스피니 가문이 사업에 실패해 파산하자 메디치 은행이 이탈리아에서 가장 성공한 사업체가 되어 유럽 전역에서 가장 수익이 많은 가족 사업체로 발전했다.

3. 개인적인 성품과 처세술

개인적인 성품에 대해서는 친절하고 정직하며 이해심이 많고 인정이 있다는 평판을 즐겼지만 그의 처세술에 능란한 예리한 시선이나 커다란 턱에서 느껴지는 단호함을 간과하는 이는 드물었다. 달변은 아니지만 재기가 엿보이는 대화를 이끌었으며, 그의 재기는 창백한 얼굴에서 풍겨나는 처량한 표정과 어우러져 상대방을 방심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언제나 신중하고 사려가 깊어 평생 겸손과 중용을 유지해 알비찌 가문이 공화국 정부에 대한 과두 정치의 영향력을 강화하자고 요청했을 때 협조를 거부했으며, 알비찌 가문의 적대파들이 과두 정치에 반대하는 것에 도움을 달라고 하자 사업상 다른 일을 할 여력이 없어서 정부의 어떠한 변화에도 도움을 줄 수 없다면서 거절했다. 알비찌 가문이 새로운 유형의 수입세와 재산세를 도입해 악명 높은 피렌체의 세제를 개혁하자고 제안할 때 극도로 신중하게 제안에 수긍하면서도 너무나 많은 조건과 유보 조건을 걸어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일생 동안 이런 식으로 질시당할 틈을 주지 않으면서 책임져야 할 약속을 피했으며, 죽기 직전에 두 아들에게 부유한 자와 강한 자를 거스르지 말면서 가난한 자와 약한 자에게는 항상 자비로울 것을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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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조반니가 가입한 아르테 델 캄비오라는 길드는 1252년부터 피오리노 도로(플로렌스, 플로린)이라 부르는 금화를 발행해 급속도로 신용을 얻어 전 유럽에 통용되어 이 금화를 처음으로 만든 피렌체 시와 은행가들이 큰 신임을 얻었으며, 1442년에 200만 플로린이 통용되어 72명의 은행가, 어음 중개인이 메르카토 베키오 주변에서 사업하자 그 중에서 메디치 가문이 가장 번성하면서 팽창했다고 한다.
  • [2] 20세기의 요한 23세와는 다른 사람으로 로마, 아비뇽, 피사 등 세 곳에서 교황이 생긴 교회분열시대 때 피사의 교황으로 지낸 사람이다.
  • [3] 이 때 교황의 신임을 얻은 것은 메디치 가문의 오랜 라이벌인 스피니 가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