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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택

last modified: 2015-03-30 13:50:01 Contributors


이름 이회택 (李會擇 / Lee Hoe-Taik)
국적 대한민국
생년월일 1946년 10월 11일
출신지 경기도 김포시
신체조건 167cm
선수시절 소속팀 대한석탄공사
해병대(군복무)
양지축구단
대한중석 (1969~1972)
포항제철 아톰즈 (1973~1978)
스태프 커리어 한양대학교 (1983~1985)
포항제철 아톰즈 (1987~1992)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1988~1990)
전남 드래곤즈 (1998~2003)
선수시절 포지션 스트라이커
국가대표 72경기 21골


Contents

1. 소개
2. 선수 시절
3. 지도자 시절
4. 기술위원장 시절
5. 기타

1. 소개

대한민국의 전 국가대표 축구선수, 전 축구 지도자, 전 대한축구협회 간부.

2. 선수 시절

한양대학교를 졸업하고 해병대에서 군복무를 수행했다. 이후 모처에서 국내 최고의 재능들만 모아서 창단한 FC코리아양지 축구단에서 활약했다. 당시 해병대 및 양지 소속으로 뛴 기간과 한양대학교 재학 기간이 겹친다. 아마 하고자 하면 못 하는게 없었던 그분들께서 학적은 한양대에 두고 소속팀 활동을 하도록 조치를 취한 듯 하다. 이후 양지 축구단이 흐지부지 해체되자 대한중석 축구단에 입단해서 공격수로 활약했다. 대한중석 축구단이 포항제철로 넘어간 후에도 실업축구와 국가대표 간판 공격수로 활약했다.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A매치 72경기에서 32골을 넣으며 활약했다. 약관의 나이에 처음 국가대표로 발탁된 것을 시작으로, 1970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는 등 대표팀의 간판 스트라이커로 활약했다. 흔히 호사가 축구팬들이 꼽는 대한민국 축구 간판 스트라이커의 계보에도 1960년대의 최정민 다음, 1980년대의 차범근 이전에 1970년대 대표 스트라이커로서 이름을 올리고 있다.

별명은 '아시아의 표범'으로 빠른 발과 순발력을 바탕으로 168이라는 작은키를 커버하며 굉장히 열정적이다 못해 전투적인 축구를 했다고 한다. 키가 작아도 탄탄한 육체를 바탕으로 뛰어난 체력과 힘을 과시하는 타입이었다고 한다.역시 해병대 피지컬 동북고 레전드로 홍명보의 선배.

여담으로 선수 시절에 독일 분데스리가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가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유럽 무대가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도 모르고 해서 굳이 이적하진 않았다고 한다.

3. 지도자 시절

41세에 선수시절에도 몸담았던 포항제철의 감독을 맡았으니 당시 기준으로도 제법 빨리 감독으로 데뷔한 셈이다. 그런데 감독 데뷔 시즌에 팀을 리그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김주성, 정해원 등이 이끌었던 대우 로얄즈에 우승은 내주었지만 대단한 성과였고, 이듬해에는 프로축구 우승까지 달성했다! 이 시즌의 우승으로 인해 이회택은 1990 이탈리아 월드컵을 준비하게 될 국가대표팀 사령탑까지 겸하게 된다.[1]

1990 월드컵 아시아 지역예선에서 이회택 감독은 1차예선, 최종예선 통틀어서 11전 9승 2무라는 경이적인 성적을 기록하며 팀을 월드컵 본선에 올려놓는다. 예선에서 보여준 전력이 워낙 압도적이었던 터라 세 번째 출전하는 월드컵 본선에 대해 기대가 엄청났으나...결국 조별리그에서 스페인, 벨기에, 우루과이에게 속절없이 털리며 3전 3패라는 최악의 성적으로 월드컵 도전을 끝맺는다.

사실 아시아 지역예선에서 포스가 워낙 압도적이었던지라 외신들도 한국을 다크호스로 많이 꼽았다. 특히 긴머리를 휘날리는 '삼손' 김주성은 주목해야할 선수로 꼽히곤 했다. 그러나 현실은 탈탈탈 털리며 오히려 아시아와 세계축구간의 격차만 확인시켜주는 결과를 낳았다. 그래도 소위 '아시아의 맹주'라며 아시아에서는 적수가 없던 전성기라면 전성기 시절...

이후 소속팀 포항제철을 1992년 프로축구 우승으로 이끈 것을 마지막으로 클럽팀 감독직에서도 사임하고 야인의 세월을 보내다. 1998년 전남 드래곤즈의 감독으로 갑자기 K리그에 다시 돌아온다. 허정무 감독이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된 빈자리를 메꾼 것. 그러나 리그 준우승과 대한축구협회 FA컵 우승을 일궈낸 전임 허정무 감독의 성적에는 미치지 못했고, 리그컵과 FA컵 준우승 한 차례만을 찍고콩라인 감독직에서 물러난다.

4. 기술위원장 시절

전남 감독직을 내놓은 이후로는 주로 대한축구협회에 몸담아 행정가로 일했다. 조 본프레레 감독 재임기에 기술위원장을 맡았으며[2], 2008년허정무 감독이 국가대표팀 사령탑을 맡는 동안 다시 기술위원장직을 맡아 월드컵 지역예선 무패통과와 사상 첫 월드컵 원정 16강 달성에 조력자 역할을 했다.

이후 허정무 감독이 계약연장을 거부하자 축구협회는 후임감독직을 맡을 인물을 물색하는데 이회택은 당시만 해도 축협 주류에 대한 반대파의 대표인사로 꼽히던 조광래를 추천한다. 당시 회장이던 조중연은 틈만 나면 자신을 디스했던 조광래에게 국가대표 사령탑을 맡기는 데 탐탁치 않았다고 전해지나 기술위원장의 추천이니 묵살할 수도 없고, 축구계 주류-비주류의 화합을 추진하는 차원에서 통크게 이회택의 제안을 수락해 조광래호가 출범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거창하게 출발했던 조광래호의 말로는 2011년 아시다시피... 이 때 이회택은 기술위원장으로서의 업무수행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큰 상처를 입는데, 자신이 품어 준 셈인 축구계 후배 조광래가 공개적으로 자신을 디스한 것이다.

조광래의 말인즉 기술위원장이 특정 선수를 대표팀에 포함시키라며 본인에게 압력을 행사했다는 것. 이에 대해 이회택 기술위원장은 압력을 행사한 적은 없고 선수를 추천하는 통상의 업무를 행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실제로 압력조였는지 제안조였는지는 알 턱이 없으나 대다수의 여론은 이회택 쪽을 향하고 있다. 아무래도 해당 포지션인 오른쪽 풀백 자리에서 잘해주는 선수를 뽑을 생각은 않고 K리그 정상급 중미J리그에서 어중간한 활약을 보이던 윙포워드를 포변시킬 생각만 하던 조광래의 과거 행태를 감안하면 그럴 수밖에 없을 듯. 많은 축구팬들은 "내가 기술위원장이라도 보다보다 답답해서 누구누구 좀 써봐라 하겠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3]

무엇보다 조광래는 이회택이 축구계의 반목을 일소하고 대화합하는 차원에서 끌어안은 인물이다. 애초에 국가대표 감독직으로 추천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과거의 악연 때문에 조광래를 고까워하던 조중연 회장에 대해 조광래를 꾸준히 쉴드쳐주던 인물이 이회택이었던 것이다. 만일 이회택이 기술위원장이 아니었더라면 조광래는 평생 축구협회 반대파로 낙인찍혀 국가대표 감독은 꿈도 못 꿨을 것이다. 그렇게 나름 호의를 베풀고 챙겨준 인물이 자신을 공개적으로 까내린 데 대해 이회택은 심정적으로 상심이 컸다고 전해진다. 결국 조광래가 경질되기 전에 먼저 책임을 지고 기술위원장직에서 사퇴했다.[4]

그동안 유지하던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직함도 반납하고 요새는 고향 김포시에서 어린이 축구교실을 운영하며 지내고 있다고 한다. 포항 스틸러스에서 뛰는 김원일이 그의 축구교실을 거쳤다고 한다.그리고 해병대도


여담으로 이미 기술위원장 및 부회장에서 사퇴했음에도 홍명보 감독과 허정무 부회장 사퇴와 더불어 황보관과 같이 계속 이미 사퇴한 사람 사퇴하라고(...) 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일어나고 있다. 4년마다 축구보는 거 인증하지 말고 소식좀 들으면서 비판하자.

5. 기타

2005년 대한축구협회 명예의 전당에 최초 헌액된 7인 중 한 명이다. 나머지 6명은 김용식, 김화집, 홍덕영, 차범근, 정몽준. 거스 히딩크.

선수시절 말레이시아에서 경기를 갖는데 코너킥을 차러 갔더니 자신이 서 있는 옆으로 유리병이 날아왔다고 한다. 이에 발끈해서 코너킥을 골대 쪽이 아니라 관중석으로 향해, 그것도 맞고뒤져라캐논슛을 내지르고 퇴장당해 경기장에서 나갔던 적이 있다.

한때 이동국이 이회택 조카라서 빽으로 대표팀에 뽑힌다는 설이 퍼진 적이 있는데 당연히 개소리다.지금도 진짜인줄 아는 바보들이 있다[5]

이산가족으로 부모 없이 할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1990년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통일축구대회 당시 선수단에 고문 자격으로 동행해 부친 이용진 씨와 극적인 상봉을 이뤄 국민들의 눈시울을 적신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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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당시에는 국가대표팀이 전임감독 체제가 아니었기에 프로축구 우승팀 감독이 국가대표 감독직을 겸했다.
  • [2] 독일 월드컵 지역예선 부진의 책임을 지고 본프레레 감독보다 한 발 앞서 물러났다.
  • [3] 실제로는 그보다는 조광래 항목에서도 각주로 언급되고 있지만, 올림픽 대표팀과의 선수 기용 문제로 바로 이회택과 한판 하고 언론에 까댔을 정도의 인물정작 외압 문제에 관해 짤린 뒤에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자기 자리 지킬려고 묵인했다가 짤리니 저런다. 혹은 당시 대단치 않게 받아들인 걸 뒤끝 작렬하느라 부풀려서 말하는 것이 아니느냐는 것.
  • [4] 이 사퇴 결정 자체가 본인이 밀어붙인 조광래 선임이 잘못된 판단이었음을 자인하는 셈이기 때문에 조광래의 명줄은 이 때 끊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 [5] 참고로 이동국은 본프레레 감독 시절 회장님께서 감독을 불러다가 친히 이동국을 지목하면서 빼라고 했을 정도로 외압의 피해자면 피해자지 수혜자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