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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 슈틸리케

last modified: 2017-07-08 21:18:06 Contributors


역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홍명보호 슈틸리케호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울리히 슈틸리케 (Ulrich Stielike)
생년월일 1954년 11월 15일
국적 독일
출신지 바덴-뷔르템베르크 케치
포지션 미드필더, 스위퍼
176cm
유스팀 SpVgg 케치 (1962~1972)
소속팀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 (1972~1977)
레알 마드리드 CF (1977~1985)
뇌샤텔 그자막스 (1985~1988)
지도자 스위스 축구 국가대표팀 (1989~1991)
뇌샤텔 그자막스 (1992~1994)
SV 발드호프 만하임 (1994~1995)
UD 알메리아 (1996)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코치 (1998~2000)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U-19 / U-20 / U-21 (2000~2006)
코트디부아르 축구 국가대표팀 (2006~2008)
FC 시옹 (2008)
알 아라비 (2008~2010)
알 사일리야 (2010~2012)
알 아라비 (2013~2014)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2014~)
국가대표 42경기 3골

꿈은 자유롭게 꿀 수 있지만 꿈이 우리를 결승까지 데려다주지는 않는다.
- 2015년 AFC 아시안컵 4강전 대한민국 VS 이라크를 앞두고 발표한 연설.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우리 선수들 자랑스러워해도 됩니다.
- 2015년 AFC 아시안컵 결승전 대한민국 VS 호주와의 경기에서 패배로 준우승을 거두고 기자회견에서 한국어[1]로 이야기 하며.

Contents

1. 소개
2. 선수 시절
2.1.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
2.2. 레알 마드리드 CF
2.3. 독일 국가대표
3. 감독 시절
4. 사족

1. 소개

Ulrich "Uli" Stielike

독일 출신의 축구 선수이자 축구 감독. 현직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다. 선수 시절의 포지션은 스위퍼 또는 미드필더였다.

2. 선수 시절

역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 역대 대한민국 국가대표 축구선수들까지 모두 통틀어 비교해도 가장 뛰어나며[2]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 레알 마드리드 CF라는 두 유럽 최고 수준의 명문 팀에서 레전드라고 불리기 손색이 없었을 정도로 경력이 매우 화려했던 선수였다.

선수 시절 초창기에는 분데스리가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당시에는 부동의 명문 바이에른 뮌헨조차도 분데스리가에서는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를 넘어서지 못했다. 당시에는 주로 수비 형 미드필더로 출전한 울리 슈틸리케는 수비의 베르티 포그츠, 공격의 유프 하인케스와 같은 걸출한 동료들과 함께 팀의 척추를 구성하며 3차례의 분데스리가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또한, 울리 슈틸리케는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도 역시 주전 수비수였다. 프란츠 베켄바워의 빈자리를 훌륭히 인수인계하여[3] 유로 1980 우승,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 준우승의 핵심 멤버로 활약했으며, 국제 축구 연맹과 국제축구 역사 통계 연맹이 20세기 최고의 명문으로 선정한 레알 마드리드 CF에서 무려 8시즌 동안 미드필더와 수비수를 오가면서 4연속 라 리가 최고의 외국인 선수상을 받았고,[4] 3번의 프리메라리가 우승과 1번의 스페니쉬 컵, 1번의 UEFA 컵 우승에 기여한 레전드급 선수였다. 당시에는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에서 독일 출신 선수가 흔하지 않던 시절인데다, 특유의 파이팅 넘치고 중후한 플레이스타일이 돋보였고 레알 마드리드 CF의 팬들에게서 독일산 "판처"로 불리면서 널리 사랑받았다. 지금도 레알 마드리드 CF에 애정이 많아서 팀이 조금이라도 부진한 모습을 보이면 쓴 소리를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2.1.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


외모의 리즈 시절.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의 최전성기를 이끌던 시절.

뒷줄: 한스 유르겐 비트캄프, 디트마르 다네르, 유프 하인케스, 볼프강 크나이브, 울리 슈틸리케, 라이너 본호프

앞줄: 란 시몬센, 헤르베르트 하이덴라이히, 크리스티안 쿨릭, 한스 클링크하머, 베르티 포그츠

SpVgg 케치 유스팀에서 활동한 뒤, 분데스리가의 명문구단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로 이적하여 팀의 중심이 된다.

당시 유럽에서 바이에른 뮌헨유러피언 컵 3연패를 하며 전 유럽의 패자로 군림하던 시기였지만, 상대적으로 리그 성적은 그리 신통치 못했는데 저 3시즌 간 10위-3위-7위를 전전하며 끽해야 중위권에 안착하는 정도에 그치는 변변찮은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바로 이 시기에 분데스리가 내에서 절대적인 강자로 군림하던 것이 바로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로, 69-70, 70-71 두 시즌 귄터 네처와 베르티 포그츠를 중심으로 분데스리가를 연패했던 묀헨글라드바흐는 이후 74-75, 75-76, 76-77시즌을 3연패하고 그 마지막인 76-77시즌엔 유로피언 컵 결승전까지 진출하게 된다. 70년대 중반 터 네처는 이미 레알 마드리드에 이적한 이후였고, 당시 주축이 된 선수들은 독일의 올타임 베스트 라이트백인 베르디 포그츠, 지금은 감독으로 더 유명하지만 현역시절에도 대단한 공격수였던 유프 하인케스, 팀의 에이스이자 당시 활약으로 77년도 발롱도르를 수상했던 덴마크 출신의 알란 시몬센 등이었고, 후방에는 울리 슈틸리케가 든든하게 받치고 있었다.

특히, 울리 슈틸리케는 여러모로 프란츠 베켄바워의 후계자로 불리울 만큼 상당한 유사성을 보여주었는데, 선수 커리어를 미드필더로 시작했고,[5] 센터백을 오가면서도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었다. 보통 국가대표에서는 센터백으로, 클럽에선 수비형 미드필더로 자주 출장했고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나 레지스타 포지션으로 뛰는 경기에선 엄청난 드리블을 선보이면서, 상대의 진형을 교란시키는 올라운드 플레이어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슈틸리케가 동료들과 마이스터샬레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울리 슈틸리케, 우도 라텍(감독), 유프 하인케스, 베르티 포크츠.[6]


2.2. 레알 마드리드 CF


동료들도 다들 레전드다. 카마초, 비센테 델 보스케, 가르시아 레몬, 산틸랴나, 후아니토 ....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친 슈틸리케는 레알 마드리드 CF로 이적하게 된다. 레알 마드리드 CF 이적 계기가 특이한데, 당시 레알 마드리드 CF의 회장이 귄터 네처에 이어서 슈틸리케의 동료인 헤르베르트 빔머와 사인하려고 독일로 비행기를 타고 갔는데, 실제 경기에서 슈틸리케의 플레이를 보고 바로 마음을 바꿔서 계약을 제시했고 곧 승낙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위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비센테 델 보스케, 가르시아 레몬,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7] 등, 레알 마드리드 CF의 1980년대 레전드들과 함께 핵심멤버로 활약했다. 지금도 레알 마드리드 CF역대 레전드 명단에 당당히 기재되어 있다.

레알 마드리드 CF에서도 마찬가지로 보통 중앙 미드필더로 출장했고, 레알 마드리드에서 마지막 무렵엔 독일 국가대표에서 뛰었던 것처럼 리베로로 주로 활약한다. 1950-1960년대 저승사자 군단 시절과 1990-2000년대 갈락티코 시기가 챔피언스 리그 우승 경력이나 축구팬들에게 주는 이름값이 높아서 보통 레알 올 타임 베스트를 선정할 때 이 두 시대에 몰리게 되는데, 이런 네임 밸류 문제만 아니라면 레알 마드리드 올 타임 베스트,[8] 나아가 라리가 올 타임 베스트에도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할만한 선수이다. 마냥 언론의 수사가 아닌 게, 라 리가 최우수 외국인 선수상인 돈 발롱을 1978-1979시즌부터 1981-1982 시즌까지 무려 4연패를 달성한다. 돈 발롱 역대 연패 최다 기록은 물론이고 최다 수상 기록도 갖고 있다. 슈틸리케를 제외하면 4연패도 없고, 4번씩이나 받은 외국인 선수도 없고 루이스 피구조차도 3번에 그쳤을 정도다.[9] 괜히 토니 크로스레알 마드리드 CF로 이적하면서 슈틸리케를 언급한 것이 아니다. 선수가 이리 잘하고 팀까지 레알 마드리드니까 우승 트로피 정도는 당연히 따라오는 부산물로 1977-1978, 1978-1979, 1979-1980 3시즌 연속으로 라리가 우승 타이틀을 석권한다. 1차례의 UEFA컵 우승과 2번의 코파 델 레이 우승을 따냈고, 1980-1981 시즌엔 러피언컵 결승까지 진출하는데, 이때는 아쉽게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라리가 최고의 외국인 선수[10] 역대 최다 수상자.

2.3. 독일 국가대표


프란츠 베켄바워의 후계자는 맞지만, 여러모로 데뷔와 함께 쉽게 국가대표팀의 주전을 꿰찬 것은 아닌데, 유로 76과 78월드컵에는 참가하지 못한다. 76년까지야 베켄바워가 워낙 공고했기 때문에 유망주 티를 벗어난 슈틸리케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고 쳐도, 베켄바워의 국가대표 은퇴와 함께 슈틸리케 자신이 전성기를 보내던 시절인 78월드컵에는 엔트리에도 들지 못했다. 이것은 그의 클럽 커리어 때문인데, 지금은 꽤나 많이 약해졌지만 당시에 유럽축구 강국들의 국가대표팀은 자국리그가 아닌 선수에게 국가대표의 자리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슈틸리케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최전성기를 보냈고, 그가 펄펄 날아다녀도 헬무트 쇤 감독은 그를 외면했으며, 78년 월드컵 이후 유프 데어발 감독이 부임하면서 겨우 슈틸리케의 본격적인 국가대표팀의 생활이 시작된다. 82 월드컵에서 슈틸리케는 프랑스와의 4강전에서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월드컵 역사상 유일하게 승부차기에서 실축했다. 당시 시대적으로 리베로 시스템은 독일축구를 넘어서 세계축구의 트렌드 중에 하나였고, 슈틸리케는 아르헨티나의 다니엘레 파사레야, 이탈리아의 가에타노 시레아, 네덜란드의 루드 크롤, 칠레의 엘리아스 피게로아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앨런 한센과 함께 당대의 특급 리베로임에도 불구하고, 국가대표 42경기는 확실히 선수의 이름에 비해 부족한 감이 있다. 슈틸리케의 상대적으로 저조한 국가대표팀의 출전 기록은 당시 유럽의 축구 국가대표 팀들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쇄국정책으로 인한 안타까운 희생양이었기 때문인 것이다. 이 때문에 슈틸리케는 "나는 독일 축구에 있어서 탈영병과 같은 존재다."라고 밝혔다.

따라서 세계적인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독일 축구계에서 배신자로 낙인이 찍혔기 때문에 은퇴 이후에는 독일의 축구계에서 주류로 머무르지 못하고 계속 야인으로 지내게 된다. 지도자 수업을 본국에서 제대로 받지 못한 것도 이러한 이유이기도 했다. 2000년대 이후 독일 청소년 대표 팀의 지휘봉을 잡게 된 것도 절친한 동료인 베르티 포그츠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에서 물러나려던 1998년, 해외 팀의 감독직을 전전하면서 야인으로 머물던 울리 슈틸리케를 대표 팀에 지명해줬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11] 선수로서는 어디다 내놓더라도 밀리지 않는 레전드급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국내 축구계에서는 야인에 가까운 차범근과 유사한 케이스다. 본인도 자신을 인정해주는 스페인이 편한지, 현재도 마드리드에 거주 중이며, 공식석상에서도 독일어보다는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일이 많다.

어쨌든 칼 하인츠 루메니게, 베른트 슈스터[12], 파울 브라이트너[13], 만프레드 칼츠, 한스 페터 브리겔, 칼 하인츠 푀르스터, 하랄트 슈마허라는 라인업의 중앙에 자리 잡은 울리 슈틸리케는 독일 전차군단의 주역이 되어 서독의 유로 1980 우승과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 준우승을 이끌었다.

이후 베켄바워에게 건네받아 슈틸리케가 맡고 있던 리베로 자리는 디트마어 야콥스, 클라우스 아우겐탈러, 마티아스 잠머, 로타어 마테우스[14], 옌스 노보트니가 되었어야 하지만 현실은 부상.. 등으로 면면히 이어지게 된다.

우베 젤러, 프란츠 베켄바워, 게르트 뮐러, 베르티 포크츠, 파울 브라이트너, 칼 하인츠 루메니게, 로타어 마테우스, 안드레아스 브레메, 제프 마이어 등으로 이어지는 독일 역대 올타임 레전드들의 네임밸류가 워낙 개인 커리어든 클럽 커리어든 워낙 끝판왕급이라서 이들에 비해 잘 언급이 안 되는 슈틸리케를 비롯해서 슈넬링거, 오버라트, 회네스, 칼츠, 리트바르스키, 슈마허, 콜러 등은 상대적으로 부족해 보이지만, 사실 이 선수들도 사실 어마어마한 클래스를 지닌 선수들이었다. 이 선수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아래로 평가받는 귄터 네쳐, 베른트 슈스터, 브리겔, 피셔, 유프 하인케스, 아우겐탈러, 위르겐 클린스만, 묄러, 해슬러, 마티아스 잠머, 슈테판 에펜베르크 등이 얼마나 실력이 대단했는지 생각을 해본다면 그냥 독일에서 태어난 것이 비운이었다고 봐야할 듯하다.

3. 감독 시절

1988년 선수로서 은퇴한 뒤, 1989년 스위스 축구 국가대표팀으로 선임되었다. 감독 데뷔전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1-0으로 이기는 쾌거를 이뤄냈다.# 또한, 이 경기에서 스테판 샤퓌자를 국가대표에 처음 발탁하기도 했다.[15] 감독으로서 슈틸리케의 첫 공식 무대는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유럽 예선에 참가한 것으로, 벨기에, 체코, 포르투갈, 룩셈부르크와 같은 조가 되어 룩셈부르크에게 이긴 것을 빼고는 3연패를 당하면서 전임 감독이 경질이 된 도중에 부임하여 남은 경기에서 1승 1무 2패로 지역예선에서 탈락한다. 포르투갈과의 홈경기에서 역전패를 당한 것과, 벨기에와의 홈경기에서 2-1로 이기고 있다가 자책골로 무승부를 기록한 것은 아쉬움을 남겼다.(사실 그 두 경기를 이겼어도 탈락했을 가능성이 높긴 했다) 이어서 유로 1992 예선에 참가, 스코틀랜드, 루마니아, 불가리아, 산마리노와 같은 조가 되어 4승 2무 2패로 1위 스코틀랜드와 승점 단 1점 차이로 조2위를 기록해 예선에서 탈락한다. [16] 스코틀랜드와 루마니아 두 팀에게서 한 번만 이겼어도 본선 진출 가능성이 높았고, 스코틀랜드와의 홈경기에선 먼저 2골을 넣고도 동점을 허용해서 더욱 아쉬운 부분이었다. [17] 1991년 사임한 뒤[18] 은퇴했던 뇌샤텔 그자막스의 감독이 된 뒤, 유럽 여러 팀을 거치고 나서 1998년 모국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코치로 부임했으나[19] 에리히 리베크 감독의 3백 전술에 반대하고 선수들과는 훈련 방식의 문제 등 마찰을 빚으면서 유로 2000 본선 직전에 물러났다.

2000년부터는 독일의 U-19, U-20, U-21 국가대표팀 감독을 6년 동안 역임했는데 2003년 U-20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당시 박성화 감독이 이끌던 한국을 만나 0-2로 패했다. 이 때문에 일부 축구팬들이 박성화에게 발린 슈틸리케라며 깠지만, 축구 오래 본 올드 축구팬들은 당시에 독일 청대들이 선배들과 다른 패싱게임를 하는 것을 보고 심상치 않게 여겼다. 그리고 당시 독일 유망주들 중 프로 1군에 소속된 선수들 상당수는 구단의 차출거부로 빠진 상태였다. 원래 U-20 월드컵 등 청소년 축구대회에서 유럽 구단들 대부분은 해당 연령에 포함되는 자신의 팀 1군 선수들의 대표 팀 차출에 그다지 응하지 않는 편이다.[20] 그리고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2003년 세계대회에 출전했던 한국 선수들 중에 팬들의 기대만큼 성장해서 대표 팀의 주축이 된 선수는 아무도 없으며, 어떤 사람은 아예 한국 축구를 통째로 말아먹을 뻔 했다. 한편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서는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전력분석관으로 일하면서 독일의 준우승에 기여했다.

그 후 리 미셸 감독 하에 2006년 역사상 첫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던 코트디부아르 축구 국가대표팀의 후임 감독으로 선임되었는데, 4경기에서 13득점 무실점이라는 어마어마한 성적으로 코트디부아르를 2008년 프리카 네이션스 컵 본선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아들의 심각한 병세 문제로 인해 본선 전에 사임했다. 하지만 아들은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만다. 나중에는 스위스FC 시옹으로 돌아간다.


2010년부터는 카타르 스타즈 리그알 사일리야 SC, 알 아라비 SC에서 감독 생활을 하다가 2014년 9월 5일,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계약기간은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까지. 핌 베어벡의 사임 이후 7년 만에 다시 등장한 외국인 감독이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부임 이후의 행적은 슈틸리케호를 참조하도록 하자.

월드컵 최종예선에서의 부진으로 인해 결국 경질됐다.

4. 사족

한국 팬들이 생각하기에 다른 건 몰라도 옷만큼은 못 입는다는 평이 많지만[21] 오히려 독일 쪽에선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감독 부임 이후 패션센스가 좋아졌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독일 국가대표팀 수석코치 시절 입은 2XL사이즈 체크무늬 수트가 워낙 충공깽이었다.


문제의 체크무늬 수트. 하필 넥타이도 체크무늬로 매고 와서 더 충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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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기사에 따르면 미리 준비해온 멘트였다고 한다. 우승했을 시와 준우승 했을 때의 멘트를 따로 준비해온 듯. (1분 20초부터 보기), (1분 15초부터 보기).
  • [2] 그나마 슈틸리케와 비교라도 해볼 만한 커리어를 가진 선수로는 차범근박지성이 있긴 해도, 슈틸리케의 커리어는 이 둘과는 아예 비교 자체를 불허할 정도로 화려하다.
  • [3] 완벽히 메꿨다기보다, 이제 에이스는 칼 하인츠 루메니게였고 프란츠 베켄바워의 빈자리는 파울 브라이트너와 함께 나눠서 짊어졌다고 퉁 칠 수 있다.
  • [4] 최다 연속 수상 기록이며 동시에 이 4번이 최다 수상 기록이다. 2000년대 중반에 폐지된다.
  • [5] 다만, 유소년 시절에 축구를 처음 접하면서 배웠던 포지션은 골키퍼였다고 한다. 이후 미드필더 및 스위퍼로 전업한다.
  • [6] 이 사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감독으로서도 승승장구했다는 점에서 전설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직 슈틸리케만 감독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제 한국에서 성공할 것이다.
  • [7]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당시의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2010년대에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으나, 성적 부진 등의 이유로 해임되었다.
  • [8] 중앙 미드필더로서 호세 마르티네즈 산체스 '피리', 페르난도 레돈도, 사비 알론소 등과 경쟁이 가능할 정도다.
  • [9] 리오넬 메시가 있긴 하지만, 스페인 2중국적자이기도 하고 2000년대 중반 돈 발롱이 폐지되면서 중간에 끊겨서... 아마 폐지가 없었다면 최다 수상 기록이건 연패 수상 기록이건 메날두가 다 차지했을 듯하다.
  • [10] 돈 발롱(Don Balon) 어워드 링크
  • [11] 포그츠의 후임 감독으로 부임한다는 말이 있었지만, 수석코치로 부임한다.
  • [12] 유로 80만 출전했다.
  • [13] 이쪽은 반대로 유로 80 때는 출전하지 않았다.
  • [14] 잠머보다 나이가 많지만 리베로 자리에 본격적으로 기용된 건 잠머가 부상으로 누웠던 98-2000 이었다.
  • [15] 샤퓌자는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외국인 최다 골 기록을 처음으로 깬 선수다. 묘한 인연이라고 할 수 있겠다.
  • [16] 당시 유로는 8개 팀만 나갔기에 조 2위를 기록했음에도 탈락한 것이다. 심지어 이탈리아마저 탈락했을 정도였다.
  • [17] 당시만 해도 스코틀랜드는 월드컵에 5회 연속 진출한 강팀의 이미지였고 루마니아는 동유럽의 마라도나라고 불리는 게오르게 하지가 있었다.
  • [18] 후임이 로이 호지슨으로 이때부터 스테판 샤퓌자, 쿠빌라이 튀르킬마즈 등의 선수들의 기량이 올라가며 성적이 올라 1994년 28년 만에 월드컵 본선진출에 성공한다.
  • [19] 사실 당초에는 감독으로 내정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감독 경력이 문제가 되었는지 돌연 수석코치로 임명되었다.
  • [20] 비약적으로 말해 1군 유망주들 다 빠지고 2군 유망주들만 모았는데도 선배들과 다른 심상치 않은 패싱게임을 보여줬다는 얘기가 된다. 프로 1군 유망주들까지 다 모였어도 박성화 감독이 독일 청대를 쉽게 이길 수 있었을 거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
  • [21] 아무래도 나이가 좀 있고 풍채가 있다 보니 그런듯하다. 즉, 패션센스보단 옷걸이가 원인인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