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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퍼거슨

last modified: 2017-01-21 11:03:53 Contributors

이름 알렉산더 채프먼 "알렉스" 퍼거슨 경
(Sir Alexander Chapman "Alex" Ferguson, CBE)[1]
생년월일 1941년 12월 31일
국적 스코틀랜드
출신지 글래스고
선수시절 포지션 스트라이커
신체 조건 180cm
선수시절 소속팀 퀸즈 파크 FC(1957~1960)
세인트 존스턴 FC(1960~1964)
던펌린 애슬레틱 FC(1964~1967)
레인저스 FC(1967~1969)
폴커크 FC(1969~1973)
에어 유나이티드 FC(1973~1974)
감독 이스트 스털링셔 FC(1974)
세인트 미렌 FC(1974~1978)
애버딘 FC(1978~1986)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1985~1986)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1986~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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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역대 감독
앳킷슨
(1981~1986)
알렉스 퍼거슨
(1986~2013)
데이비드 모예스
(2013~2014)

역대 최고의 축구감독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27년의 우승 신화를 책임진, 모든 맨유 선수와 팬들의 정신적 지주, 그야말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그 자체

김성근: 야구는 감독이 한다퍼거슨: 축구도 감독이 한다

후임자의 부진으로 더욱 칭송받고 있는 전설의 명장.[2]

대한민국에서 거스 히딩크에 이어 두번째로 인지도가 높은 외국 축구감독.

희대의 철학자 "트위터는 인생의 낭비"
SNS 한 마디에 인생을 망친 운동선수나 연예인이 나타날 때마다 퍼거슨 1승 추가 드립이 나오곤 한다 연금 타먹듯이 승리를 챙기는 분

Contents

1. 개요
2. 프로필
3. 전술 스타일
4. 경력
4.1. 선수
4.2. 감독
4.3. 개인수상
5. 어린 시절, 선수시절의 퍼거슨
6. 감독 시절의 퍼거슨
6.1. 이스트 스털링, 세인트 미렌 시절
6.2. 애버딘 시절
6.3.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시절
6.4. 이야기

1. 개요

Sir Alexander Chapman Ferguson, CBE

축구 감독. 1986년부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을 맡고 있다가, 2012~13시즌 끝까지 감독직을 수행하고 2013년 6월 30일 계약 종료일을 끝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직을 수행하는 동안 들어올린 트로피는 총 38개. 감독 커리어 전체로 본다면 50개가 된다.

1999년 트레블을 이룬 업적으로 기사작위(Knight Bachelor)[3]를 받아 알렉스 퍼거슨 경이 되었다.

2. 프로필

1941년 12월 31일, 스코틀랜드글래스고의 고반에서 출생.

고등학교 졸업 후 23세까지 클라이드 지역 조선소의 숙련공으로 일했고, 그 기간에 퀸즈 파크와 세인트 존스톤에서 파트 타임 선수로 뛰기도 하였다. 하여튼 초창기에는 선수로서 잘 안풀려서 캐나다로 이민가려고까지 했으나 동생의 여자친구와 감독의 도움으로 어찌저찌 경기에 출장하게 되어 이민은 그만두었다.

1964년 덤퍼린에 중앙 공격수로 입단하며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 1974년에 은퇴하고 이스트 스털링(East Stirling)에 감독으로 취임. 1년 후 세인트 미렌(St. Mirren)으로 옮겨 3년간 지휘봉을 잡은 후 구단주와의 마찰로 경질, 1978년 버딘의 감독을 맡으며 그의 전설을 시작했다.

버딘에서 당시는 물론 지금도 스코틀랜드 리그를 양분하던 레인저스와 셀틱을 누르고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스코틀랜드 리그를 지배하기 시작하고 1983년에는 레알의 전설 알프레도 디 스테파뇨가 이끄는 레알 마드리드 C.F.를 꺾고 유러피안컵 위너스컵을 우승, 그 이름을 유럽 전역에 떨쳤다.당시 나이가 43세였으며 유럽에서도 모두가 인정하는 초특급 감독이었다.

이후 1986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으로 취임,구단을 세계 최정상급 클럽으로 키워내고 2013년, 리그 20번째 우승을 팀에 안겨준 채 은퇴하였다.

3. 전술 스타일


과르디올라나 비엘사같이 자신만의 전술철학을 갖고 세세한 전술을 짜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용병술에 능하고 선수들의 능력을 극대화시키거나 그 외의 감독이 갖춰야 할 경기 외적인 능력은 훌륭했다.
물론 세세한 전술은 짜지 않지만 전술의 큰 틀에 유연하고 자연스러운 변화를 주는 등의 능력에서는 뛰어난 역량을 보여줬다. 기본적으로 측면플레이어를 효과적으로 활용한 역습[4]이 대표적인 전술이였고 442가 가장 유명한 포메이션이지만 때에 따라 451등의 포메이션도 활용하는 등 고집스런 전술철학보다는 유연한 전술변화에 신경썼고 세세한 전술은 전술코치가 맡았다.

네빌이 축구분석방송에서 스콜스를 평하며 말하길 퍼거슨이 중요시한건 점유율이였다고. 물론 전성기 바르샤처럼 완벽한 점유율을 추구하지는 않았지만. 맨유가 경기 후반에 양상을 뒤집는 과정에서 점유율을 높여 경기를 주도하는 것이 중요했고 그것의 핵심적인 멤버가 스콜스였다는 것이 네빌의 주장.

불같은 성격으로 선수들을 휘어잡는데도 능했지만 베컴이나 반니스텔루이, 스탐 등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이것이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칸토나같은 경우 칸토나가 사고를 쳐도 직접 나가서 칸토나를 최대한 보호하려 하는 등 강경책보단 회유책을 사용하는 모습도 보여줬다. 굉장히 드문 경우.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포지션 파괴에 강했다. 미드필더였던 선수들을 다 수비에 몰아넣어도 아스날 등을 상대로 승리하거나 B급 멤버들로 우승도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 보면 정말 그 쪽 측면에서는 천재.
하지만 루니나 박지성같은 케이스는 좀 아쉽다는 평이 있는데 루니같은 경우 그의 활동량과 전술적 역량을 보고 점점 공미처럼 쓰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루니가 셰도우로서의 모습은 정말 좋았고 공미처럼 점점 내려간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루니가 어린 시절에 공격적인 능력이 엄청났다는 것을 보면 아쉬운 변화. 하지만 이건 맨유에 루니자리에서 그런 역할을 해 줄 선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박지성같은 경우도 PSV에서 수비력도 엄청났지만 당시 2005 챔스 베스트포워드 5인[5]에 들정도로 공격력 또한 엄청났다. 하지만 그의 탁월한 수비력을 더 높게 친 퍼거슨은 그의 이타적플레이와 수비력을 더 활용해서 맨유에서 공격력에서는 보여준 퍼포먼스가 아쉽다. 물론 박지성의 무릎이 자꾸 말썽을 부렸던 것도 한몫했다.

아무튼 현역 당시에도 엄청났지만 은퇴한 후 후임자들의 부진으로 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또 감독의 능력이 축구에서 얼마나 중요한 지 확실히 보여준 감독.

4.1. 선수

연도클럽출장수 (골)
1957-1960퀸즈 파크[6]32 (11)
1960-1964세인트 존스턴37 (19)
1964-1967던펌린 애슬레틱88 (66)
1967-1969레인저스41 (25)
1969-1973폴커크106 (37)
1973-1974에어 유나이티드24 (9)
합계327 (167)

4.2. 감독

  • 세인트 미렌 (1974–1978)
    • 스코티쉬 퍼스트 디비전 우승 1회 : 1976-1977

  • 버딘 (1978–1986)
    • 스코티쉬 프리미어 리그 우승 3회 : 1979-80, 1983-84, 1984-85
    • 스코티쉬 컵 우승 4회 : 1981–82, 1982–83, 1983–84, 1985–86
    • 스코티쉬 리그 컵 우승 1회 : 1985–86
    • UEFA 컵 위너스 컵 우승 1회 : 1982–83
    • UEFA 슈퍼컵 1회 : 1983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986-2013)
    • 프리미어 리그 우승 13회 : 1992–93, 1993–94, 1995–96, 1996–97, 1998–99, 1999–2000, 2000–01, 2002–03, 2006–07, 2007–08, 2008–09, 2010-11, 2012-13
    • FA 컵 우승 5회 : 1989–90, 1993–94, 1995–96, 1998–99, 2003–04
    • 칼링컵(리그컵) 우승 4회 : 1991–92, 2005–06, 2008–09, 2009-2010
    • 채러티/커뮤니티 쉴드 우승 7회 : 1993, 1994, 1996, 1997, 2003, 2007, 2008
    •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2회 : 1998–99, 2007–08
    • UEFA 컵 위너스 컵 우승 1회 : 1990–91
    • UEFA 슈퍼컵 우승 1회 : 1991
    • 인터컨티넨탈 컵 우승 1회 : 1999
    • FIFA 클럽 월드컵 우승 1회 : 2008

4.3. 개인수상

  • Football Writers' Association Tribute Award: 1996
  • Mussabini Medal: 1999
  • UEFA Champions League Manager of the Year: 1998–99
  • BBC Sports Personality of the Year Coach Award: 1999
  • BBC Sports Personality of the Year Team Award: 1999
  • IFFHS Club Coach of the Year: 1999
  • LMA Manager of the Decade: 1990s
  • Laureus World Sports Award for Team of the Year: 2000
  • BBC Sports Personality of the Year Lifetime Achievement Award: 2001
  • English Football Hall of Fame: 2002
  • Onze d'Or Coach of the Year: 1999, 2007
  • Professional Footballers' Association Merit Award: 2007
  • UEFA Team of the Year: 2007, 2008
  • FA Premier League Manager of the Year: 1993–94, 1995–96, 1996–97, 1998–99, 1999–00, 2002–03, 2006–07, 2007–08
  • FA Premier League Manager of the Month: August 1993, October 1994, February 1996, March 1996, February 1997, October 1997, January 1999, April 1999, August 1999, March 2000, April 2000, February 2001, April 2003, December 2003, February 2005, March 2006, August 2006, October 2006, February 2007, January 2008, March 2008, January 2009, April 2009
  • LMA Manager of the Year: 1998–99, 2007–08
  • World Soccer Magazine World Manager of the Year: 1993, 1999, 2007, 2008

  • 1985년 OBE(대영제국 훈장 4등급) 수훈.
  • 1995년 CBE(대영제국 훈장 3등급)로 훈위 승급.
  • 1999년 기사작위(Knight Bachelor) 서임.

우승컵 수집이 취미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부임 시절 총 38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린 감독.
이견이 없는 역대 최고의 감독

5. 어린 시절, 선수시절의 퍼거슨


퍼거슨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의 고반이라는 곳에서 알렉산더 비튼 퍼거슨(Alexander Beaton Ferguson)과 엘리자베스 하디(Elizabeth Hardie)의 아들로 태어났다. 둘은 퍼거슨의 고모, 알렉산더 비튼 퍼거슨의 동생의 소개로 만났다고 하는데 속도위반 결혼을 했기에 어린 퍼거슨에겐 어떻게 결혼하게 된건지 자세한 사정은 말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항구 노동자로 가난했고 주변 환경의 치안이 딱히 좋은건 아니었지만 노동자촌 특유의 끈끈한 의리는 마음껏 만끽하며 지낼 수 있었고, 그것이 자기 인생에 큰 인생을 끼쳤다고 그는 자기 자서전에서 어린 시절을 이야기했다.

실제 4살, 5살 때 사귄 친구들과 환갑을 넘어 70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친하게 지낼 정도로 그때의 인간관계가 그에 미친 영향이 컸으며 고집스런 성격도 그때부터 변함없었다고 한다.

그는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보통 그러하듯 축구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고 친구들과 함께 유소년 축구 클럽에 입단 테스트를 받으러 다니곤 했다. 고반 중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축구부로 활동했으며 그렇게 축구에 미친 결과 학업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아 교장선생에게 학업보다는 기술을 배우는게 좋겠다는 충고를 받기도 했다.

고교 졸업 후 그는 조선소의 연습공으로 취직했으며 동시에 파트타임으로 당시 유명한 아마추어 클럽이었던 퀸스 파크, 세인트 존스턴 등에서 활약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 그는 평생의 반려이자 세아들의 엄마가 되는 캐시 홀딩을 만나기도 하였다.[7]

이후 그는 덤퍼린으로 이적해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고 그곳에서 좋은 성적을 내었다. 비록 감독과 마찰이 있어 컵대회 결승전에 나가지 못하는 등의 일이 있긴 했지만 그는 그때 열심히 뛰었고 1965-66시즌엔 51경기 출장 45골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남기기도 했으며 스코틀랜드 리그 공동 득점왕도 차지했다.초특급 선수는 아니었어도 충분히 일급 선수였다.

알렉스 퍼거슨과 캐시 홀딩

또한 덤퍼린에 있었던 1966년 5월 12일 캐시 홀딩과 결혼식을 올렸으며 그후로 45년 정도가 흐른 2010년에 이르기까지 행복한 부부생활을 지속하고 있다.

퍼거슨은 덤퍼린에서의 활약으로 당시, 그리고 지금도 셀틱과 더불어 스코틀랜드 최고의 클럽인 레인저스로 이적했으나 레인저스에서 그는 의외의 암초를 만나게 되는데 그건 다름아닌 종교 갈등이었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신교, 구교 종교 갈등이 매우 극심했고 셀틱은 구교, 레인저스는 신교를 대표하는 클럽이었다. 퍼거슨의 경우 본인도, 아버지도, 동생도 모두 신교도 였으나 퍼거슨의 아내인 캐시가 구교도였고, 레인저스의 몇몇 사람은 그것 때문에 노골적으로 퍼거슨을 적대했다.

1968년 9월 18일 퍼거슨은 첫아이 마크[8]를 얻었는데 그 일마저 퍼거슨이 자기 아들에게 구교식 세례를 했느니 어쩌니 하는 중상모략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후로 구단 보드진의 어이없는 감독 경질과 그로 인한 마찰 등으로 퍼거슨은 어린시절 꿈의 클럽이었던 레인저스에 환멸을 느끼고 결국 폴커크로 떠나게 된다.

폴커크에 머무를 때부터 퍼거슨은 본격적으로 감독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코치 자격증을 취득한 후 사실상의 플레잉 코치(선수 겸 코치)로 재직하기 시작했다. 덤퍼린 시절의 감독을 다시 만난 그는 덤퍼린 시절처럼 서로 존중하고 때로는 싸우고(...)하면서 첫번째 코치직을 경험했고 이후 에어 유나이티드에서 선수생활의 마지막을 보낸 후 선수로써 은퇴,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한편 감독일을 하면서 부업으로 술집도 했고 꽤 장사가 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술집 손님등을 대상으로 사채놀이도 했으나 이러한 부업이 시간과 정신력 소모가 크다고 느끼게 되었고 또 술집 장사도 조금씩 기울자 모두 그만두고 감독일에 전념하게 되었다.

6. 감독 시절의 퍼거슨

6.1. 이스트 스털링, 세인트 미렌 시절

32세의 젊은 나이에 이스트 스털링에서 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정규계약이 아닌 파트타임 계약으로 시작하였고, 클럽은 그때 골키퍼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었다. 그는 시작부터 선수단을 확실히 장악했고, 클럽의 성적은 즉시 나아지기 시작했다. 1년 후인 1975년, 세인트 미렌이 그를 감독으로 원했다. 이스트 스털링의 태도에 불만이 있던 퍼거슨은 그들의 제의를 수락했고 3년간 감독을 맡으며 스코틀랜드 2부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등 한정된 자원으로 좋은 성적을 냈다.

하지만 구단주와의 마찰로 급작스레 경질, 이후 애버딘으로 옮겨간다.

6.2. 애버딘 시절


애버딘은 나름 스코틀랜드의 유명구단이긴 했으나 1955년 이래 우승을 한 적이 없었다. 당시 스코틀랜드 리그는 레인저스와 셀틱의 양강 체제로 둘이 우승컵을 나눠갖는 형국이었고[9], 1978년에 부임한 퍼거슨도 당장에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것에는 실패했다.

78/79 시즌에는 끝내 우승컵을 들어올리는데 실패했으나 퍼거슨 감독은 팀을 정비했고 결국 79/80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5-0의 승리를 거두며 드라마틱한 우승에 성공한다. 셀틱이나 레인저스가 아닌 구단이 리그 우승을 한 것은 15년만이었다.

이후 애버딘은 승승장구하며 스코틀랜드의 지배자로 떠올랐고 82/83시즌 유러피안 컵 위너스 컵에서 레알 마드리드 C.F.를 꺾고 우승, 유럽 도전에 성공했다. 이 업적으로 인해 퍼거슨 감독의 이름은 유럽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연히 애버딘 역사상 최초의 유럽 대회 우승이다.

이렇게 늘상 셀틱과 레인저스가 다 해먹던 스코틀랜드 축구판에 혁명과도 같은 강세를 보여줬기에, 퍼거슨의 진정한 진가가 드러난 시기는 (앞으로 설명할)맨유 시절이 아닌 에버딘 시절이라고 평가하는 축구팬들도 많다.있을 수 없는 일을 해냈다고 여긴 사람들때문에 마법사라고 경찰에 고발당하는 희극까지 빚기도 했다.실제로 애버딘은 퍼거슨이 떠나자 바로 다음해부터 급전직락하여 과거의 영광은 찾아볼 길이 없게 되었다. 이것만 봐도 만년 삼류팀을 순식간에 일류팀으로 일구어냈던 것은 선수빨같은게 아닌 순전히 퍼거슨의 능력덕이라 봐야 옳다.

그 다음해인 83/84 시즌 퍼거슨 감독은 팀을 리그와 컵 더블 우승으로 이끌었고 그 공적으로 OBE 수훈 대상이 되었다.

또 퍼거슨 감독은 FC 바르셀로나, 레인저스 FC, 아스날 FC, 토트넘 핫스퍼 등에서 구애를 받았으나[10] 1986년까지 팀에 남았고, 1986년 11월, 당시 맨유의 구단주였던 마틴 에드워즈의 권유를 받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 제의를 승인했다.[11] 여러 명문팀에서 감독 제의를 받고도 당시 바닥에서 헤매던 맨유를 선택했던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맨유로 가면서 그가 한 다음 말도 분명 큰 이유일 것이다.

"매트 버스비를 위해 맨유로 간다."[12]

이 시절 퍼거슨 감독은 스코틀랜드국가대표팀의 코치직도 수행하고 있었는데, 호주와의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예선 도중 조크 스테인 감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13] 스코틀랜드 대표팀 감독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스승의 죽음과 갑작스런 부임이었는지, 본선에 팀을 올려놓고도 1무 2패 조 최하위로 광탈...화려한 그의 감독커리어에 비하면 흑역사. 그렇게 조국 스코틀랜드의 감독직을 사임하고 그의 커리어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직을 수행하는데...

6.3.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시절


맨유 부임 직후, 마틴 에드워즈 단장과 함께

전설의 시작

맨유에 입성한 퍼거슨에게 가장 시급한 임무는 팀을 중하위권에서 끌어 올리는 것이었다. 맷 버스비 경의 지도 아래 데니스 로, 바비 찰튼 경, 조지 베스트[14], 이렇게 3명의 발롱도르를 배출하고 잉글랜드 클럽 사상 처음으로 챔스 우승컵을 들기도 했던 과거의 영광과는 달리 당시 맨유는 그저 그런 중하위권 클럽에 불과했고, '술주정뱅이 구단'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팀 멘탈도 형편 없었다. 오죽하면 퍼거슨이 "난 축구감독이지 술집을 차린게 아니야."라고 했을까.[15]

오랜 지역 감정과[16] 한때의 우승 경쟁자로 서로를 가장 라이벌시 하고 있었던 리버풀 FC가 80년대 잉글랜드는 물론 유럽 무대를 정복한 것[17]과 달리 맨유는 66/67 시즌 이후 20여년간 우승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으니 맨유의 부진은 하루 이틀 문제가 아니었다.

맨유의 감독이 된 퍼거슨은 리버풀 FC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겠다고 약속했고, 팬들은 그를 맨유에 영광을 다시 가져다 줄 분으로 반겼었다. 퍼거슨 감독은 팀 전체적인 부분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그가 가장 열성적으로 신경 썼던 것은 유소년 시스템이었다.

그는 그후 3시즌에 걸쳐 스티브 브루스, 게리 팔리스터, 폴 인스, 마크 휴즈, 마이크 펠란 등을 영입했으며 이후 이들은 퍼거슨의 1기 맨유 멤버의 핵심이 된다[18]. 또한 그는 팀 분위기와 훈련체계를 바꾸며 당시 맨유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으나 술주정뱅이 구단이라는 이미지에 걸맞게 알콜 중독으로 고생하던 노먼 화이트사이드와 폴 맥그래스를 방출했다.[19]당시 에이스면서 알콜 중독수준이었던 선수 중에서 퍼거슨 체제에서 살아남았던 사람은 브라이언 롭슨하나였다.[20]

하지만 퍼거슨 감독이 시작부터 잘나갔던 것은 아니다. 87/88 시즌에는 리그 2위로 시즌을 마감하긴 했으나 그 다음인 88/89 시즌은 리그 11위로 곤두박질쳤다. 노먼 화이트사이드, 폴 맥그래스, 고든 스트라칸 등 팬들의 사랑을 받던 선수들을 내보낸 후 성적이 좋지 못했고 그 다음해인 1990년 1월 까지 성적이 하위권에 맴돌자 '퍼기 나가!(Fergie Out!)'이라는 구호가 관중석에 늘상 울려퍼지곤 했다.

이후 퍼거슨 스스로 '당시의 나는 지나치게 서둘렀고, 너무 야심적이었다. 다시는 한꺼번에 선수들을 사오지 않겠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뛰어나지만 팀으로 조합되지 않는 팀은 거의 리그 꼴찌까지 내려앉았고, 구단주는 부정했지만 퍼거슨의 경질은 코앞으로 다가왔다는게 당시의 의견이었다. 그런 퍼거슨에게 역전의 발판을 마련해준 것이 FA컵. 퍼거슨의 맨유는 결국 89/90 시즌 FA컵에서 우승을 하게 되고 이는 오랜기간 우승에 목말랐던 팬들의 갈증을 일시적이나마 달래주게 되었다.[21]

물론 그동안에도 퍼거슨이 가장 관심을 기울였던 유스팀의 경우 눈에 띄게 발전하고 있었고 각종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기에 당장의 성적이 아닌 그러한 클럽의 발전을 놓고 퍼거슨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그리 적지 않았었다.[22]

그리고 90/91 시즌. FA컵 우승팀의 자격으로 출전한 유러피안 컵 위너스 컵에서 그는 FC 바르셀로나를 꺾고 팀에게 우승컵을 안겼다. 이는 리버풀 FC의 서포터들이 일으킨 헤이젤 참사로 인해 5년간 유럽무대에 나가지 못했던 잉글랜드가 5년의 징계가 끝난 직후 도전한 유럽무대에서 얻은 쾌거였고, 그런 특수한 상황 때문에 하나의 클럽이라기보단 잉글랜드 전체를 대표하는 클럽으로서 얻은 영예이기도 했다.

유러피안 컵 위너스 컵에서 우승한 후 그는 리그 우승에 도전하겠다고 했으나 그 다음 시즌인 91/92시즌에도 결국 2위로 마감, 우승 도전은 실패했다. 그리고 그 다음시즌인 92/93 시즌, 그는 단돈 1M 파운드에 에릭 칸토나리즈 유나이티드에게서 영입하였고, 이는 퍼거슨 감독 스스로 말하는 최고의 영입이 되었다. 칸토나는 올드 트래포드의 신으로 군림하며 스스로는 물론 팀 동료들의 공격력을 극대화 시켰고, 결국 92/93시즌, 26년만에 리그 우승을 달성하게 된다.

이는 잉글랜드 풋볼 리그가 헤이젤 참사, 힐스버러 참사 이후 리그 환경을 개편하고 새로 출범한 EPL,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출범 원년 우승이기도 하다.

이후 퍼거슨 감독의 가장 빛나는 순간은 98/99 시즌이다. 이 때 맨유는 데이비드 베컴 - 로이 킨 - 폴 스콜스 - 라이언 긱스로 이어지는 세계 최고의 미드필드 진영과 그 당시 최고의 수비수 중 한명이었던 야프 스탐이 이끄는 수비진, 또한 세계 최고의 골키퍼 중 한명이었던 피터 슈마이켈로 이루어진 일종의 드림팀이었다. 이 때 맨유는 트레블[23]을 달성하였고, 이 공적으로 퍼거슨 감독은 기사 작위를 받는다. 특히 이 시즌 바이에른 뮌헨과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은 리버풀 FC의 '이스탄불의 기적'과 함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최고의 명경기로 꼽히는데, 뮌헨에게 0-1로 뒤지고 있어 패색이 짙었던 맨유는 후반 인저리 타임에 두 골을 몰아넣으며 극적인 역전승에 성공하였다. 이 업적으로 엘리자베스 2세"그가 들어올린 것은 트로피가 아니라 영국의 자존심이었다."라는 말을 남겼고 이를 기념해 영국 전국의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ㄷㄷㄷ


퍼거슨 커리어 최고의 전성기, 1998/1999시즌 트레블

그러나 그 이후 다시 유럽무대의 정상에 오르기 까진 적지 않은 세월이 걸렸다. 일단, 퍼거슨 감독과 선수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여러 선수가 팀을 떠났다. 데이비드 베컴의 스타의식을 싫어한 퍼거슨과, 그게 트집이라고 생각한 베컴의 갈등 끝에 베컴이 퍼거슨 감독이 찬 축구화에 눈두덩이를 맞고[24] 맨유를 떠나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것은 축구팬들이라면 모두 다 아는 사실이고, 수비진의 핵이었던 야프 스탐은 자신의 자서전에 퍼거슨 감독을 비난하는 내용을 실었다가 라치오로 쫓겨나듯 떠났다.[25][26] 퍼거슨 감독과의 직접적인 갈등은 아니었지만 로이 킨은 05/06 시즌 키노게이트[27]를 터뜨리며 팀에 분란을 일으키고 결국 셀틱으로 이적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이 기간 퍼거슨 감독이 큰 기대를 하며 영입했던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 릭 젬바젬바 등은 먹튀가 되어 맨유 팬들의 속을 타들어가게 만들었다. 아직까지도 베론의 영입은 맨유의 선수 영입의 흑역사로 종종 회자된다.

사실 퍼거슨은 트래블 직후 '4-4-2의 시대는 끝났다'며 팀의 전술적인 개편을 예고하면서 저 둘을 영입했던 것인데, 그들은 딱히 개인기량이 떨어졌다기보단 너무도 강한 맨유의 색에 전혀 녹아들지 못했다.[28]

거기다가 라이벌인 아르센 벵거가 이끄는 아스날은 03/04시즌 전례가 없는 대기록인 리그 무패우승을 차지하고, 러시아 석유재벌인 로만 아브라모비치에게 인수된 첼시는 스타 플레이어들을 현질영입하고 FC 포르투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끈 주제 무리뉴를 감독으로 영입하면서 갑자기 확 달라진 모습을 보이며 맨유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맨유의 암흑기라고 할 수 있었던 2003년부터 2006년까지 퍼거슨 감독은 무리뉴 감독에게 (그리고 벵거 감독에게) 번번히 발목을 잡히며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퍼거슨은 결국 영혼 몰빵해서 05/06 시즌에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희대의 꿀영입을 하게되는데, 향후 몇년간 확고한 주전으로 온갖 영광을 안겨다준 네만야 비디치, 파트리스 에브라, 박지성, 에드윈 반 데사르 4명을 고작 2천6백만유로라는 초 헐값...[29]에 영입하고 이때부터 슬슬 부활의 조짐이 보이더니

하지만 퍼거슨 감독은 06/07 시즌 리그 우승을 이끌며 부활의 날개를 펴기 시작했고, 07/08 시즌에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앞세워 챔피언스리그와 EPL 우승의 더블을 이뤄내며 자신의 건재를 알렸다. 그러나 이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는 4강전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던 박지성을 엔트리에서 제외하여 한국 팬들에게는 미친듯이 까였다. 08/09 시즌에도 좋은 기세를 이어가 시즌 중반까지는 쿼트러플을 노렸으나, 선수들의 체력 소모 등의 문제로 인하여 리그 우승과 칼링컵 우승, FIFA 클럽 월드컵 우승,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을 달성했다. 이 우승으로 인해 라이벌 리버풀 FC의 통산 최다 우승 기록과 타이를 이루는데 성공했다. 20년전 맨유 팬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것을 현실로 이룬 셈이다.

09/10 시즌에는 라이언 긱스, 폴 스콜스 등 '퍼거슨의 아이들'의 노쇠화와 함께 먹튀가 된 베르바토프의 부진, 무엇보다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이적 공백으로 인하여 상대적으로 가치가 떨어지는 칼링컵 우승에 그쳤다. 그리고 퍼거슨 감독의 천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안젤로티 밀란 전 감독은 첼시 감독으로 적을 옮겨 또다시 퍼거슨 감독의 앞길을 막았다.

그리고 퍼거슨 감독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심장이 나빠지는 등 건강에 문제를 보였고, 10/11 시즌까지만 감독직을 수행하고 그 이후에는 은퇴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솔솔 흘러나오기도 했다. 맨유의 데이비드 길 단장은 퍼거슨 감독이 후임자를 정하고 물러날 것이라고 했고, 퍼거슨 감독은 데이비드 모예스 당시 에버튼 FC 감독을 후임자로 추천하고 있다는 기사도 뜬 적이 있다.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일단 10/11시즌에도 감독직을 수행하고 있다. 무재배를 거두는 경우가 많지만 일단 한번도 패는 기록하지 않았고, 그가 야심차게 영입한 하비에르 에르난데스(일명 치차리토)가 대박을 터뜨리며 별 이상 없이 순항중.

그러나 점점 무재배를 거두는 경우가 많아지고[30] 그러면서 잃는 승점이 늘어나며, 한번도 패를 기록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패가 있는 첼시 FC, 아스날 FC, 맨체스터 시티와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나이가 드시면서 선수 장악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는지 웨인 루니이적 선언을 하면서 팀 분위기에 악영향이 미쳤다. 하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일단 한 팀에서 20년 넘게 감독직을 수행[31]하고 있고, 그리고 자칫 잘못하면 훅 날아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팀을 꾸준히 상위권에 올려놓는 것을 보면 정말 이 영감님, 대단한 분이긴 대단한 분인 것 같다.

결국 칼링컵에서 웨스트햄에게 4:0으로 패배하면서 무패 기록은 깨졌지만 첼시가 주춤하는 틈에 어느새 1위를 꿰찼다. 저 스쿼드 가지고 리그 무패 행진을 계속하는것만해도 정말 신기하다. 혹자는 퍼거슨이 로드신공을 쓰는것 같다고 하기도 한다.현실에서 FM 로드신공

10-11시즌 25R까지 리그 31경기 연속 무패 행진을 하고 있었으나 갑작스러운 퍼디난드의 부상에 의한 수비불안으로 25R 꼴찌팀 울브스에게 1-2 역전패하면서 무패 행진이 마감됐다. 첫 패배를 했음에도 2위 아스날이 뉴캐슬 극장의 희생양이 되면서 4-4로 비겨 아스날과의 승점 차이는 4점이 되었다. 흔들리는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었지만, 26라운드에서 맨씨티를 2-1로 잡아내면서 여전히 순항중.

결국 10-11시즌 EPL 우승에 성공하였고, 맨유는 이로서 리버풀의 최다 우승 기록을 갱신하였다. 퍼거슨 감독은 부임 당시의 약속("리버풀을 최고의 자리에서 끌어내겠다.")을 훌륭하게 지킨 셈이 되었다.

하지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는 FM 로드신공의 한계를 보이며 FMM을 쓴바르셀로나에게 3-1이 다행일 정도로 완패했다. 그러나 감독으로서의 능력에 의문을 가지는 자는 개초딩을 제외하면거의 없다. 현재 현지 언론등에서 뽑는 축구역사상 최고의 감독에 못해도 3위는 하고 있으며 향후 활약 여부에 따라 1위를 차지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야말로 현존 최고의 감독으로 구단주 글레이저 일가는 물론 팬들 사이에서도 그에 대한 지지와 신임은 절대적이다. 현지 언론이 매달 뽑는 '경질가능성이 높은 감독' 예상도에서 항상 20위를 차지하곤 한다.[32] 경기 운영 및 선수 영입 등의 문제를 포함해 거의 전권을 가진 감독으로 정확히는 감독이라기 보단 매니저로 봐야한다는 말도 많다. 아마 프리미어 팀 감독 중 가장 많은 권한을 가진 감독일 것이다.

11-12시즌중 시끄러운 이웃이라고 말하던 맨시티에게 6:1로 무참히 무너지며 맨유 역사에 흑역사 하나를 추가하였다. 퍼거슨은 경기종료후 헤어드라이기 모드로 변신하여 선수들에게 "빌어먹을 멍청이들아"를 부터 시작으로 갖은 욕설과 비난을 퍼부었다고 한다. 누가 축구화는 안맞았으려나...

칼링컵 16강전인 3부리그 소속인 올더숏전에서 분위기 전환을 위해 맨시티전 출전 선수를 한명도 안쓰는 감행을 보여주었다. 결과는 당연하다싶은 3:0으로 무난히 승리하였다.

11월 6일 선더랜드와 경기가 있던 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 취임 25주년을 맞아 구단주로부터 올드 트래포드의 가장 큰 스탠드인 북쪽 스탠드의 이름을 알렉스 퍼거슨 경 스탠드로 명명하는것을 선물받았다. 스탠드가 개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것은 올드 트래포드의 101년 역사상 처음이고 현재 경기장에 세워질 동상을 만들고 있다고 한다. 또 12월 31일 퍼거슨 감독의 70번째 생일. 이럴때는 잔칫집 분위기가 제맛인데 그 반대로 생일빵을 맞았다. 헌데 엉뚱하게도 지동원이 위로해줬다 블랙번에 2:3으로 역전패한 것이다. 2011년을 참 우울하게 끝내는 안습

리그 우승 가능성이 낮아 보였으나 2012년 들어 자신의 로드신공능력을 100% 발휘하며 맨체스터 시티를 제치고 리그 1위를 차지했다. 맨체스터 더비를 빼면 남은 스케쥴도 맨시티에 비하여 평탄한 편이라 리그 우승의 가능성이 높다. 대부분의 축구 전문가들과 팬들은 맨유의 상승세의 이유를 감독이라고 하고 동의한다.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셈이다. 2012년 들어 유스 출신의 젊은 선수들을 많이 발굴한 것도 성과이나, 아직 세계 탑 클래스의 반열에 들기에는 다들 뭔가 모자른 바 아직 갈 길은 멀다.

그러나 막판에 팀이 삽질하고 반대로 맨시티가 연승행진을 달리면서 유력시되던 리그 우승이 멀어져가버렸고 기어코 36차전 막판 맨체스터 더비에서 맨시티전 2패를 당하면서 맨시티에게 다시 리그 1위를 빼앗겨버렸다. 이제 38차전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강등권 탈출을 위하여 퀸스파크 레인저스가 맨시티를 원정에서 이겨주고 맨유가 선더랜드를 이기면, 또는 맨유가 선더랜드를 한 10골이상 크게 이기면 골득차로 맨시티를 제치고 우승할 수 있게 된다. 하여튼 마지막까지 두고봐야한다.

하지만...맨시티가 퀸스파크를 상대로 마지막에 삑살내나 싶더니 믿기지 않는 대역전극을 펼치며 맨유는 졸지에 이겼어도 2위를 해버리고 말았다...
모든걸 말해주는 맨시티 역전후 맨유 벤치상황

2012-13 시즌에는 아스날 주장까지 한 맨유유스(?)카가와 신지 등을 영입했으나 부실하다고 평가받던 포지션인 중앙 미드필더는 별 손을 대지 않아 우승은 힘들지 않을까...했으나 그냥 무난하게 시즌 초반부터 독주하며 34라운드 아스톤 빌라전에서 우승확정, 맨유의 20번째 리그 우승이자 알렉스 퍼거슨 감독 개인적으로는 맨유에서의 13번의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13번의 리그 우승은 3위인 아스날의 우승횟수와 같은 수치.

다음 시즌 초반 잠시 자리를 비우게 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유는 엉덩이 수술 때문으로 그리 심한것은 아니라하고 병명은 드러나지 않았지만...일부 팬들 반응은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난 찌루찌루의 파랑새를 알아요 팬들은 올드 트래포드에 도넛방석을 보내자며 쾌유를 빌고있고 경기중에 빡쳐서 일어나는게 아니었구나(?)라며 깨달음을 얻은 사람도 있다 카더라...사실은 고관절일거라는 의견도 많다. 실제로 과거 몇 년간의 영상을 보면 걸음이 불편한 몇몇 장면이 보이긴 한다. 그래도 시즌 투어까지 다 소화하고 자리를 비울 예정이라한다.

2013년 5월 8일, 한국시각으로 이른 아침부터 현지에서 은퇴기사가 일제히 보도되기 시작했다. 원래 십수년전부터 은퇴기사가 연례행사처럼 떴었기에 지나가는 소문으로 보는 팬들도 있는 한편 분위기가 심상치않다며 걱정하는 팬들도 있다. BBC빼고 어지간한 매체에서는 다 이 주장을 보도하는 상태. 구단측에서는 현지에서 오전 10시쯤에 이와 관련한 기자회견을 한다고 한다. 그리고 2012~2013시즌을 끝으로 은퇴함을 공식 발표했다. 다음 시즌 초 결장이 불가피하게 된 이상, 정상에서 내려설 수 있는 지금이 은퇴의 적기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으로 맨유 감독으로서 13번의 리그 우승, 2번의 챔스우승을 포함한 27년의 화려한 장기집권이 마무리되게 되었다. 퍼거슨의 후임으로는 데이비드 모예스로 결정되었다.

모예스 감독이 초반에 부진하자 벌써부터 퍼거슨 복귀설이 나오지만 그는 9월 들어서 인터뷰로 절대 재복귀는 없다고 못박았다. 자신도 맨유감독이 돼서 몇 해동안 부진했음에도 계속 감독을 맡아서 전설이 된 것이라며 모예스 감독도 몇 해는 더 두고 봐달라고 했다. 위에 나온대로 그의 맨유 초창기 시절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갈 말이다.

2013년 10월 국대감독이 비어있는 호주 측에서 거스 히딩크와 더불어 감독직 제의가 왔다고 한다. 하지만 잉글랜드도 영국 올림픽 대표팀 감독도 모두 거절하고 국대감독직은 어디라도 맡지않겠다고 말하던 점이나 이제 은퇴하고 노후를 즐기고 싶다는 그가 맡을 가능성은 별로 없어보인다.

그러나 13-14 시즌에서 맨유의 상태가 영 메롱이라 빡친 나머지 선수단 정리를 암시하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모예스의 경우에는 자신의 맨유 감독 초창기를 언급하며 감독 자리를 계속 맡길 것이라고 한다.##[33]

6.4. 이야기


  • 승부의 신이란 서적에 보면 애버딘 시절 구단에 부상당한 선수를 의한 다용도 운동기구와 함께 당구대를 같이 놔뒀는데 선수들은 한 명이 운동하면 나머지는 당구를 치는 식으로 기구를 돌아가며 썼다고 한다. 복도에 발소리가 들려 걸릴 일이 없었다고... 그런데 어느날 퍼거슨이 용무가 있어 퇴근을 늦게 하면서 기구가 있는 곳에 들렸다. 애버딘 선수들 중 한명이 기지를 발휘해 큐대를 등에 지고 운동을 했다고... 퍼거슨은 그냥 웃고 갔다고 한다.당구공은 남아있을텐데?

  • 83년 유러피안 컵 위너스컵 결승전 당시 실수한 알렉스 매클리시가 실점의 빌미를 제공하자 그에게 그 유명한 헤어드라이어를 날렸다고 한다. 이후 애버딘은 레알 마드리드를 꺾고 대회 우승을 했다. 매클리시가 경기 후 샤워실에서 샤워를 하면서 실수를 곱씹는데 퍼거슨 감독이 들어왔다. 옷을 입고 있어서 물이 바지에 튀었고 매클리시는 그게 웃겼다고 한다. 들어온 퍼거슨은 매클리시를 칭찬하고 나갔다.

  • 조광래와 더불어 한국에서 제일 많이 까이는 감독. 한국 최고의 선수인 박지성에게 죄다 궂은 일을 전담시키기에 허구한 날 영감탱이라 까인다. 그러나 박주영이 아스날 가면서 벵거에게 그 자리를 내주어 오히려 벵거가 퍼거슨과 비교당하며 무차별로 까였다.(...) 고생은 시키지만 어쨌든 가끔이라도 쓰기는 쓰기에, 해축팬들은 벵거를 까면서 퍼거슨을 명장이라 지칭하여 비교대상으로 삼아, 까임의 왕좌에서는 일단 벗어났다. 한때 제한맨이라 할정도의 맨유공화국이었던 해축팬내 최고지분을 자랑하던 팀의 감독인 만큼 상당한 애증의 대상.

    그리고 박지성이 어느 특정 강등 예정팀으로 이적할때 박지성은 아주 소중한 선수고 그가 그리울것이라며 립서비스 꽤나 좋은 매너를 보여주어 박지성이 맨유를 나올때도 그렇게까지 까이지는 않았다. 벵거 지못미 그리고 퍼거슨, 벵거 두감독에 비해 누가봐도 실력도 딸리면서 입만 산 레드냅 감독이 2013년 현재 해축팬 내 까임의 왕좌에 등극하였고 벵거가 2순위에 오르면서 현재는 그렇게 까이지 않는다. 거기다 QPR과의 경기에서 손수 벤치까지 행차하여 박지성을 찾아가 악수하여 그의 위신을 세워줌으로써 해축팬과 박빠들내에서 완벽한 념캐...아니 개념영감님으로 등극하여 찬양을 받았다.

  • 남자답고 터프한 성격에 언플의 달인. 한창 주제 무리뉴가 리그에서 날아달니땐 불꽃터지는 설전이 오고 갔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서로를 높이 평가하는 사이여서 주제 무리뉴도 2010-2011 시즌에서 맨유의 우승이 확정되었을때 여러차례 퍼거슨을 띄워주는 인터뷰를 했고 퍼거슨도 주제 무리뉴가 엘 클라시코에서 물의를 빚으며 언론과 팬의 공격을 받자 이를 옹호하는 인터뷰를 했다. 퍼거슨 감독의 말로는 무리뉴가 자신의 젊은 시절을 연상시킨다고. 그래서인지 주제 무리뉴가 프리미어 리그를 떠난 후에도 종종 연락을 한다.[34] 아, 물론 벵거 감독과도 아스날이 한창 잘 나갈 때에는 신나게 서로 갈구며 싸웠지만 아스날이 요즘 5시즌째 무관인 상태라서 그런지 요즘은 조용하다. 심지어 벵거 감독이 2011년도 여름 이적 시장에서 집중공격당할 때 그를 두둔하면서 쉴드를 쳐주기까지 했다.[35] 싸우면서 든 정이 무서운 듯.그래놓고 2011-2012시즌 개막하니까 아스날을 가차없이 8:2로 발라버렸지.[36] 08/09 시즌에 리버풀이 한창 잘 나갈때 언플로 리버풀과 라파엘 베니테스 감독을 뒤흔들고 리그 우승을 차지한 적도 있다. 마찬가지로 95-96 뉴캐슬의 케빈 키건도 언플로 바르면서 우승을 낚은 적도 있다.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선수의 경기 출장에 관하여 팬과 언론에게 떡밥을 던지고 낚는 것은 다반사.[37] 지금은 사이가 나쁜 라파엘 베니테스와도 처음에는 사이가 괜찮았다. 특히 베니테스는 프리미어 리그로 진출하기 전에 영국에 왔을 때 퍼거슨 감독의 안내로 올드 트래포드를 둘러보기도 했고 자신이 젊었을 때 롤 모델이 퍼거슨 감독이라고 인터뷰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리버풀 FC의 감독을 맡으면서 서로 충돌하다보니 지금은 사이가 많이 안 좋은 듯하다.

  • 언론을 자유자재로 할 줄 알며 자기팀 선수를 보호할때는 무슨 수를 써서도 보호하는 감독. 이게 가끔 지나치면 사단이 나는데 대표적인게 독일인드립. 이 사건으로 바이에른 뮌헨이나 분데스리가 팬덤에서는 심심찮게 까인다.

  • 영국 축구계에서 그 위상이 대단한데 역대 감독 순위에서 최소라도 3위를 차지하는 명장일 뿐만 아니라 감독 노조 위원장으로 활동한 것도 있고 그 연륜과 영향력도 발군이다. 심지어는 퍼거슨 감독의 아들과 관련된 정확하지 않은 고발 프로를 내보낸 BBC와 수년에 걸친 신경전 끝에 2011년 8월, BBC의 사장과 북부지역 총괄 디렉터 등이 나서고야 용서해주는 위엄을 보였다. 이때, BBC는 퍼거슨과 화해한 사실을 속보로 내보내기까지 ㄷㄷㄷ. 한번 퍼거슨에게 인터뷰 금지를 먹은 언론사는 뒤집힐 정도이며, 영국 감독들의 모임이 있는 날이면 퍼거슨 감독이 입장하면 일제히 일어나서 인사한다고. 또한 영국의 감독 중에 퍼거슨 감독이 키워낸 선수출신이 많아서 그를 통한 영향력도 상당하다. 심지어 위건의 마르티네즈 감독이 퍼거슨이 이러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영국 축구계에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고 신랄하게 깐 적이 있는데 얼마 안 있어 자기가 한 말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정말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지 뒤늦게 권력의 무서움을 맛봐서인지?

  • 또한 그 위상을 적극 이용해 심판들에게도 강한 압력을 행사했다. 만약 마음에 안 드는 판정이 나온다면 하프타임이나 경기 종료 후에 심판 대기실에 들어가서 심판에게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도 징계는 커녕 기사화도 은퇴하고 나서야 되었다.

  • 또한 위에서 언급했듯이 인터뷰 원칙에 어긋나거나 신경에 거슬리는 기자는 가차없이 인터뷰에서 배제해버리는데 맨유 기사를 싣지못해서는 스포츠지로 살 길이 없어지는 거나 마찬가지다. 때문에 인터뷰 금지를 당하는 기자는 스포츠 기자로서 치명타를 입는셈인데 이러한 기자 중 한명이 나중에 투병생활을 하게되자 이 사실을 알고 위문 화환을 보내면서 다시 인터뷰해도 좋다고 허가해준 적도 있다. 다른 기자는 인터뷰 금지령을 풀기위해 몇달동안 열심히 퍼거슨을 찾아다니며 해명하려다가 번번히 기회를 놓치자 열받은 나머지 크리스마스 무렵에 퍼거슨에게 들이닥쳤는데 거기서 퍼거슨이 의외로 관대하게 대해주는 바람에 감격(?!)해서 문제가 된 기사를 편집한 담당 에디터에게 닥돌해서 퍼거슨 대변인 노릇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래저래 무서운 영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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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년동안 키워온 게임 세이브데이터를 잃어버린 표정

  • 영감이란 별명이 있는데, 경기 중에 보면 항상 껌을 씹고 있기 때문이다. 껌 씹는 속도는 그 날 경기력에 따라 다르다.(...) '껌영감' 대신 '껌거슨'이라고도 많이 부른다. IC6M|1611830|20061015135842&srchid=IIMI1aj6400 분노의 껌씹기

  • 맨유 선수들 사이에서는 헤어 드라이어라는 별명도 있는데, 이유는 전반에 OME스러운 경기를 보이면 라커룸에서 선수들의 머리가 휘날리도록 분노하기 때문이라고.(...) 실제로 목격하면 감독이 미친게 아닐까싶을 만큼 화를 내는데[38] 그러고나서 다른 사람들을 보고 씨익 웃는다고한다. 계산된 행동이란 소리.

  • 선수시절 골 넣는 스트라이커임에도 불구하고 감독한테 수비 안 한다고 늘 혼났다고 한다. 이 때의 흑백사진을 보면 존 테리를 닮은 준수한 외모의 선수였다는 것을 알 것이다.

  • 배짱이 정말 대단하다. 맨유 감독 초창기 시절, 맨유의 레전드 중 한명인 폴 인스가 자신이 출전에서 밀리는 것에 불만을 품고 퍼거슨 감독에게 권총을 들이대고 협박했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 폴 인스는 다른 팀으로 이적했다. 한편 팬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던 폴 인스의 이적 때문에 팬들이 퍼거슨을 비난했는데도 그는 폴 인스가 총으로 협박한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후에 맨유의 다른 레전드 스티브 브루스가 십수년이 지난 후에 폴 인스를 비난하며 이 사실을 폭로해서 알려지게 되었다.

  • 가족관계는 언급된 대로 아내 캐시, 세 아들과 그들의 가족이 있으며 동생 마크 퍼거슨도 유나이티드의 수석 스카우터로 재직중이다. 아내 캐시 여사와의 사이는 아주 좋은 편이며 소문난 애처가로 알려져있다. 은퇴를 결심하게된 최초의 계기 역시 처형이 세상을 떠나면서 아내가 홀로 보내는 시간이 많아져서 자신이 아내 옆에 있어줘야겠다 생각해서라고..

  • 장남 마크는 재무회계 쪽 일을 하면서 아버지의 재정관리를 담당하며 둘째 대런은 축구 선수를 거쳐 감독일을 하고 있다. 셋째 아들은 축구 에이전트 쪽 일을 한다고. 가족을 끔찍히 생각하며 아들들도 모두 아버지 집 근처에 산다고. 특히나 손주들에게 푹 빠져 산다고 한다. 손주중에서 제이크 퍼거슨이 축구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39]

    알렉스 퍼거슨 감독과 제이크 퍼거슨

  • 정치적으로는 열렬한 노동당 지지자이며 노동당에서 리더십 관련 조언을 하는 고문으로 활동한 적도 있다.[40] 한번은 맨유 구단에서 식당 아주머니와 청소부 등을 해고하려고 하자 감독직을 걸고 막았으며 감독 초창기 시절 데모하는 노동자들의 모금함을 그냥 지나쳤던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다고.[41] 또한 감독 노조 위원장을 한 적도 있고 타 팀의 감독들이 연락해오면 조언을 아끼지 않으며 언론과 팬들의 공격을 받는 감독들의 쉴드도 잘 쳐준다.[42]베니테스 감독한텐 아닌 거 같지만. 천하의 호지슨도 쉴드쳐주면서 베니테스는 무시. 그외에도 구단의 안내 데스크에서 근무하는 할머니가 정년 퇴직을 하게 되어 생활에 어려움을 겪게 될 위기에 처했을때도 그녀가 계속 근무할 수 있게 도와주고 출퇴근을 위해 택시를 수배해주기도 했다.

  • 한국 한정으로는 축구에 관심없는 사람들에게는 희대의 명언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스포츠 이외의 분야 뉴스에서 댓글로 언급되면 거의 100이면 100 1승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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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1985년에 대영제국 훈장 4등급(OBE)을 받은 이후 1995년에 3등급(CBE)으로 승급되었고, 1999년 Knight Bachelor에 서임되어 Sir이 되었다. 은퇴를 계기로 맨체스터 지역 하원의원들이 퍼거슨을 종신귀족(비세습 남작)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된다면 호칭이 Sir에서 Lord로 바뀌게 된다.
  • [2] 퍼거슨 은퇴 이후 스쿼드가 펠라이니, 후안 마타 영입 말고 바뀐 게 없는데 퍼거슨은 우승을 하였고, 모예스는 구단 역사상 최악의 기록들을 세우고 떠났다. 후임인 반 할이 3천억이나 들여서 개조해서 겨우겨우 일으켜 세우려고 하나 이제껏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해서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에는 아직 갈 길이 너무나도 먼 상황이라 B급에 가까운 스쿼드로 우승을 일구어 낸 퍼거슨은 더더욱 칭송받고 있다.
  • [3] Knight Bachelor는 '최하위 훈작사'로 번역되고는 하지만, 3등급 CBE나 4등급 OBE 등 기사작위급보다 아래인 훈장'만' 받은 사람을 '훈작사'로 칭하는 경우도 또 많기 때문에 이는 혼란을 부르는 번역이다. OBE가 훈작사인데 Knight Bachelor가 최하위 훈작사라는 그 말대로라면 CBE > OBE >>> Knight Bachelor 라는 말도 안 되는 꼴이 만들어 진다. '훈작사'로 구글링을 해서 조금만 살펴보면 그때그때 다른 개족보를 확인할 수 있다. 훈작사라는 단어 자체도 영국 정부로부터 공인된 것인지 출처가 불분명한 단어이고, 훈장의 훈(勳)과 작위의 작(爵), 기사의 사(士) 세 단어를 짬뽕시켜 만들어진 한자어다. 제도에 대한 기본지식이 없이 훈장과 작위를 아예 뭉뚱그려서 하나로 퉁쳐버리게 하는 단어라 할 수 있다. 기사작위는 아무나 받는 게 아니냐는 잘못된 인식에 이런 혼란스런 번역이 상당한 공헌을 했다. 따라서 여기서는 원어 'Knight Bachelor'를 그대로 밝혀 적는다.
  • [4] 90년대 맨유는 비교적 긴 패스로 쭉쭉 역습해나가는 스타일이였고 2000년대 중후반으로 가면서 선수들의 빠른 스위칭과 짧은 패스를 통한 역습이 주가 됬다. 물론 그게 맨유 축구의 전부는 아니였다.
  • [5] 나머지 4인은 호나우지뉴,에투,아드리아누,셰브첸코. 당시 박지성의 활약으로 PSV 4강진출에 밀란을 상대로 2차전 승.
  • [6] 퀸즈파크레인저스와는 전혀 다른팀이다.
  • [7] 부부간의 사이는 대단히 좋은 듯. 천하의 퍼거슨 감독도 집안에서는 아내에게 수그린다고. 한번은 먼 거리로 친선경기를 가야했는데 아내가 집안청소하고 가라는 한 마디에 대청소를 거드느라 정작 감독인 본인이 그 경기에 가지 못했다고. 2000년대 초반에 은퇴를 고려할 때도 낮잠 자다가 아내 캐시에게 발로 걷어차이고 '남편 은퇴는 내가 결정하는거임.' 말을 듣고 은퇴를 포기했다. ㄷㄷㄷ
  • [8] 당시 퍼기경은 "퍼거슨 집안의 장남은 모두 알렉스(Alex)란 이름이라며 첫아이 이름을 알렉스로 하자"고 주장했으나 퍼기경의 할아버지의 이름이 존이라는 걸 아내에게 들키는 바람에 거짓말이 들통나 마크가 되었다고 한다.
  • [9] 퍼기의 에버딘 시절을 제외하면 사실상 늘 그래왔다. 지금도 그렇다.
  • [10] 토트넘의 제의를 받고 진지하게 고민했었다고 한다. 아깝다, 토트넘. 다행이다, 맨유.
  • [11] 이 마틴 에드워즈는 1986년 이후로 맨유의 감독을 선임한 최후의 맨유 경영진으로 남아있다. ㄷㄷㄷ
  • [12] 매트 버스비 감독이 떠난 후, 맨유의 후임감독들은 줄줄이 실패하거나 평범한 수준에 그쳤다. 때문에 감독 은퇴후 맨유 경영진에 들어 있던 버스비와 레전드 보비 찰튼 경이 후임 감독을 물색한 결과 찾아낸 것이 퍼거슨 감독이라고. 이후 보비 찰튼 경은 퍼거슨이 맨유에서 비판에 직면할 때마다 그를 적극 지지하며 힘을 실어 주었다.
  • [13] 조크 스테인은 셀틱FC에서 큰 실적을 남긴 감독으로 축구 전문지에서 매기는 명장 순위에서도 높은 편에 드는 뛰어난 인물이다. 퍼거슨 감독도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평소 스승으로 모시던 스테인 감독의 죽음은 퍼거슨 감독으로서도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 [14] 맨유의 레전드 중에서도 손꼽히는 선수. 리버풀을 재건한 천하의 빌 샹클리조차 맨유와의 시합전에 선수들에게 '조지 베스트는 막을 수 없다. 그는 그냥 없는 사람치자.'라고 할 정도의 실력이었다.
  • [15] 사실 이는 비단 맨유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당시의 맨유가 특히 심하긴 했으나 아스날의 아르센 벵거 감독도 제일 처음 잉글랜드에 와서 한 일이 음주를 통제하는 것이었을 정도로 당시 잉글랜드 축구계는 술에 지나치게 관대했었다.
  • [16] 항구도시로 잘나갔던 리버풀과 신흥 공업도시로 떠오른 맨체스터 지방의 지역 대립은 무척 심하다.
  • [17] 81년~90년 사이 리버풀은 리그 우승 6회, 챔스 우승 2회를 달성했다.
  • [18] 이들 중 상당수가 선수 은퇴후에 지도자 길을 걷게 되었으며 특히 마이크 펠란의 경우는 2013년 6월까지 맨유의 수석 코치직을 수행했다.하지만 스승인 퍼거슨이 은퇴하자 후임 감독인 모예스에 의해 해고되었다.
  • [19] 하지만 퍼거슨은 노먼에게 존경심을 갖고 있었고, 노먼 또한 방출된 후에도 퍼기를 존경하고 거액을 약속하며 퍼기의 뒷담화를 원했던 언론의 제의도 뿌리쳤다.
  • [20] 맨유의 전설적인 선수로 팀, 잉글랜드 국대 양쪽에서 주장을 역임했고 특히 맨유에서는 12년간 주장이었으며 이는 역대 최장기간 주장이다. 맨유가 별 볼일 없는 중하위권으로 장기 침체에 빠져있을 때도 발롱도르 순위권에 들었고 많은 명문구단의 제의를 받았으나 이를 뿌리치고 맨유에 남았을 정도로 헌신했다. 큰 부상을 많이 겪으면서도 클래스를 유지했으며 캡틴 마블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전설적인 맨유의 7번 라인 중 한 명. 맨유가 26년만에 프리미어 리그 원년 우승할 당시 주장으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 [21] 당시 FA컵의 위상은 지금보다 훨씬 높았다.
  • [22] 특히 맨유의 레전드 중에서도 손꼽히는 보비 찰튼경이 적극적으로 힘을 실어주었다.
  • [23] 리그 우승, 챔피언스리그 우승, FA컵 우승
  • [24] 고의로 얼굴에 찬 것은 아니고 성질을 못이겨 찬 축구화가 우연히 베컴의 얼굴로 날아갔다고 한다. 퍼거슨 왈, '그게 노려서 찬거였으면 나는 아직도 현역으로 뛰고 있었을 것이다'라고(…).
  • [25] 퍼거슨 본인도 스탐을 쫓아낸 것은 큰 실수라고 인정했을정도. 이후 웨스 브라운, 로니 욘센 등으로 버티는데 한계를 느낀 퍼거슨은 리오 퍼디난드에 3500만 달러를 지르게 된다.
  • [26] 스탐의 나이가 이제 곧 서른인데다가 주식상장을 해 돈지랄을 하던 라치오에서 1500만 파운드 딜을 제시하자 승낙했다고 자서전에서 밝혔다.
  • [27] 미들즈브러와의 경기에서 4-1로 대패한 직후 5명의 동료 선수를 실명을 인용해가며 비판했고 이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그 당시 로이 킨에게 비판을 받았던 선수들은 대런 플레처, 키어런 리차드슨, 앨런 스미스, 리오 퍼디난드, 존 오셔이다.
  • [28] 이때 개편이 성공했었더라면 지금쯤 맨유는 그 특유의 치달과 측면축구가 아니라 중앙에서의 패스 플레이를 중심으로 하는 아스널이나 맨시티 같은 팀이 돼있었을지도 모른다. 이후에도 맨유는 계속해서 전술개편을 시도하고는 있으나 이렇다 할만한 성공사례는 없다. 그러나 나름대로 442와 4231을 혼용해서 사용할 수 있고, 442도 세련된 방식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성과는 있다.없으면 영감 지금까지 해먹겠어.
  • [29] 이게 얼마나 대단한거냐면 옆동네 첼시는 같은시즌 숀 라이트 필립스 한명 사는데 2700만 유로를 넘게 썼다...
  • [30] 리그 13라운드까지 진행되었을 때 6승 7무였다.
  • [31] 현재 EPL에서 퍼거슨보다 한팀 감독을 오래한 감독은 없다. 2위는 벵거, 3위는 모예스
  • [32] 알겠지만 프리미어 리그는 20개 팀이 있어 감독도 20명. 따라서 경질가능성이 가장 낮다는 말이다. 참고로 19위는 아스널의 아르센 벵거 감독...이었는데 서서히 벵거의 입지도 위험해지고 있다.
  • [33] 일부 축구팬 사이에서도 알렉스 퍼거슨이 마지막 임기까지 선수단의 세대 교체를 실패한 것을 부진의 원인 중 하나로 꼽고 있기는 하다.
  • [34] 무리뉴 감독은 자신이 첼시에 부임한 초기에 올드 트래포드에서 맨유를 이긴 후, 퍼거슨 감독이 포도주를 같이 마시자며 상대팀 감독인 자신을 감독실로 초청해서 환대해 준 것에 감명받았다고 한다. 2007년에도 비슷한 사례로 같이 식사도 했었는데, 무리뉴 본인이 회상하길 혹시 이것이 자신을 후계자로 데려가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잠시 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퍼거슨 은퇴 후 그 후계자는 누가 될 것이냐는 의문에 무리뉴 감독의 이름이 많이 올라왔지만, 결국 데이비드 모예스로 결정났다.
  • [35] 영감은 치열하게 싸우던 적을 두둔하던 사례가 없던 건 아니고, 보통 그럴 경우 영감이 판단하기에는 그 적수는 이미 같이 정상에서 경쟁할 힘이 떨어진 상태다. 벵거와 든 정이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 [36] 하지만 이 때도 대승에 기뻐하긴 커녕 상당히 씁쓸해하는 표정을 보였다.
  • [37] 그런데 요즘은 자기가 자기 떡밥에 낚이는 경우도 심심치않게 볼 수 있다.
  • [38] 카가와 신지는 '퍼거슨 처럼 무서운 감독은 난생 처음'이라고 인터뷰하기도 했다.
  • [39] 무리뉴의 딸 마틸다가 반해서 종이루비(종이학이라고도)를 접어서 선물했다는 그 손자이다.
  • [40] 스코틀랜드 출신이라는 점이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스코틀랜드는 할당된 영국의회 의석 총 57석 중 무려 41석을 노동당에 몰아준 노동당 텃밭이다.(2010년 총선 기준) 나머지 의석도 11석은 중도정당인 자유민주당(영국), 6석은 스코틀랜드 국민당이고 보수당은 단 1석 밖에 차지하지 못했다. 2010년 총선 때 아무리 보수당이 과반을 차지하지 못했다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보수당이 집권여당이 된 선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스코틀랜드인들의 정치성향이 상당히 뚜렷하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가장 최근에 노동당 출신 영국 총리였었던 토니 블레어, 고든 브라운은 모두 스코틀랜드 출신이다. 블레어는 그나마 집안은 잉글랜드쪽이지만, 고든 브라운은 집안도 대대로 스코틀랜드계라고.
  • [41] 이 때 퍼거슨이 데모행렬을 그냥 지나쳤는데 같이 있던 조크 스테인 감독이 가지고 있던 돈을 다 털어 그들의 모금함에 돈을 기부한 것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한다.
  • [42] 앙숙처럼 보이지만 언론을 통해 무리뉴도 변호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