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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톨리 비쇼베츠

last modified: 2015-03-18 18:57:24 Contributors

Anatoliy Byshovets
우크라이나어: Анато́лій Фе́дорович Бишове́ць
러시아어: Анатолий Фёдорович Бышовец


이름 아나톨리 표도로비치 비쇼베츠
(Anatoliy Fyodorovich Byshovets)[1]
국적 러시아, 우크라이나
생년월일 1946년 4월 23일
출신지 소련 키예프
신체조건 176cm
선수시절 소속팀 디나모 키예프 (1963~1973)
스태프 커리어 소련 축구 국가대표팀 청소년팀 (1982~1985)
소련 축구 국가대표팀 올림픽팀 (1986~1988)
디나모 모스크바 (1988~1990)
소련/독립국가연합 축구 국가대표팀 (1990~1992)
AEL 리마솔 (1992~1993)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기술고문 (1994)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1994~1995)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U-23 (1995~1996)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 (1997~1998)
러시아 축구 국가대표팀 (1998)
샤흐타르 도네츠크 (1998~1999)
CS 마리티무 (2003)
톰 톰스크 (2005)
로코모티브 모스크바 (2006~2007)
쿠반 크라스노다르 자문위원 (2009)
FC 우파 기술고문 (2011)
선수시절 포지션 공격수
소련 국가대표 39경기 15골


우크라이나 태생의 소련 축구선수, 축구 감독이다. 키예프 태생. 우크라이나인이지만 현재 국적은 러시아이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맡아 유명해졌다. 소련 축구 전성기의 상징적 인물이다.

Contents

1. 선수
2. 지도자
2.1. 소련시절
2.2. 한국시절
2.3. 러시아시절

1. 선수


비쇼베츠는 FC 디나모 키에프의 유소년팀을 거쳐 성인팀에서 뛰었다. 선수기간은 1963~1973. 이 때 그는 팀의 핵심 공격수로 소련챔피언쉽 4회우승 (1966, 1967, 1968 3연패, 그리고 1971)과 소련컵 2회 우승(1964, 1966)을 차지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1970년 월드컵에서는 소련 대표팀의 주전 공격수로 나서 4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2. 지도자


2.1. 소련시절

1973년 은퇴후, 디나모 키에프의 축구학교에서 지도자생활을 이어갔다. 1988 서울 올림픽에서는 소련대표팀을 지도하여, 호마리우가 이끈 브라질을 결승에서 대파하고 금메달을 땄다.

2.2. 한국시절

이후 1994년 2월 한국 축구대표팀 기술고문으로 선임되었고, 이후 7월에 올림픽팀 및 성인팀 감독을 맡았다. 처음부터 감독으로 선임되지 못한 이유는 아마도 국내축구인들의 반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한국 국대 감독 데뷔 무대인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서는 8강전에서 홈팀이자 숙적인 일본을 3:2로 격파하고 4강에 진출하는 데까진 성공했지만 4강전에서 우즈베키스탄에 0:1로 덜미를 잡히면서 결승 진출에 실패했고 [2] 뒤이은 동메달 결정전에서도 쿠웨이트에 패해 동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그러나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는 첫 경기에서 가나를 잡고 올림픽 출전 사상 첫 승을 올렸지만 2차전에서 멕시코와 무재배를 한 데 이어 최종전에서 이탈리아에 1:2로 패하면서 사상 첫 8강 진출에는 실패했다. [3] 아틀란타 올림픽을 끝으로 국대감독직을 마치고 러시아로 돌아갔다. (그래도 계약기간은 다 채웠다. 코엘류나 본프레레, 베어벡처럼 잘린건 아니다.)

겨우 2년간 한국대표팀을 맡았지만, 평은 대체로 긍정적이다.

원래부터 한국 축구 지도자들은 외국인 감독에 대해 알레르기를 보였는데, 대표적으로 박종환은 비쇼베츠를 두고 "동유럽은 축구 선진국이 아니다"라고 엄청나게 디스했고[4] 선수단 장악문제로 일부 선수들과 충돌하여[5] 축협과도 사이가 별로 안좋았기 때문에 한국생활에 그다지 애착을 보이지 않아서 [6] 재계약에도 별로 관심이 없었다고 전해지지만 [7] , 당시만 해도 공정한 선수선발이나 선수 개개인에 대한 특징파악 [8], 그리고 전술적 백지상태였던 한국축구에 전술을 심으려고 노력했던 면은 꽤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히딩크처럼 피지컬을 중시하긴 했지만, 히딩크와는 달리 윤정환을 총애했다. 또한 유상철을 발탁하여 전방위로 사용하여 이후 한국 국가대표팀의 포메이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윤정환을 중심으로 중앙 미드필더는 윤정환의 보디가드로 피지컬 좋은선수들로 꾸렸다. 이전술은 후에 윤정환이 감독이 되었을때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한국을 떠나면서 한국 축구발전에 대한 조언을 해달라는 기자들의 요청에, "축협을 해체하면 된다"는 정곡을 찌르는 말을 했다.

이후 국대팀 감독으로 선임된 차범근 감독이 지도법이 비쇼베츠와 유사하다고 해서 배추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2.3. 러시아시절


이후 러시아 클럽과 러시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하고, 2006년 로코모티브 모스크바의 감독을 역임하지만, 출전을 댓가로 선수에게 뇌물(..)을 요구했다가 발각되어 불명예 퇴진을 당했다.

이후 쿠반 크라스노다르의 기술고문으로 일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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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러시아어로는 Анатолий Фёдорович Бышовец으로 표기한다.
  • [2] 이 게임은 일방적인 한국의 경기였으나, 아쉽게도 골키퍼 차상광이 어이 없이 놓치는 바람에 지고 말았다.
  • [3] 당시 이탈리아는 2패로 탈락 확정이었고, 한국은 비기기만 하면 토너먼트에 올라갈 수 있었으나, 종료 직전에 한골을 먹는 바람에 8강 진출이 실패했다.
  • [4] 히딩크 또한 부임초기에 국내축구인들의 디스에 엄청나게 시달렸다.
  • [5] 지금은 한국축구의 흑역사가 된 홍명보가 당시 비쇼베츠에 노골적으로 반항하여, 교체선수 출전을 거부하는 등의 항명을 했다. 지금 홍명보와 한패가 된 역사를 보면 아이러니하지만 당시 조중연이 홍명보를 두고 "선수가 저러면 안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 [6] 영어를 못했고, 러시아어 통역이 한국말을 잘 몰라 선수지도에 어려움을 겪었고, 이후 축구협회는 외국인 감독 선임에 영어구사를 조건으로 달았다.
  • [7] 아틀란타 올림픽 결과에 상관없이 떠난다고 밝혔다.
  • [8] 선수들을 지도할때나 관전하면서 항상 메모하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이렇게 데이터나 기록을 중시하는 모습은 한국의 그 어떤 지도자에게서도 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