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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우

last modified: 2015-01-04 20:31:19 Contributors


이름 신선우
생년월일 1956년 2월 10일
국적 한국
출신지 서울시
출신학교 용산고-연세대학교
포지션 센터
신체 사이즈 188Cm, 88Kg
실업입단 1977년 현대 남자 농구팀 입단
소속팀 현대전자(1977~1984)
감독 대전 현대/전주 KCC 이지스(1994~2005)
창원 LG 세이커스(2005~2008)
서울 SK 나이츠(2009~2011)

1997~1998, 1998~1999 한국프로농구 감독상
최인선(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신선우(대전 현대 다이넷) 종규(원주 삼보 엑서스)

Contents

1. 개요
2. 선수 시절
3. 지도자 시절
3.1. 현대 감독 선임 전까지
3.2. 현대 - KCC 시절
3.3. 창원 LG 세이커스 시절
3.4. 서울 SK 나이츠 시절

1. 개요

한국의 농구 선수이자 농구 감독. 선수 시절에는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 금메달의 주역이었고, 크지 않은 키와 부상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골밑을 지키던 센터였다. 감독으로도 성공해서 신산으로 불리며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KCC (구 현대)에서 LG로 떠난 후에는 망했어요.농구판 김재박? 언론 등에서 공식적으로 쓰는 별명은 신산. 까는 별명으로는 규정의 허점을 극한으로 이용하는 트레이드 수법으로 인해 붙은 꼼산이 있다.

2014년 현재 WKBL 총재직무대행[1] KBL 기술위원장.

2. 선수 시절

용산고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낸 센터였고, 박수교와 함께 연세대에 입학해서 연세대를 이끈 선수였다. 센터로서는 그리 크지 않은 키인 188cm 이지만, 당시로서는 그래도 제법 큰 키였고, 무엇보다 농구 센스가 좋아서 작은 키를 커버했다. 특히 골밑에서 외곽으로 적절할 때 빼주는 패스가 일품이었다고.

그러나 선수로서는 나름대로는 성공적이었지만, 많은 경기에 뛰지는 못했는데 그 이유는 잦은 부상 때문이었다. 이미 대학교 시절에 허리 디스크로 고생했는데, 여기에 업친데 덮친 격으로 무릎 관절염까지 앓으면서 선수로서의 기능이 치명적으로 떨어졌다. 결국 1979년에 가면 일시적으로 은퇴를 선언하고 재활에만 매달리는 상황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비록 1977년에 현대의 창단 멤버로 합류해서 잠시 뛰기는 했지만, 이 무릎 부상으로 인해 뛰어난 활동량은 절반으로 감퇴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부상에 대한 재활 끝에 1982년에 극적으로 재기에 성공하면서 코트에 복귀할 수 있었고,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 대표로 합류해서 대표팀의 골밑을 지키면서 중국을 누르고 사상 첫 아시안 게임 남자 농구 금메달을 차지하는데 주역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이 것은 하얗게 불태운 결과였고, 또 다시 무릎 부상이 도지면서 결국 신선우는 1984년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활약해서 1983-84 초대 농구대잔치 우승을 현대에게 안겨주고 은퇴는 했다.

3. 지도자 시절

3.1. 현대 감독 선임 전까지

은퇴 후 1984년 창단한 현대중공업 여자 농구팀의 코치로 선임되면서 지도자의 첫 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현대중공업 농구팀이 현대증권으로 이관되는 과정에서 신선우는 농구 지도자의 세계를 떠나 현대증권의 평사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여기서 제법 능력을 발휘하며 1993년에는 일약 부장자리까지 승진하면서 현대증권에서 승승장구했다. 법인 영업 부장으로 활약하던 때가 신선우 나이 38세였기 때문에 그대로 증권맨으로 남을 수도 있었지만, 1994년 동기인 박수교가 사퇴한 현대전자 남자 농구팀의 감독으로 임명되면서 신선우는 증권맨 생활을 접고 농구판으로 다시 돌아왔다.

3.2. 현대 - KCC 시절

1994년 부임 당시 현대전자는 농구대잔치의 강호로서의 명성은 완전히 잃어버린 상황이었다. 기아차는 건재했고, 라이벌인 삼성전자가 스카우트 싸움에서 그래도 간간히 대어를 건진 것과 달리 현대는 전혀 스카우트 싸움에서 힘을 쓰지 못했던 것. 이 상황에서 취임한 신선우는 일단 이상민과 조성원을 영입했지만, 이들을 모두 군대로 보내면서 후일을 기약했다. 프로 출범이 임박한 상황에서 이들을 프로 출범에 맞춰서 쓰려는 계획이었는데 이 판단은 적중했다.

프로 출범 원년인 1997시즌에는 부진했지만, 1997-98 시즌 이상민과 조성원이 제대하고, 추승균이 입단하면서 현대의 전력은 순식간에 강해졌다. 그리고 여기에 신선우의 절묘한 묘수, 혹은 꼼수가 통했다. 바로 니 맥도웰의 영입이었다. 당시 외국인 선수 선발 제도는 193 미만 1명, 193~205 사이 1명을 영입할 수 있었는데, 맥도웰은 192.5cm로 아슬아슬하게 단신용병이 되었다. 이 맥도웰의 힘과 탄탄한 기본기를 주목한 신선우는 2라운드에서 맥도웰을 뽑으면서 팀의 파워포워드 자리를 맡겼고, 이-조-추 라인에 더해 맥도웰의 힘이 보강된 현대는 정규시즌 3연패 및 챔프전 2연패를 차지하면서 일약 왕조의 반열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1999-2000 챔피언 결정전에서 로렌조 홀을 데려오기 위해 SK로 트레이드 시킨 재키 존스에게 밀리고, 여기에 SK의 포워드 로데릭 하니발에게 이상민이 키에서 밀려서 눌리는 것을 보고, 뜬금없는 전략을 세우기에 이른다. 바로 전 선수를 장신 포워드로 꾸려서 승부를 보는 이른바 토털 바스켓 볼이다. 이를 위해 조성원양희승을 바꾸면서 선수들의 장신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상당한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그래도 2001-02 시즌에는 12연승을 달리면서 어느 정도 안정세를 찾았다. 하지만 2001-02 시즌 PO에서 외국인 선수 1명으로 맞서던 SK 나이츠에세 4강 PO에서 패하면서 챔프전 진출은 좌절되었다. 그리고 토털 바스켓볼은 점차 센터의 높이에서 밀리면서 그 위력이 떨어졌다. 애당초 2001-02 시즌의 성공도 KCC로 돌아온 재키 존스의 위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여담으로 1999-2000 시즌부터 3시즌 연속 포스트시즌에서 최인선 감독에게 발린 셈이다.

결국 신선우는 토털 바스켓볼을 포기하고 팀 재건에 나서야 했다. 2002-03 시즌을 실패한 후, 조성원을 다시 데려오면서 팀 재건에 나섰는데, 2003-04 시즌에는 상당한 실력을 보여주면서 원주 TG삼보와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여기서 신선우는 다시 묘수를 꺼내드는데 당시 하위권에 쳐졌던 모비스와 용병 맞 임대를 단행하면서 모비스의 주축 센터였던 R.H.바셋을 임대 영입한 것. 기존의 실력있는 선수인 찰스 민랜드와 시너지를 노렸던 이 선택으로 인해 KCC는 7차전 접전 끝에 정규시즌 1위 원주 TG삼보를 누르고 우승에 성공했다. 다만 이 때 임대 과정에서 1라운드 지명권을 넘겨줬는데, 이게 1픽에 걸리면서 모비스의 에이스인 양동근은 모비스로 가게 되었다.

2004-05 시즌에 다시 대권에 도전했지만, 전년도의 패배를 거울삼아 대비를 하던 원주 TG삼보는 KCC의 전략을 막아내면서 4승 2패로 전년도의 설욕을 했다. 그리고 계약이 끝난 신선우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재계약을 채결하지 않고, 그를 원하던 창원 LG 세이커스로 역대 최고 연봉인 3억원을 받고 이적했다.

3.3. 창원 LG 세이커스 시절

새롭게 부임한 창원 LG에서 먼저 현주엽을 FA 영입하면서 새 출발을 시도했지만,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오히려 6강 PO에서 탈락하면서 체면을 구겼다. 절치부심한 신선우는 2006-07 시즌 개막 전에 전자랜드와 시간차 트레이드를 단행하면서 대대적으로 팀을 갈아엎었다. 시간차 트레이드란 조상현을 FA로 영입하는 과정에서 보상선수를 내주지 않기 위한 일종의 꼼수인데, 조상현의 보상선수 지명이 있기 전에 먼저 선수 3명을 전자랜드로 현금을 보내고 얻은 후, 조상현의 보상선수 지명이 있은 후 트레이드 시장이 다시 열리자 1+현금:4로 트레이드를 해서 결과적으로 4:4 트레이드를 한 것이다. 이로 인해 조상현의 원 소속팀인 KTF는 보상선수로 전년도 평균득점 0.9의 임영훈을 지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 트레이드는 신선우의 꼼수의 극한을 보여준 트레이드로 평가된다.(...)

어쨌든 이렇게 트레이드와 FA 영입으로 전력을 보강하고 외국인 선수도 찰스 민랜드를 다시 데려오고, 파스코라는 괜찮은 센터를 데려오면서 전력을 강화, 2006-07 시즌에는 정규 시즌 2위를 기록하면서 챔프전 진출을 노렸다. 하지만 4강 PO 3차전에서 상대의 거친 수비에 말린 파스코가 심판을 폭행하는 초유의 사태에 휘말리면서 퇴출, 결국 PO에서 탈락하기에 이르렀다.

LG가 신선우를 데려온 이유는 우승을 해 달라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다소 무리할 정도로 선수 영입에 올인한 상황에서 2007-08 시즌을 맞았고, 여기서 29승 25패로 선전했지만 이 해는 동부의 독주와 모비스, 오리온스가 초반부터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전반적으로 승수들이 높은 시즌이었다. 간신히 6위로 PO 진출에는 성공했지만, 삼성에게 0:2로 패하면서 탈락. 그리고 LG는 우승이라는 목표가 어긋나자 신선우와 결별하기에 이른다.

3.4. 서울 SK 나이츠 시절

잠시 야인으로 있던 신선우는 몰락을 거듭하던 SK의 새 감독으로 2009-10 시즌에 중도 부임했다. 하지만 SK의 전력 자체는 화려한 이름값을 가진 선수들은 많았지만 그걸로 끝이었고, 신선우 자신도 이를 팀으로서 재조합하는데는 끝내 실패했다. 프로농구 정규시즌 최다승에 빛나는 감독이었지만 SK에서의 신선우는 현대 시절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고, 결국 2009-10 시즌 도중에는 전임 김진 감독의 연패 기록을 그대로 이어가 구단 최다인 12연패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 2010-11 시즌에서도 이렇다 할 전력 향상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20승 34패로 무너졌고, 2010-11 시즌을 끝으로 자진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그래도 신선우가 남긴 유산이 있다면 황금의 드래프트라는 2011 드래프트에서 김선형을 뽑았다는 점이 있지만, 그걸로 끝이라는 것이 문제다. 어쩌면 이 LG와 SK에서의 잇따른 실패 때문에 신선우 감독을 보는 시선이 과거보다는 좀 더 냉정해졌는지도 모른다.

SK에서의 실패 후에는 KBL 기술위원장과 WKBL 전무이사를 맡아 행정가로 활동 중이다. 최경환 총재가 기획재정부 장관(경제부총리)으로 취임과 함께 명예총재로 물러나면서 총재대행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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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2014년 7월 前 최경환 총재가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신선우 전무이사가 총재대행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