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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매튜스

last modified: 2015-02-27 14:06:21 Contributors


드리블의 마법사[1]


이름 스탠리 매튜스 경
(Sir Stanley Matthews, CBE)[2]
생년월일 1915년 2월 1일
사망년월일 2000년 2월 23일
국적 잉글랜드
출신지 핸리(Hanley)
포지션 아웃사이드 라이트
신체조건 175cm / 71kg
등번호 7
소속팀 스토크 시티 FC (1932~1947)
랙풀 FC (1947~1961)
스토크 시티 FC (1961~1965)
국가대표 54경기 / 11골(1934~1957)
감독 포트 베일(1967~1968)

1956 Ballond'or
수상
스탠리 매튜스
2위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3위
몽 코파


Contents

1. 선수 생활
1.1. 초기 선수 생활. 스토크 시티
1.2. 랙풀 FC
1.3. 친정팀 복귀
2. 은퇴 후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3.1. 전설 중의 전설
4. 여담
5. 수상
5.1. 클럽
5.2. 국가대표
5.3. 개인

1. 선수 생활

1.1. 초기 선수 생활. 스토크 시티

스탠리 매튜스는 1915년 2월 1일. 스토크 인근의 핸리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프로복서였는데, 아들을 강하게 키우고픈 마음에 복싱 풋워크를 가르쳤다. 그런데 이것은 나중에 스탠리 매튜스의 프로 생활에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고.. 이 풋워크로 인해 13살의 매튜스는 주위의 아이들과 비교했을 때 운동 능력에 있어 크게 두각을 나타내었다. 이런 매튜스를 노린 수많은 클럽들이 있었지만, 매튜스는 1929년 나이 14살에 당시 2부 리그에 속해 있던 고향팀 스토크 시티과 주급 1파운드짜리 계약을 맺었는데 이 계약에는 당시 스토크 시티의 감독 톰 마서가 매튜스의 아버지를 지극정성으로 설득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스토크 시티의 리저브 팀에 소속된 매튜스는 얼마 안가 번리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렀고, 이 경기를 지켜본 아버지는 매튜스에게 평소대로 현실적인 충고를 던졌다.

나는 네가 더 좋은 플레이를 한 것을 보았지만, 네가 더 나쁘게 플레이한 것 역시 보았다.

이 말은 매튜스의 가슴에 남아 그의 플레이에 있어 일희일비하지 않게 하는 일종의 브레이크 역할을 했다. 1931~32 시즌에는 리저브 팀에서 22경기에 출전하며 자신의 입지를 넓혀가기 시작했는데, 이 당시에는 자신의 포지션을 정하지 못하여 레프트 하프 등 수비수로 뛰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매튜스는 이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수비수들이 플레이하면서 가질 수밖에 없는 약점들을 파악하여 자신만의 드리블을 완성해냈고, 그의 재능은 더욱 일취월장하였다.

이어 1932년 17세의 나이에 주급을 5파운드로 올리면서 정식 프로 계약을 맺었고, 그 시즌에서 데뷔전을 치뤘다. 데뷔전의 상대는 번리 FC였는데, 시합에서는 1:0으로 이겼지만 매튜스는 여기서 상대 선수들이 얼마나 거칠고 더럽게 플레이하는지를 깨달았고, 여기서 살아남을 방도를 깨달았다고 회고했다. 매튜스는 경험을 쌓아가면서 훈련에 매진하였는데, 그의 팀 동료와 의견 차이 때문에 싸우기도 했었다. 사유는 팀 동료가 골프치러 가자는 것을 매튜스가 거절해서...

예나 지금이나 스토크 시티는 뭐 하나 볼 건덕지 없는(...) 약체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는데, 매튜스가 1군에 합류한 1932~33 시즌 스토크 시티는 곧바로 토트넘을 1점차로 따돌리면서 2부 리그 우승과 함께 1부 리그[3]로 진입하였다. 그리고 이 시즌 종반 무렵, 매튜스는 지역 라이벌 포트 베일을 상대로 데뷔골을 넣기도 하였다.

1부 리그에 올라간 스토크 시티는 중위권 언저리에서 놀았지만 매튜스의 기량은 빛났다. 매튜스는 1부 리그 데뷔 시즌인 1933~34 시즌에 총 33경기에 출전하여 15골을 넣었는데, 의외로 이것이 매튜스의 커리어 하이 골 기록이다. 이 활약을 바탕으로 1934년 9월에 꿈에 그리던 대표팀 유니폼을 입는데에도 성공했고, 아웃사이드 라이트 포지션에도 정착하는데에 성공한다.

결국 1935~36 시즌에 스토크 시티는 매튜스를 앞세워 리그 4위로까지 점프하는데 성공한다.[4]약관의 플레이어가 팀을 1부로 승격시킨 것은 물론이요, 1부 4위까지 끌어올렸다는 말도 크게 과장된 것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도 1937년에 매튜스가 처음 팀을 떠난다는 소식이 언론에 퍼지자 3000여명이 넘는 팬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반대시위를 벌였을 정도라니..[5]

1937년 12월 런던에서 열린 체코슬로바키아와의 A매치에서 매튜스는 대형사고를 치고 만다. 1명이 퇴장당한 상황에서 싸워야 했던 경기의 최종스코어는 5-4. 약관을 갓 넘긴 스탠리 매튜스는 종가의 심장에서 해트 트릭을 달성했고, 덕분에 잉글랜드는 승리를 챙겼으니 자연 잉글랜드 전역에 명성이 떠르르 울려퍼졌다. 그리고 1938년의 유럽 원정길, 특히 독일에서는 잉글랜드 선수들이 유화책으로 나치식 경례를 할 것을 제안받기도 했다. 결국 정치적 싸움으로 번지게 하기 싫어서 마지못해 경기 전에 경례를 하기는 했지만 매튜스를 포함한 잉글랜드 선수들은 이에 크게 반발하였고, 경기는 6:3으로 잉글랜드가 승리하였다.

이후 제 2차 세계대전 동안 공군에서 복무하며 커리어에 잠시 휴식기를 둔 매튜스는 다시 축구계에 복귀하였지만 버든 파크 참사[6]의 아픔을 겪게 된다. 매튜스는 유가족들에게 30파운드를 전달했지만 이것으로 인해 트라우마가 생겼다. 결국 나이 30줄을 넘기고 매튜스는 팀에 다시 이적 요청을 하였고, 팀은 이를 받아들였다. 매튜스가 선택한 팀은 전쟁 당시 군복무를 했던 지역을 연고로 하는 랙풀 FC였다.

1.2. 랙풀 FC

2010-11 시즌 블랙풀의 행보를 지켜본 축구팬은 알겠지만, 블랙풀 역시 스토크 시티와 다를 것 없는 약소팀이었다. 당시도 마찬가지였고 1부 끝자락과 2부를 왔다갔다하느라 바쁘던 팀이었는데, 그런 팀이 매튜스가 합류한 1947-48시즌에 곧바로 FA컵 결승전까지 올라간다. 비록 상대였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패배(2-4)하긴 했으나 지금 생각해도 블랙풀로서는 기적에 가까운 성적이었다. 당시 블랙풀의 감독이었던 조 스미스[7]는 매튜스를 중심으로 팀을 맞춰주었고, 매튜스에게 피치의 모든 권한을 일임하다시피 했다. 그렇기에 해당 시즌에 최초로 제정되었던 FWA 올해의 선수상의 첫 수상자가 스탠리 매튜스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잉글랜드 1부 리그가 제정한 최초의 시즌 MVP가 된 것이다.

이후 1부 리그 잔류는 물론이요 1950-51시즌 다시 한 번 FA컵 결승에 팀을 이끌었다, 하지만 뉴캐슬의 재키 밀번의 두 골에 밀려 다시 준우승.. 그리고 1955-56시즌 최종성적은 1부리그 2위. 블랙풀 클럽 역사상 가장 높은 곳에 올라 본 성적이다. 신예 라이트 백 미 암필드와 함께 한 오른쪽 측면은 당시 어떤 팀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으며 당시가 되었던 지금이 되었든 블랙풀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못 했을 성적이었으니 블랙풀 팬들로서는 눈물까지 흘릴만한 발전이었고 그들에게 스탠리 매튜스는 영웅 그 자체였다. 그리고 매튜스와 블랙풀 커리어의 하이라이트...

블랙풀은 1952-53시즌 다시금 FA컵 결승전에 오른다. 상대는 볼턴 원더러스였는데,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동료이자 신예 스트라이커였던 로프트하우스와의 맞대결로도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후반 15분 정도가 되었을 때의 스코어는 1-3. 천지가 개벽할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블랙풀이 승리할 일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천지가 개벽했다.

스탠리 매튜스의 스피드 그리고 시대를 앞서갔던 드리블과 절묘한 패스는 기세등등하던 볼턴 수비진의 틈을 노리기 시작했고, 후반 23분에 그 첫 결실이 나왔다. 매튜스는 치고 달리기로 볼턴의 왼쪽 측면을 파고들다가 크로스를 날렸는데 그 크로스를 볼턴의 골키퍼 스탄 한센이 놓치고 말았고, 뒤에 있던 스탄 모르텐슨이 밀어넣어 추격의 불씨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경기 종료 직전, 블랙풀이 프리킥을 얻어냈고 스탄 모르텐슨이 키커로 나섰다. 모르텐슨은 강력한 킥으로 골을 성공시켰고 해트 트릭을 완성하였다. 그렇게 스코어는 3-3 동점이 됐다. 그리고 인저리 타임, 볼턴의 왼쪽 측면을 초토화시키던 매튜스는 다시 한 번 볼턴의 수비수 랄프 뱅크스를 순간 스피드로 제치고 기막힌 패스를 찔러넣어 주었다. 그 패스는 아웃사이드 레프트 빌 페리의 발에 걸렸고 상황은 종료됐다. 최종스코어 4-3.

블랙풀의 클럽 역사상 처음이자 현재까지 마지막인 우승 타이틀이었고, 매튜스의 승리였다. 종가의 상징인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세계 최고(最古)권위를 자랑하는 잉글랜드 FA컵 파이널 무대에서, 해트 트릭까지 기록하여 역전승의 발판을 마련한 센터 포워드 스탄 모르텐슨의 활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경기는 현재까지 “매튜스 파이널(The Matthews Final)”로 불린다. 그리고 그 때 그의 나이, 38살이었다. 이때부터 매튜스는 그야말로 나이를 거꾸로 먹기 시작한다.


“The Matthews Final”

그리고 상술했던 1955-56시즌. 유럽 최강자를 가리자는 취지의 유러피언 컵 이 처음으로 기치를 올린 시즌이었고, 그에 발맞춰 프랑스풋볼紙가 선정하는 올해의 선수상, 즉 발롱도르가 처음으로 제정된 시즌이었다.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축구판 최고의 영예를 최초로 차지한 플레이어가 바로 나이 40살의 스탠리 매튜스다.[8] 당시 매튜스와 함께 최종후보 3인에 오른 플레이어들을 보면 더욱 입이 벌어진다. 한 명은 바로 그 유명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Alfredo Di Stefano)[9]였고, 또 한명은 프랑스의 원조 레전드 플레이어라 불리던 이몽 코파(Raymond Copa)였다. 심지어 이 둘은 해당시즌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레알 마드리드 VS 랑스)에서 맞붙은,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톱 플레이어였다.

최초의 유럽 챔피언 타이틀을 놓고 겨루던 두 클럽의 에이스를 뒤로 하고 잉글랜드 리그 2위에 간신히 턱걸이한 블랙풀의 나이 40 스탠리 매튜스에게 갓 만들어진 황금공이 돌아간 것이다. 이는 그야말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혹자는 "나이 40 먹은 대선배에 대한 예우다"라는 드립을 치는데 물론 그런 면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를 공로상 정도로 폄하하는 것은 잘못이다. 특히 해당년도에는 월드컵도 없었으며 그만큼 사람들의 모든 눈은 첫 발족된 챔스로 몰려있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프랑스풋볼이 축구종가 잉글랜드의 눈치를 봤다는 소리도 있다. 이것 역시 뻘소리일 수밖에 없는 게,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관계도 관계지만 발롱도르는 FIFA 발롱도르로 통합되기 이전에는 기자단 투표로 선정되었다.[10], 특히나 당시 잉글랜드는 월드컵 광탈, 가리에게 홈에서 3-6으로 처발린 것[11] 등으로 인해 FIFA의 눈치나 보던 눈물나는 상황이었다. 이는 당시의 스탠리 매튜스에게 디 스테파노나 코파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밖에 설명이 안 된다.

스탠리 매튜스는 1961년, 스토크 시티 복귀를 선언한다. 1961년 시즌 아스날과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블랙풀에서 440경기 출전의 기록을 남겼다.

1.3. 친정팀 복귀

매튜스가 선수 생활의 황혼기에 친정팀으로 복귀한 이유는 2부 리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친정팀의 처지를 가엾게 여긴 영향이 크다. 스토크 시티는 매튜스가 블랙풀로 떠난 때를 기점으로 날개 없이 추락했다(...). 그와 함께한 마지막 시즌이던 1946-47시즌 리그 4위에 오른 스토크 시티는 다음 시즌 15위로 곤두박질쳤다. 이후 10위권 이내는 어림도 없을 만큼 바닥을 떠돌았고 급기야 1952-53시즌, 그러니까 매튜스가 블랙풀을 이끌고 FA컵에서 우승할 동안 스토크 시티는 결국 22개 팀 중 21위라는 처참한 성적으로 강등당하고 말았다. 그리곤 내내 2부 신세였다. 사실 운동선수로는 할아버지뻘인 46살 스탠리 매튜스의 복귀로 뭐가 달라질까 싶었던 전력이었다. 그런데...

1960-61시즌 2부에서도 18위에 그쳤던 스토크 시티는 매튜스의 합류와 동시에 1961-62시즌 8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다음 시즌, 놀랍게도 매튜스의 스토크 시티는 2부 리그 챔피언이라는 전리품을 들고 당당히 1부로 복귀한다. 1962-63시즌 FWA 올해의 선수상이 48살의 2부 리거 스탠리 매튜스에게 돌아간 배경이다.

그 하이라이트는 그의 50회 생일이 얼마 지나지 않았던 1965년 4월, 축구인으로서는 최초로 기사 작위(Knight Bachelor)를 받는 상징적 대목에 이르게 된다. 오오 SIR!!

이렇게 나이를 잊은 전설 스탠리 매튜스는 50살에 공식적으로 필드를 떠났다. 그런데 은퇴한 그 후로도 필드를 잊지 못하고 플레잉 코치로 몇년 더 뛰었다니, 참 답이 안 나오는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스토크 시티는 그의 공적을 기리는 의미에서 은퇴 경기를 열어주었는데 매튜스 팀과 세계 올스타 팀의 경기로 치러졌다. 그런데 여기에 모인 선수들의 이름값이 꽤나 짱짱했다.
매튜스 팀에는 미 암필드, 니 헤인스, 니스 로, 미 그리브스, 보비 찰튼, 이 윌슨, 저 헌트 등 역대 최고의 영연방 선수들이 주축이 되었고, 세계 올스타팀은 더 좋았다. 레프 야신, 하인츠 슈넬링어, 세프 마소푸스트, 백스터, 이몽 코파,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페렌츠 푸스카스, 에우제비우(...) 후보에 우베 젤러, 프강 오베라트, 프란시스코 헨토, 디슬라오 쿠발라 등이 있었다.
경기는 올스타 팀이 6대 4로 이겼으며, 경기가 끝난 후 푸스카스와 야신의 어깨에 올라타 필드를 돌았다.


은퇴 경기에서의 스탠리 매튜스


2. 은퇴 후

친정팀 스토크 시티의 라이벌 중 하나인 포트 베일에서 감독을 맡기는 했지만 시원치 않아서 금방 잘리고 말았다.


1998년, 1953년 FA컵과 함께(가운데 인물)

하지만 스토크 시티와 블랙풀에서 워낙 상징성이 큰 인물이다 보니 스토크 시티에서는 회장, 블랙풀에서는 명예 부회장의 직함을 주었다.

스탠리 매튜스는 2000년 2월 23일에 사망하였는데 이 때 공교롭게도 잉글랜드 대표팀아르헨티나와 친선경기가 예정되어 있던 날이었고 매튜스의 부고는 경기 시작 직전에 방송되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보비 찰튼 찰튼 형제, 든 뱅크스, 냇 로프트하우스, 톰 피니 등 축구 원로들이 참가하였고, 그 외에도 10만이 넘는 조문객들의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스탠리 매튜스의 포지션상 위치는 당시 용어로 오른쪽 아웃사이드 포워드(Outside Forward)[12]였다. 처음 축구판에의 주를 이룬 포메이션 기조는 2-2-6 같은(...) 극단적인 공격축구로 시작되었지만 이건 19세기 시절 이야기이고, 그나마 20세기 초엽의 몇 차례 수정을 거친 것이 피라미드 또는 메토도라 불리는 2-3-5 포메이션이었다, 즉, 1명의 센터 포워드와 그 밑에서 센터 포워드와 함께 공격을 풀어나가는 역할의 인사이드 포워드, 그리고 다시 양쪽 측면으로 1명씩의 아웃사이드 포워드가 위치하는 그림이다. 즉 현대식으로 치환하면 4-4-2나 4-2-3-1 포메이션의 측면 미드필더라 보면 거의 들어맞는다.


대충 이런 식. 중앙에 위치한 하프백이 그 유명한 포지션인 센터하프 되시겠다.

그리고 스탠리 매튜스는 이전 그리고 동시대에 활약했던 수많은 아웃사이드 포워드 중에서 언터처블 그 자체였고, 현대축구에서 칭하는 윙어의 개념을 확립시킨 플레이어라 평가받는다. 현대 축구판에서 윙어로서 가장 필요한 개념이라 꼽히는 드리블 돌파력과 정확한 크로스에 있어서 스탠리 매튜스는 당대 최강이었다고 회자된다. 공 좀 몰고 다닌다는 선수를 흔히 일컫는 드리블의 마술사라는 찬사를 최초로 받은 플레이어라는 기록도 남아 있다.

상술했던 포메이션에서 드러났듯 닥돌이 대세였던 초창기 축구에서 그는 자신의 템포는 물론 경기 자체의 완급을 조절할 줄 아는 드리블러이자 플레이메이커였다. 이런 선수가 스피드까지 빨랐으니... 이렇듯 그에게는 최초의 현대판 윙어이자, 세계축구의 기조를 완급조절과 중앙에서의 허리싸움으로 바꾸게 만든 최초의 플레이어라는 평가도 따른다.

우리에게 축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준 사람
펠레

잉글랜드 축구史에 있어 그보다 위대한 플레이어는 없다.
- 든 뱅크스[13]

게임에서 거의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다.
프란츠 베켄바워

내가 본 최고의 크로서 – 그리고 그는 낡고 무거운 공과 싸워야만 했다.
찰스

그는 모든 것을 가졌다. 좋은 컨트롤과 훌륭한 드리블 능력, 그리고 빛과 같은 스피드까지.. 또한 어떻게 패스할 줄도 아는 현명한 선수였다.
니 자일스

3.1. 전설 중의 전설

시대를 앞서나간 드리블 스킬, 말 그대로 전방 공격수에게 "갖다 떠 주는" 패스, 마치 숨쉬듯이 경기 자체의 완급을 조절할 줄 아는 플레이메이킹, 팀이 위기에 처했을 때 분위기를 뒤바꿔 버리는 한방 등, 측면에서만 플레이하지 않고 중앙에서도 플레이하고 때로는 포지션 스위칭까지 해치웠던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재능의 토털 패키지라 불리던 선수...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그가 활동하던 당시의 인프라이다. 말도 안되는 무게에 반발력 최악인 축구공, 무거운데다 착화감 최악의 빳빳한 축구화를 신고 방목장을 연상케하는 필드에서 차원이 다른 테크닉을 선보였으니 그의 축구센스는 가히 시대를 초월하는 경이 그 자체였다.

단지 이것만으로 스탠리 매튜스라는 선수의 설명이 끝난다면 전설 위에 군림한 전설이라는 무시무시한 찬사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 이후에 매튜스 이상의 드리블러나 플레이메이커들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스탠리 매튜스라는 선수는 자신의 그 능력을 나이 50세에 이르는, 아니 은퇴하는 그 순간까지 계속해서 갈고닦던 노력형 천재였고[14], 당시로서는 "그게 필요한거임?"이란 소리를 들었던, 그러나 현대축구에서는 선택 아닌 필수인 식단을 통한 컨디션 조절을 앞서 행하던 선수였다. 더불어 30년이 넘는 현역시절 동안 옐로카드 한 장 조차 받지 않은 훌륭한 인품과 멘탈을 지닌 선수였다.[15] 그렇기에, 말 그대로 "아들뻘 되는" 어린 선수들과 함께 뛰고 또 그들을 상대하며 물러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노력하는 천재를 감히 누가 막겠는가.

종목을 막론하고 프로 선수에게 '스탯'이라는 기록은 뗄 수 없는 꼬리표 같은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솔직히, 스탠리 매튜스 역시 스탯만 따지고 본다면 딱히 내세울 것이 없다. 길고 긴 프로생활 동안 넣은 골이라고는 71골 뿐이며 국가대표에서도 11골이 전부다. 다만 측면 미드필더라는 포지션 특성상 골 수가 많지 않은 것은 한편으론 당연하며, 예나 지금이나 축구에서 어시스트 수는 딱 부러지게 집계하기 힘들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막연한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다. 개사기 어시기계였을지도

하지만 커리어 내내 보여준 그야말로 전설적인 행보를 되짚어보면 그에게는 스탯만으로는 평가할 수 없는 무언가Someting Invisible... 가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게르트 뮐러와 같은 스탯만으로 설명이 가능했던 전설이 있는 반면, 스탯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레전드도 얼마든지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하는 부분이다. 적절한 예시가 보고 싶다면 지네딘 지단이나 라이언 긱스의 스탯을 보라.

무엇보다, 앞서 적었듯이 당대 최강의 플레이어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이몽 코파마저 한 수 접어야 했던 스탠리 매튜스의 그 포스는 5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들로서는 피부에 와 닿지 않지만, 그를 직접 보고 그와 함께 플레이했던 동시대 사람들은 다름아닌 스탠리 매튜스를 선택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스탯은 장식에 불과합니다 피파위닝 세대는 그걸 몰라요


4. 여담

  • 스탠리 매튜스가 처음 대표팀 생활을 시작할 무렵인 1934년에 이탈리아와의 시합에 참가하여 어시스트를 기록하였다. 스탠리 매튜스는 이 시합에 참가한 선수 중 가장 어린 선수였으며 이 시합은 하이버리의 전투라 불리는 격렬한 경기로 더욱 유명하다.
  • 1985년, 나이 70이던 스탠리 매튜스는 브라질 레전드들과의 친선경기에 참가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연골 부상을 입었다.


5. 수상

5.1. 클럽

FA컵 우승 1회: 1953(이상 블랙풀)
1부리그 준우승 1회: 1955-56(이상 블랙풀)
FA컵 준우승 2회: 1948, 1951(이상 블랙풀)
2부리그 우승 2회: 1932–33, 1962–63(이상 스토크 시티)

5.2. 국가대표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우승 9회: 1935, 1938, 1939, 1947, 1948, 1950, 1952, 1954, 1955

5.3. 개인

발롱도르 1회: 1956
FWA 선정 올해의 선수 2회: 1948, 1963
대영제국 훈장 3등급(CBE): 1957
기사작위(Knight Bachelor): 1965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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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 사진은 1965년. 즉, 스탠리 매튜스가 50세이던 시절의 사진이다. 유니폼을 입고 있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겠지만 이때도 현역이었다
  • [2] 1957년 대영제국 훈장 3등급(CBE)을 수훈하고, 1965년 Knight Bachelor(기사작위)에 서임되었다.
  • [3]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 [4] 안타깝지만, 이때의 리그 4위가 스토크 시티가 1부 리그에서 세운 역대 최고의 성적이다. 그만큼 예나 지금이나 스토크 시티의 전력이 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다
  • [5] 사실 매튜스는 우승을 원했는데 스토크 시티의 성적이 떨어져서 매튜스가 참지 못하고 이적 요청을 먼저 했었다. 하지만 팬들의 성원에 매튜스는 팀에 남기로 결정했지만 결국 이는 블랙풀 이적의 불씨가 되고 만다
  • [6] 헤이젤 참사힐스버러 참사의 원조격인 사고. 1946년 3월 9일, FA컵 8강 2차전에서 있었던 일로 볼튼 원더러스의 홈구장에 8만 5천의 인파가 모여들었고, 경기가 시작되면서 경기장에 들어가지 못한 팬들이 경기장에 밀어닥치면서 방벽이 무너져 33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이다. 사망자의 대부분은 볼튼팬이었다
  • [7] 블랙풀에서 23년간 감독 생활을 하였다
  • [8] 당연한 이야기지만 매튜스는 역대 최고령 발롱도르 수상자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 역시 축구계에서 불멸의 기록 중 하나로 손꼽히는데 일단 40살까지 팀에서 주전급으로 활약했던 선수가 몇 명이나 되는지 생각해보자
  • [9] 당시 투표 결과는 매튜스가 47점, 디 스테파노는 44점으로 상당히 박빙이었다
  • [10] 각국 팀의 감독과 주장들이 투표하던 것은 1991년부터 수여되기 시작한 피파 올해의 선수상으로, 이 구성 차이 때문에 올해의 선수상은 인기투표 취급을 받아야 했다
  • [11] 더구나 매튜스 역시 이 경기에 출전했었다
  • [12] 세월이 흐르면서 축구 전술이 변하고 그에 맞춰 포지션의 임무가 변하면서, 어떤 포지션을 가리키는 단어가 시대마다 뜻이 달라진다. 하지만 초창기에는 글자 그대로 의미밖에 없었다. 막말로 '맨 앞줄 한가운데 놈' '맨 앞줄 끄트머리 놈' '맨 앞줄 끄트머리보다 안쪽 놈'이런 식으로 붙인 것이다
  • [13] 1966년 잉글랜드의 첫 월드컵 우승의 주역이자, 잉글랜드 역대 최고의 골키퍼로 꼽히는 레전드.
  • [14] 블랙풀에서 뛰던 당시 그는 스피드의 향상을 위해 신발에 납덩이를 붙이고 조깅을 하였다
  • [15] 스탠리 매튜스는 선수 생활 도중은 물론이고 은퇴 후에도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에 직접 날아가서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무료로 축구를 가르쳐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