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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스 카터

last modified: 2015-04-12 11:55:56 Contributors


멤피스 그리즐리스 No.15
빈스 카터(Vincent Lamar Carter)
생년월일 1977년 1월 27일생
198cm (6 ft 6 in)
체중 100kg (220 lb)
포지션 슈팅가드/스몰포워드
드래프트 1998년 드래프트 1라운드 5순위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 지명
역대 소속팀 토론토 랩터스(1998~2004)
뉴저지 네츠(2004~2009)
올랜도 매직(2009~2010)
피닉스 선즈(2010~2011)
댈러스 매버릭스 (2011~2014)
멤피스 그리즐리스 (2014~ )
등번호 15번
25번
수상내역 NBA Rookie of the Year (1999)
NBA All-star 8회 (2000-2007)
All-NBA Second Team (2001)
All-NBA Third Team (2000)
NBA All-Rookie First Team (1999)
NBA Slam Dunk Contest champion (2000)


1999년 NBA 올해의 신인상
팀 던컨 빈스 카터 튼 브랜드

Contents

1. 개요
2. 대학시절
3. NBA 커리어
3.1. 토론토 랩터스 시절
3.2. 뉴저지 네츠 시절
3.3. 올랜도 매직 & 피닉스 선즈 시절
3.4. 댈러스 입단
4. 기타 등등

2000년 NBA 슬램덩크 컨테스트 우승자
올스타전이 열리지 않음[1] 빈스 카터 데스몬드 메이슨

1. 개요


역사상 최고의 덩크 슈터

NBA의 농구선수. 덩크 슛의 달인으로 공중에서 예술을 했던 사나이. 한때 포스트 조던 에 가장 근접한 선수였다. 별명은 토론토 시절에 에어 캐나다 그 외에는 Vinsanity, '''Half-Man/Half-Amazing 등이 있다.

2. 대학시절


1995년. 맥도날드 올 아메리칸에 선정되는 등 고교시절에도 촉망받는 유망주였던 빈스 카터는 많은 대학에 러브콜을 받았다. 그중 카터는 마이클 조던이 다녔던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같이 입학한 선수로는 現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파워포워드 안장로앤트완 재미슨도 있었다.

대학시절 견실한 활약과 또한 그때도 주체할수 없었던 엄청난 운동능력과 점프력으로 뽑아내는 덩크는 일품이었다. 그리고 프로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수비력도 대학에서 어느정도 인정 받았었다. 다만 동료였던 앤트완 재미슨이 대학시절 상이란 상은 모조리 휩쓴 전미 최고의 대학선수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는 저평가 받았었다.

주전으로 2시즌 활약하면서 2년 연속 파이널 4를 경험한 빈스 카터는 앤트완 재미슨과 함께 1998년 드래프트 참가신청을 했고 전체 5순위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 지명된다. 하지만 바로 앞에 앤트완 재미슨을 4순위로 지명한 토론토 랩터스와 워리어스가 트레이드를 성사시키면서 카터는 토론토에 입단하게 된다.

3. NBA 커리어

3.1. 토론토 랩터스 시절


대학시절에는 앤트완 재미슨에게 가려졌지만 프로 첫 시즌만큼은 달랐다. 비록 단축시즌으로 치뤄진 시즌이었지만 카터는 공중을 날라다니면서 팬들을 매료시켰다. 토론토 팬들은 경기장을 찾기 시작했고, 카터 덕분에 관중석은 언제나 매진이었다. 오죽했으면 방송사가 예정에도 없던 토론토 랩터스의 경기를 추가 편성했을 정도였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그 곳은 캐나다다. 아이스하키 NHL과 직접적으로 시즌이 겹치고 거기다 파업직후라는 악재가 터진 NBA의 캐나다 팀이다. 그런 안좋은 사정의 토론토 랩터스를 끌어올린 것은 빈스 카터의 미칠듯한 쇼타임 덩크쇼였다.

토론토 팬들은 카터에게 애정과 환호를 보내주었고, 그에게 에어 캐나다라는 멋들어진 별명을 붙여주었다. 언론도 포스트 조던으로 그를 지목하면서 열심히 설레발을 쳤다. 98-99시즌 올해의 신인상은 당연히 그의 몫이었다.

99-2000 시즌. 처음으로 풀타임 시즌을 소화하는 첫 시즌에 카터는 대부분의 기록에서 상승세를 기록했다. 무엇보다 3점슛을 장착하면서, 내외각에서 도저히 막을수 없는 언터쳐블한 선수가 돼버린 것이다.

카터는 2년차 시즌만에 올스타전에 동부팀 주전으로 선발되었고 바로 그해 슬램덩크 챔피언으로 등극했다. 올스타전만 하더라도 쟁쟁한 선수들을 모두 제치고 최다득표로 선발되었다. 그의 당시 인기가 어느정도였는지 알수 있는 대목. 무엇보다도 슬램덩크 콘테스트를 부활시킨 장본인이었다. NBA가 얼마나 카터를 밀어주었는지 알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더 이상의 새로운 덩크는 앞으로 나오기 힘들 것"이라는 몇몇 이들의 전망에도 불구하고[2] [3], 카터는 부활한 슬램덩크 콘테스트에서 지금도 회자되는 전대미문의 덩크를 연이어 선보이면서 우승했다.

토론토는 빈스 카터의 활약을 앞세워 99-00시즌에 팀 창단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발을 들였다. 비록 3게임만에 광속으로 탈락했고, 빈스카터 역시 정규시즌보다 거친 플레이오프 무대에서 고전했지만, 팬들은 카터에게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카터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비록 기존의 드림팀에 비해 2000년도의 드림팀4는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아슬아슬하게 이기는 경기도 많았으나, 전승으로 금메달을 차지했다. 카터는 팀내 최다득점을 올리며 활약했다.

특히 프랑스와의 경기에서 프랑스팀의 센터 프레드릭 와이즈(키 2m18cm)를 뛰어넘어 슬램덩크를 작렬해 전 세계 농구팬들을 경악시켰다. 그때 같이 국가대표팀에 뛰었던 제이슨 키드는 "내가 본 플레이중 가장 최고." 라고 극찬했고, 프랑스 언론은 이를 두고 le dunk de la mort 즉 죽음의 덩크 라고 표현했다.

후에 대한민국을 방문했을때 인터뷰 중 이 일을 언급했는데, 어떻게 저런 덩크를 했냐는 질문에 "사실은 나도 잘 모르겠다. 당시에는 너무 정신이 없었다. 정말 어쩌다가 하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나중에 195cm 정도 되는 선수를 세워놓고 다시 시도해봤는데 실패했다. 나중에 다시 하라고 하면 아마 못할것." 이라고 밝혔다.


현재까지도 회자되는 에어 캐나다의 죽음의 덩크

2000-2001 시즌에는 팀을 컨퍼런스 세미파이널까지 올리면서 더욱더 인기가 치솟았다. 이 성적은 토론토가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성적 중 현재까지도 제일 좋은 성적이었다. 컨퍼런스 세미파이널 상대는 당시 동부최강 필라델피아였고, 그곳의 에이스는 앨런 아이버슨이었다. 둘은 이미지가 많이 달랐다. 아이버슨의 경우 악동의 이미지가 좀 있었는데 반해 빈스 카터는 깨끗한 이미지의 스타였다. 이 시리즈는 7차전까지 가는 대 접전이었다.

하지만 7차전을 앞두고 카터는 병크를 하나 터트렸는데, 7차전 당일에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졸업식이 있었다. 카터는 이 졸업식에 가고 싶어했는데, 당시 반응은 '''지금 팀이 컨퍼런스 결승에 가느냐 못가느냐 갈림길에 놓여있는데 너님 지금 제정신??'ㅅ 이었으나 카터는 끝내 전용비행기를 타고 졸업식에 참석했다. 7차전에서 카터는 야투부진으로 고생했고, 경기종료를 얼마 안남기고 던진 회심의 3점슛이 실패하면서 패배의 원흉이 되었다. 이 일로 인해 카터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물론 저 졸업식에 참석한게 7차전 부진의 원인이 될수는 없었지만.

카터는 01-02 시즌부터 부상으로 고생해야 했다. 60게임만에 시즌아웃 하면서 기록도 대폭 하락했다. 그 다음시즌은 아예 시즌의 절반가량을 날려먹으면서 또 개점휴업해야만 했다. 카터는 이때쯤부터 조금씩 폭발적인 운동능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더군다나 구단과 갈등의 조짐도 보였다.

04-05시즌. 카터는 정말 그답지 않은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그동안 부상을 많이 당했다고는 하나 이 정도까지 부진할꺼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언론과 팬들은 카터와 랩터스 구단과의 갈등으로 인해 카터가 태업을 하는게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실제로 카터는 경기중에 상대팀에게 자기팀 작전을 얘기하기도 하는 등(...) 정말 태업이 의심될만한 행동을 했다. 결국 랩터스도 카터를 포기하기로 마음먹고 마침 슈퍼스타의 영입이 필요했던 뉴저지 네츠와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뉴저지는 두개의 1라운드 지명권과 알론조 모닝, 아론 윌리엄스, 에릭 윌리엄스를 내주는 조건으로 카터를 받아왔다. 카터는 트레이드 된 후의 인터뷰에서 "열심히 하지 않았다." 라고 발언하면서 또 랩터스 구단과 팬들의 어그로를 끌었다. 한때 에어 캐나다, 토론토의 상징이었던 선수는 이렇게 씁쓸하게 자신의 첫 소속팀과 인연을 끊고 말았다.

3.2. 뉴저지 네츠 시절


뉴저지 네츠는 지난 2년간 파이널에 진출했던 그 전력이 아니었다. 캐년 마틴의 이적. 리차드 제퍼슨이 잘 나가다가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거의 제이슨 키드가 혼자서 팀을 이끌어야 할 판이었다. 네츠 구단도 키드가 불만을 터트리기 전에 잽싸게 카터를 영입했고 이는 좋은 선택이었다. 카터는 키드라는 리그 최고의 포인트가드의 지원을 등에 업고 다시 활약했다. 네츠 유니폼을 입고 처음 몇경기는 적응단계였다가 경기를 진행할수록 전성기에 못지않은 대활약을 펼쳤다. 57경기동안 27.5점을 기록하면서 뉴저지가 플레이오프 막차를 타는데 공언했다. 하지만 마이애미 히트에게 4전전패로 1라운드에서 광속탈락하고 말았다.

카터와 키드 그리고 제퍼슨 이 삼인방은 05-06시즌부터 제대로 된 호흡을 맞추었다. 좋은 활약상을 보여주긴 했으나 팀 성적이 큰 폭으로 오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컨퍼런스 세미 파이널에 2년연속 오르는 등 그런대로 동부강호로써의 면모는 보여주는 정도였다. 그러나 07-08시즌 제이슨 키드가 댈러스로 트레이드 되면서 이 뉴저지의 빅3로 해체되었다. 그리고 시즌 종료후 리차드 제퍼슨도 밀워키 벅스에 트레이드 되면서 네츠에는 카터 혼자만 남게 되었다.

카터는 네츠의 리더로써 팀을 이끌어갔으나, 이미 카터는 과거의 폭발력은 많이 감소한 상태였다. 그리고 돌파보다는 점프슛만 쏴대고, 경기에 져도 싱글벙글 하는 등 맨탈적인 부분이 결여되었다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 뉴저지 네츠 역시 브룩 로페즈와 데빈 해리스 위주로 팀을 재편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카터에게 더 이상의 미련이 없었다. 08-09시즌이 끝나고 우승전력을 위해 올랜도가 트레이드를 제안하면서 카터는 올랜도로 트레이드 되었다.

3.3. 올랜도 매직 & 피닉스 선즈 시절


카터는 플로리다 데이토나 해변에서 태어났다. 올랜도 매직은 고향인 플로리다 주에 연고를 두는 팀이었다. 카터 역시 기쁨을 나타내면서 올랜도의 우승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당시 많은 팬들은 카터와 하워드의 결합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08-09시즌 파이널에서 레이커스에게 패한 올랜도는 목표가 우승으로 높아진 상태였기 때문에 경험많은 베테랑 카터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다. 카터는 제 몫은 했지만 확실히 기량은 많이 하락한 상태였다. 48득점을 하기도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올랜도는 컨퍼런스 파이널에 올랐지만, 보스턴 셀틱스에게 패하면서 우승에 실패했다.


10-11시즌에는 거의 조용하다 싶을 정도로 시즌을 치루고 있다가 올랜도가 공격력 강화를 위해 그를 피닉스 선즈로 트레이드 해 버렸다. 고향팀에서 경력을 마무리하고 싶었던 카터의 꿈은 무산되었다. 피닉스 선즈로 팀을 옮겼지만 카터는 이제 거의 옛날의 모습을 찾기 힘들어보였다. 젼혀 내쉬효과를 누리지 못했다. 피닉스는 결국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고, 카터 역시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시즌을 마감했다.

3.4. 댈러스 입단



피닉스 선즈에서 방출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댈러스 매버릭스와 3년계약을 맺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비록 예전과 같은 기량은 더 보여주지 못하지만 아직까지는 평균정도는 할수 있는 기량은 있기 때문에 댈러스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선택. 짬밥이 많이 쌓였다보니 경기운영이나 수비력도 좋은 수준에 도달해 괜찮은 베터랑 식스맨으로 자리잡았다. 단 프랜차이즈 스타인 더크 노비츠키가 늙고 우승팀급 전력에는 미치지 못하는 팀 사정상 댈러스에서 반지를 얻고 은퇴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2014년 샌안토니오 스퍼스하고의 플레이오프 1라운드 3차전에서 기적같은 3점 버저 비터로 팀의 역전승을 만들어냈다. 토론토 시절 컨퍼런스 세미파이널 필라델피아전에서 실패했을 때와 거의 비슷한 구도였는데 이번에는 성공.

2014년 오프시즌에 멤피스 그리즐리스와 3년 124억원 가량의 계약을 맺었다고 보도되었다.

4. 기타 등등

포스트 조던으로 언급되었던 사람들 중에 코비 브라이언트와 제리 스텍하우스 못지않게 가장 많이 언급되었던 선수였다. 그리고 첫 3시즌 동안은 정말 거의 조던의 뒤를 이을 슈퍼스타 포스였다. 실제로 운동능력 하나만큼은 조던 이상 이라는 평가까지 받았을 정도. 하지만 부상을 이기지 못하고, 그냥 스타선수정도로 머물러야 했다. 또한 04-05시즌 토론토에서 보여준 태업성 플레이로 인해 이미지를 실추시킨 것도 마이너스 요인 중 하나였다.

갖추고 있던 재능 자체는 다른 포스트 조던 경쟁자들에 비해 결코 꿀리지 않았으나(코트비전, 운동능력, 정확한 3점 등) 이 재능들을 받쳐주는 기본기들이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평가가 지배적. 그래도 운동능력으로 먹고 살았다는 이미지하고는 달리 연습을 통해 슛을 장착해 나이를 먹고 나서도 도태되지 않고 리그에서 오래 살아남는데는 성공했다.

트레이시 맥그레디와 사촌이다. 카터가 슬램덩크 콘테스트 우승할 때 맥그래디는 카터와 경쟁하는 한편 카터의 덩크를 도와주는 도우미 역할도 해줬다.

플레이오프에 50득점 이상을 한 선수중 한명이며, 3점 슛 성공수도 역대 10위 안에 들어간다.

2010년 봄에는 자신의 고향에 레스토랑을 오픈했다. 슬슬 안락한 노후를 준비하는 듯 보인다.

개인 홈페이지가 있다. 카터에 대한 소식이 궁금하면 바로 가보도록 하자. 주소는 여기
http://www.vincecarter15.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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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파업 때문이었다.
  • [2] 폐지되기 직전의 96, 97 덩크 콘테스트는 지금도 최악의 콘테스트중 하나로 꼽힌다. 96의 경우 "일정 시간내에 여러번 덩크 선보이기"를 룰을 따랐는데 이에 선수들이 평범한 보험용 덩크 한번에 이어 멋진 덩크를 선보이는 형식. 다만 시간 제한 때문에 덩크를 계속 실패하던 데럴 암스트롱이 급했는지 마지막 시도에서 덩크가 아닌 레이업(!!)을 하는 참사까지 일어났다. 결국 브렌트 베리의 우승을 결정지은 건 지겹게 본 자유투라인 덩크...(다만 이건 최초로 백인이 했다는 의미가 있는데다 이 덩크 자체가 언제해도 높은 점수를 받을만한 고난도 덩크이다) 97위 경우 더 심각한데 코비 브라이언트가 이미 아이재아 라이더가 선보인 비트윈더렉을 똑같이 해서 우승했다. (물론 덩크 자체가 OME급이었다는 건 절대 아니다. 빈스 카터, 마이클 조던, 도미닉 윌킨스보다는 격이 떨어지지만 코비 역시 역대급 덩커이다) 아이디어 고갈 문제로 비난받던 덩크 콘테스트는 이후 폐지 크리 (이후 투볼게임을 도입했는데 이건 인기가 더 없었다. 궁금한 사람은 유튜브에서 영상을 찾아보자).
  • [3] 추가로 설명하자면 80년대 콘테스트에는 같은 덩크를 선보이는 비중이 높았다. 그 이유는 덩크의 기발함보다도 "같은 덩크를 얼마나 멋지고 예술적으로 하느냐"에 포인트가 있었기 때문. 예를 들어 도미닉 윌킨스의 리버스 덩크가 파워넘쳤다면 조던의 그것은 다리를 접었다 펴는등 공중동작이 좀더 감미되는 등. 그러나 90년대 초반으로 넘어가며 기발한 아이디어 중심이 되었고 이에 따라 디 브라운의 "눈가리고 덩크" 마이클 핀리의 "덤블링 후 덩크"등 묘기가 나왔다. 이 상황에서 1994년 라이더의 덩크는 아이디어와 멋, 기술을 모두 겸비한 멋진 덩크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코비가 시도한 것은 기술적으로 훌륭하긴 했지만 새롭지도, 기존의 덩크에 뭔가를 추가한 것도 아니라 라이더의 것과 거의 흡사했기에 실망감을 안겨준것. 사족으로 코비는 뛰어난 "실전용" 덩커로 유명한데 콘테스트용 묘기 덩크보다 실전에서 쓰이는 덩크가 주가 됐던 80년대 콘테스트였다면 훨씬 선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