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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반 바스텐

last modified: 2015-03-07 12:36:30 Contributors


Marco Van Basten.
"Il cigno di Utrecht(위트레흐트[1]의 백조)"

우리가 반 바스텐을 다시 보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세월을 기다려야 할지 느껴지지조차 않는다.
—아리고 사키

이름 마르코 반 바스텐(Marco van Basten)
생년월일 1964년 10월 31일
국적 네덜란드
출신지 위트레흐트
포지션 공격수
선수 AFC 아약스 (1981~1987)
AC 밀란 (1987~1995)
감독 JUNG 아약스 (2003~2004)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2004~2008)
AFC 아약스 (2008~2009)
SC 헤이렌베인 (2012~2014)
AZ (2014)
스태프 AZ 자문 (2014~ )
국가대표 58경기 24골

1992 FIFA 올해의 선수상
수상
마르코 반 바스텐
2위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3위
마스 헤슬러
1988 Ballond'or
수상
마르코 반 바스텐
2위
루드 굴리트
3위
프랑크 레이카르트
1989 Ballond'or
수상
마르코 반 바스텐
2위
프랑코 바레시
3위
프랑크 레이카르트
1992 Ballond'or
수상
마르코 반 바스텐
2위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3위
데니스 베르캄프

네덜란드의 전 축구 선수이자 감독.

네덜란드의 전설적인 축구 선수로 스트라이커의 교과서라 불린다.

뤼트 휠리트, 프랑크 레이카르트와 더불어 1980년대 중후반~1990년대 초반 네덜란드와 AC 밀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오렌지 삼총사의 일원.

280경기 218골이라는 후덜덜한 기록의 보유자.

앙리, 셰브첸코, 인자기, 반 니스텔루이 등 1970년대생 유럽 스트라이커의 한결같은 우상은 바로 반 바스텐이다.

Contents

1. 선수로서의 발자취
1.1. 아약스 시절
1.2. AC 밀란 시절
1.2.1. 1992-93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1.3. 국가 대표
1.4. 수상 내역
2. 플레이 스타일
3. 기타
4. 감독으로서의 발자취
4.1. 기록
4.1.1. 선수 기록
4.1.2. 수상 기록

1. 선수로서의 발자취


1.1. 아약스 시절


그는 축구 선수 아버지와 체조 선수 어머니를 둔 운동 선수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그 천부적인 재능을 인정받아 여섯 살 때부터 위트레흐트 유소년 팀에서 뛰게 된다. 이리도 어린 선수가 체계적인 교육을 받는 것이야말로 네덜란드 축구의 위대한 전통이자 저력이기도 하며, 현재도 학교를 못 들어간 소년들 중 특출난 소년들은 몇 살 위의 형들과 같이 어울려 공을 차기도 한다. 그의 재능은 개중에서도 특출난 것으로, 15세 때 명문 아약스로 팀을 옮기게 되고, 16세인 1982년 시즌 토탈 사커의 아이콘 요한 크루이프와 교체되며 데뷔, 골을 넣으며 커리어를 시작한다. 시대와 시대, 토탈과 압박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천재라 하더라도 당시 유럽무대에서 다크호스 역할쯤은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아약스에서 16세의 나이로 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그 시즌 리그 1경기, 컵 경기 1경기를 뛰고 마무리하게 된다.

하지만 17세의 그에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시즌 그는 컵 경기 포함 25경기에 13골을 맹폭했고, 전설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하늘이 내려준 재능도 찬란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1987년까지 아약스에서 133경기 128골에 4년 연속 득점왕이라는 엄청난 기록을 세우며 85/86 시즌 골든 부츠를 수상하기에 이르렀다. 얼핏 경기당 한 골에서 모자라 보이는 기록이지만, 시간으로 환산해 보면 그는 90분 당 1.5골 가까이 상대편의 골대에 공을 집어넣었다. 여기에 정점을 찍듯 반 바스텐은 컵 위너스 컵에서 아약스를 우승시키며 22살의 나이에 네덜란드가 너무 좁다는 걸 증명하고 거액의 이적료와 함께 AC 밀란으로의 이적, 세리에 A에 첫 발을 내딛게 된다.

이렇게 좋게 마무리한 시즌이었으나, FC 흐로닝언과의 경기에서 입은 오른쪽 발목 부상은 이후 다른 부상 친구들을 불러들이며 반 바스텐을 괴롭히게 된다.

1.2. AC 밀란 시절


이 때의 밀란이 바로 그 유명한 골든 제너레이션으로 2010년 즈음의 바르사가 이 팀에 비견될 만큼 최고의 팀이었다. 특히 이 시기의 밀란은 토털 사커를 한층 발전시킨 압박 축구를 창시하며 전술적 혁신으로도 명성을 높였다. 이는 여러 팀과 축구인들이 그 단초를 마련하기도 햇지만, 무엇보다도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밀란 선수들과 명감독 아리고 사키의 공로로 돌려야 한다. 그리고 반 바스텐은 이 위대한 팀의 오렌지 삼총사 중에서도 에이스였다.

반 바스텐이 데뷔부터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데뷔 시즌부터 문제는 있었는데, 첫 경기는 pk 골로 장식하며 데뷔를 하지만 잠깐 무실점 경기가 이어지다 왼발목 부상으로 데뷔 시즌을 거의 소득 없이 보낸다. 그러나 다음 시즌부터는 득점포를 퍼부으며 은퇴하기 전까지 147경기 90골을 기록, 2차례의 득점왕에 올랐다. 무릎 부상에 시달린 기간이 길고 심장마저 말썽을 부려 슬럼프에 빠진 기간이 있었음에도 실제 경기 시간으론 90분당 한 골 이상을 퍼부어 대는 미친 득점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2]

명성에 비교해 볼 때, 세리에 A에서의 그는 좀 아쉬운 감이 있다. 공격수로서의 역할은 완수했지만, 명성에 비해 기여한 바가 미묘하기 때문이다. 우승한 해는 첫해와 31경기 25골에 빛나는 최고의 시즌이었던 1991-92 시즌, 은퇴 시즌이었던 1992-93 시즌이었는데, 6 시즌 중 3 시즌 우승이라면 대단한 일이나 역사상 최고의 팀으로 불리는 밀란에 그 팀의 에이스로서는 조금 아쉽기도 하다. 특히 첫 해와 마지막 해는 부상으로 신음하며 결장이 잦았기에 우승에 있어 공은 있으나 주축이라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조금 감안할 만한 것은, 이 시기 세리에 A는 세계 최고의 리그이면서 결코 한 팀이 독주를 하는 법이 없었고, 동시대 밀란의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테르, 삼프도리아 등도 강했으나 역시 가장 컸던 장벽은 마라도나SSC 나폴리.

허나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1등 공신이었다. 사실상의 데뷔 시즌인 1988-89 시즌 유로 88 우승을 이끌고 돌아온 반 바스텐은 1경기를 제외한 밀란의 전경기를 풀타임 출장했으며, 챔피언스 리그에선 10골을 때려박았으니 우승을 진두지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3] 특히 이 시즌 그가 기록한 33골 중에 12골이 결승골이나 만회골이었으니 소위 영양면에서도 1급이라 할 수 있다. 이 활약에 힘입어 반 바스텐은 88년 발롱도르를 차지한다.

1989-90시즌의 반 바스텐은 지난해의 혹사 탓에 부상을 입으며 고생하나 그럼에도 리그에서는 득점왕을 차지하는 활약을 보였고 밀란의 챔피언스 리그 2연패에 기여했다. 특히 이 시즌은 밀란 선수들의 부상과 노쇠화 문제로 어수선했다는 점, 12번의 결승골 혹은 만회골을 기록하는 영양 만점 활약으로 인해 발롱도르 역시 2연패에 성공한다.

하지만 1990-91시즌 밀란은 마르세유에 막혀 3연패에 실패했고,[4] 공교롭게도 그 해 반 바스텐은 월드컵 후유증, 부상, 심장 트러블 등으로 최악의 슬럼프에 시달린 해였고[5] 체력에 문제가 있었기에 챔피언스 리그는 출장도 적었다. 밀란 역시도 최악의 난조를 보였는데 월드컵이 시시하게 끝나고 오프사이드 룰을 공격적으로 개편하고 백패스를 손으로 잡지 못하게 하자 오프 사이드 트랩을 즐겨 사용하던 밀란 전체가 심대한 타격을 입은 것이었다.

1991-92 시즌은 반 바스텐이 정말 오래간만에 아무 대회 없이 휴식에만 집중할 수 있는 최고의 프리 시즌을 맞이한 해였다. 거기다 마르세유 조명 땡깡 사건의 여파로 밀란이 1년 동안 유럽 대회 출전권을 박탈당했기에 나갈 대회가 없기도 했다. 원기왕성한 반 바스텐은 리그에서는 최고의 활약을 선보이며 우승을 이끌었으며 17번의 결승골과 만회골을 기록하며 1급 영양사 자격증을 과시했다.

마지막이었던 1992-93 시즌은 부상으로 신음했으나 실력과 활약은 더욱 원숙해진 시즌이었다. 대회를 가리지 않고 거의 신들린 듯한 활약을 보이던 반 바스텐이었으나 1월에 당한 부상은 6개월짜리였다. 밀란은 마르세유에서 야심차게 영입한 파팽이 반 바스텐의 공백을 잘 메우며 결승까지 진출한다. 반 바스텐은 오른쪽 발목이 완치되지 않았음에도 무리한 출장을 감행하나 밀란은 또다시 마르세유에게 가로막혀 준우승에 머무르고 만다. 그리고 경기가 끝난 후, 부상이 재발한 반 바스텐은 마지막 발롱도르와 함께 선수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가 이 시즌 1월까지 챔피언스 리그에서 기록한 6골은 그 해 챔피언스 리그 득점 부문 차점의 기록이었다.

결국 1993-94 시즌 반 바스텐은 없었지만 밀란은 챔피언스 리그 우승 컵을 되찾는다.축구 레슨을 시켜주며

부상에 신음하던 반 바스텐은 최후의 결단이었던 연골 이식 수술이 실패하고, 1994-95 시즌 은퇴 경기를 가지며 31세에 불과한 나이에 은퇴를 하게된다.

1.2.1. 1992-93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사족이지만 이 결승전은 여러 모로 논란거리가 많은 결승전이었다.

당시 마르세유는 리그 5연패를 하던 거대 명문으로 선수단도 바르테즈에 아베디 펠레, 루디 푈러[6], 드사이, 데샹 등 화려한 멤버를 보유한 강 팀이긴 했다. 어쩌면 그런 만큼, 그들은 단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던 챔피언스 리그에 심하게 갈증을 느끼고 있었고, 이 갈증은 상술됐던 시즌 결승전에서 베오그라드에 승부차기 패배를 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마르세유는 밀란과의 챔피언스 리그 경기를 앞두고 있었지만 리그 우승의 향방을 결정할 중요한 경기인 발렝시엔과의 리그 마지막 경기도 앞두고 있었다. 마르세유는 고민 끝에 특단의 결정을 내리고, 발렝시엔의 선수단 일부에게 현금을 건냈고, 손쉽게 리그 우승을 차지함과 동시에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보다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뿐 아니라 약물 복용도 논란 거리다. 이는 당시 주전 멤버였던 에델리에가 증언하길 결승전 경기 전에 루디 푈러를 제외한 선수단 전원이 약물을 복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유에파는 이 증언이 너무나도 때늦은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 별다른 조사에 들어가지 않아 이는 프랑스 축협에 의해 공식화된 승부조작과는 달리 비공식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음모론을 좋아하는 호사가들은 이를 두고 유에파와 프랑스를 연관지어 쑥덕거리기도 한다.[7] 마르세유뿐 아니라 프랑스 전체를 통틀어 단 한 번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이기도 하기에.[8][9]

이듬해 밀란은 그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함으로 설욕하게 된다. 파팽도 있었고, 당시 밀란은 세리에 A를 4연패하고 챔피언스 리그 결승을 밥 먹듯 가는 등 최강 팀이었으니.

1.3. 국가 대표


그의 위상에 비하면 국가 대표 경력은 초라해 보이기도 한다. 허나 너무 이른 나이에 선수 생활을 마감했고, 국가대표 초년 시절엔 운이 없었다.

84년 유로에선 별로 뛰지도 못하긴 했지만,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승점은 물론 골득실마저 동일했으나 득점에서 밀려 조별예선을 탈락했다. 86년 월드컵의 네덜란드는 벨기에와의 플레이오프 끝에 역시 예선탈락하게 된다.

20대 중반 전성기를 달리게 된 88년 유로에선 5경기 5골 1도움을 꽂으며 네덜란드를 사상 최초의 메이저 대회 우승으로 이끄는 활약을 보인다. 그러나 90년 월드컵에선 플레이메이커 루드 굴리트의 부상 탈락, 감독 교체 등으로 네덜란드 팀 자체가 지지부진한 경기력을 보인다. 하지만 92년 유로 4강전 덴마크와의 경기에서 pk까지 가게 된 네덜란드는 5:4로 탈락하게 되는데 네덜란드의 유일한 실축자가 바로 반 바스텐이었다. 그리고 이 이후엔 설욕의 기회도 없이 30도 안 된 나이에 부상으로 은퇴하게 되었으니...

1.4. 수상 내역

유럽 골든 부츠(1986)
발롱 도르(1988, 1989, 1992)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1988, 1992)
FIFA 올해의 선수(1992)

2. 플레이 스타일


그의 플레이 스타일과 골 감각을 설명하는 데 있어 마침 그의 발언 중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두 가지가 예시로 들 만하다.

9개의 놀라운 골과 10개의 평범한 골을 고르라면 난 주저없이 10개의 골을 고를 것이다.
내가 전성기 시절로 돌아간다고 해도 호나우두와 같은 플레이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중 후자는 흔히 호나우두>반 바스텐의 떡밥으로 사용되는데 잘못된 이해다. 왜냐면 반 바스텐은 호나우두와 같은 플레이를 할 수 없겠지만 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적혀있지만, 최근 본인이 직접 인터뷰를 했다. "호나우두가 PSV에서 뛰던 시절부터 그의 실력을 질투했다. 즉, 호나우두가 나보다 위대한 선수다."라고...

반 바스텐은 굉장히 어려운 각도와 높이로 오는 공도 소화할 수 있었다. 이상하게 튕기는 공, 바운드 되는 공, 하늘에서 날아드는 공, 괴이한 스핀이 걸린 공을 시저스 킥, 오버헤드 킥, 슬라이딩 슛팅 등의 발리 슛으로 잡아 내는 기술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었다.

반 바스텐은 가장 우아한 공격수로 회자되곤 하는데, 그의 킥이나 트래핑이 몹시 빠르고 간결했기 때문이다. 골대를 등지다가 트래핑도 하지 않고 발리 슛을 하기 위해 몸을 돌리는 동작이나 정확한 트래핑을 수비가 막아내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달인 수준에 달한 오른발은 물론 왼발 역시 남들 하는만큼 찰 수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이렇게 킥 능력이 뛰어났던 만큼 공이 어려워 보이는 위치에 오더라도 시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남이 보기에는 아주 어려운 각도라도 슛하거나, 아니면 약간이라도 각도를 살려낸 후 재빠르게 슛으로 연결하곤 했다. 이러한 능력 덕분에 슛이 예측되지 않는 각도에서 심지어 수비수도 붙어 있는데 엄청 빠른 타이밍에 시도한 슛이 성공하는 일이 많았다. 이러한 킥의 정확성도 발군이었고, 킥이 정확한 만큼 프리 킥도 당연히 잘 찼다.

반 바스텐은 킥에만 능한 것이 아니라 헤딩도 슛과 연결 둘 다 능한 달인이었으니 무리하게 돌파하기보단 크로스를 기다리는 것이 효과적이었다. 이러한 전형적인 타겟 스트라이커는 공이 공급되지 않으면 있는지도 모를 만큼 존재감이 사라진다는 약점이 있으나, 그가 몸담았던 팀들 중 반 바스텐에게 공을 공급해 주지 못할 만한 팀은 없어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10]

반 바스텐이 호나우두처럼 돌파에 돌파를 거듭할 능력이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돌파가 영 젬병인 것도 아니고[11] 공중전과 패스가 가능한 데다 킥력 및 슛을 할 수 있는 능력과 범위가 탁월하니 그러지 않아도 괜찮았던 것도 마찬가지로 사실이다. 또한 지능적이고 이기적이지 않은 스트라이커의 능력 중 하나인 오프 더 볼 상황에서의 움직임으로 인한 수비수 몰이에도 뛰어났다. 요즘 선수로 따지면 카림 벤제마에게 프리 킥을 장착시킨 후 거의 모든 능력치를 상향 조정했다 할 수 있다.[12]

그의 플레이는 그야말로 명료한 스트라이커의 교과서와 같은 것이어서 당대 최고의 선수면 으레 그렇듯 많은 꿈나무들을 매료시켰고 그들을 세계 최고의 플레이어로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 이후 최고의 스트라이커라 할 수 있는 앙리와 셰브첸코는 반 바스텐이 자신들의 우상이었음을 공공연히 밝히곤 한다.

그러나 그는 너무 긴 시간 동안 부상과 싸워야만 했다. 22살 때인 1986년에 당한 발목 부상은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고, 장기 부상을 너무 많이 당했다. 선수 생명이 끝난 92-93시즌 그의 나이는 겨우 28살이었다. 이 시기 그는 과감히, 당시로서는 최첨단 수술로 거의 전례가 없던 연골 이식 수술을 받는 결단을 내리지만, 수술은 대실패로 끝났고 그는 커리어를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축구 선수로서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할 나이이고 실제로도 기량 또한 원숙해져서 마지막 시즌에는 부상에 시달리면서도 괴물처럼 골을 집어넣었기에 현재의 의학 기술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결국 반 바스텐은 1994-95 시즌에 열린 은퇴 경기를 마지막으로 31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은퇴를 발표하게 된다.

3. 기타

정리하자면, 실상 그가 전성기를 구가했던 세리에 A에서의 활약은 단순 기록상으로 따졌을 때 동시대에 뛰었던 마라도나 같은 개사기언터처블까지는 아니었다. 마라도나처럼 원 맨 쇼로 팀을 리그 정상으로 이끈 것도 아니고, 지금의 바르셀로나마냥 압도적인 포스로 리그를 연패한 것도 아니었다.[13][14]

결국 사람들이 기억하는 스트라이커 마르코 반 바스텐의 추억은

- 유로 88에서의 네덜란드 최초의 메이저 대회 우승과 득점왕 싹쓸이
- 밀란에서 이룬 챔피언스 리그 2연패

... 가 거의 전부인 셈이다. 그 기껏해야 2~3년 동안의 기간이 반 바스텐의 화양연화였다.
짧아도 너무 짧았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야말로 하늘마저 시기한 스트라이커.

그가 은퇴하던 날, 이탈리아 축구 협회 회장은 우린 축구계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잃었다라는 말로 그 괴로움을 토로했다.

2006년에미레이츠 스타디움에서 열린 베르캄프의 은퇴경기에서 아약스의 유니폼을 입고 클래스는 영원하다를 몸소 증명하기도 했다.
참고로 은퇴한지 10년이 넘은 시점.


4. 감독으로서의 발자취


은퇴 이후 9년만인 2004년 네덜란드 대표팀의 사령탑으로 임명되었다. 조1위로 지역 예선을 뚫고 독일 월드컵 본선에 오르며 감독으로서는 다소 젊은 40살에 이전까지 감독경험이 전무한 그가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았다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불식시킨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16강에서 만난 포르투갈에게 패하며 탈락하고 말았다.

08-09시즌 아약스의 감독으로 재임하였다. 한편, 첼시카를로 안첼로티의 후임으로 반 바스텐을 생각하고 있다는 기사가 나왔었다. 이후 2012년부터 2014년까지 SC 헤이렌베인을 맡았고, 2014년 AZ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9월 12일 건강문제로 자진 사퇴하였다. 선수시절부터 그를 괴롭힌 심장질환으로 인한 것이라 많은 축구팬들이 그의 건강을 염려하고 있다. 감독직에서 물러난 반 바스텐은 AZ에 자문으로 계속 활동할 예정이다.

4.1. 기록

4.1.1. 선수 기록


4.1.2. 수상 기록


  • Dutch League Top Scorer: 1983–84, 1984–85, 1985–86, 1986–87
  • European Silver Boot: 1983–84
  • Dutch Footballer of the Year: 1984–85
  • European Golden Boot: 1985–86
  • World Golden Boot: 1985–86
  • Bravo Award: 1987
  • Onze d'Argent: 1987, 1992
  • Onze d'Or: 1988, 1989
  • IFFHS Best Player of the Year: 1988, 1989, 1990
  • World Soccer Player of the Year: 1988, 1992
  • UEFA European Championship 1988 Top Scorer and Best Player with 5 goals
  • UEFA European Football Championship Teams of the Tournament: 1988, 1992
  • Ballon d'Or: 1988, 1989, 1992
  • Serie A Silver Top Scorer: 1988–89
  • UEFA Best Player of the Year: 1989, 1990, 1992
  • Serie A Silver Top Scorer: 1988–89
  • Serie A Top Scorer: 1989–90, 1991–92
  • European Cup Top Scorer: 1989
  • FIFA World Player of the Year: 1992
  • European Cup Silver Top Scorer: 1993
  • FIFA 100 (List of the greatest living footballers picked by Pelé):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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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네덜란드의 도시로 판 바스턴의 출생지.
  • [2] 특히 이 시기의 세리에 A는 두말할 나위 없는 세계 최고의 리그였으며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수비는 자물쇠같이 견고하고 1:0의 미학을 아는 리그라는 점 또한 반 바스텐의 평가에 있어 플러스 요인이 되면 되었지 마이너스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 [3] 당시엔 경기 수가 적었기 때문에 요즘과 달리 정말로 빛나는 기록으로, 그 전후로 15년 가량 득점왕은 대개 6, 7골 선에서 정리되는 게 상식이었다.
  • [4] 이 때 밀란은 홈에서 1:1로 비기고, 원정에서 1:0으로 지고 있다 인저리 타임에 마르세유 홈 구장의 조명이 망가져 경기가 중단된 이후 경기를 뛸 수 없고 재경기를 해야 한다며 땡깡을 피운다. 이는 밀란이 챔피언스 리그 경기 중 영국의 끝내주는 안개 때문에 재경기를 통해 진출하게 된 경험이 있기에 해 볼만한 땡깡으로 간주되었을지 모르나, 이번에는 유에파가 밀란에게 닥치라고 대갈하며 3:0 패배를 선고하는 것으로 끝났다. 마르세유는 이후 준우승.
  • [5] 코파 4강 자책골, 밀란 탈락.
  • [6]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독일 국대 출신으로 차범근이 신영록을 일컬어 루디 푈러와 같은 플레이를 한다고 했다. 국내에는 차 붐이 아스피린을 많이 먹었나 보다라고 발언한 2002년 독일 국대 감독으로만 많이들 알고 있다.
  • [7] 당연히 많은 밀란팬들이 이렇게 생각하며 이스탄불의 기적과 싸잡아 2번 우승을 도둑맞았다고도 한다. 그래봐야 인저리 타임에 조명 나갔으니 재경기해야 된다는 식의 땡깡이지만. 특히 이스탄불은, 뭐 다이빙에나 오심에 자유로운 구단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 [8] 어쨌거나 승부조작이 사실로 드러난 이후의 마르세유는 챔스 우승은 보존했지만 그 해의 리그 우승과 더불어 다음 해의 챔스출전권이 박탈되고 2부 리그로 강등당하게 된다. 70년대 초, 특히 80년대 후반은 유럽과 프랑스를 호령하던 거대 명문구단 마르세유는 이후 기나긴 암흑기를 거치게 된다. 뭐 암흑기라 해도 90년대 후반부터 다시 대체로 좋은 성적을 내주었으나, 비틀거릴 때도 가끔 있었으니 프랑스에서는 가히 독보적인 관중동원력-약소팀은 평관 10000명 언저리에 리옹 등 다른 거대 클럽조차 40000을 달성하지 못해 쩔쩔매는데 40000은 가볍게 넘고 50000을 넘보는 평관-과 폭풍 5연패 시절의 위엄을 고려한다면 09-10에 와서야 간신히 우승하게 된 것은 너무나도 길고도 긴 기다림이었다. 프랑스 제2의 도시, 제 1의 항구도시, 타 팀과는 비교도 안 되는 열기! 그런데 우승을 못해! 오오 이건 프랑스의...거기다 비참하게도 승부조작이 판명난 이후 몇 시즌 간은 경기장을 찾는 팬들의 발길이 처절하리만치 뚝 끊어지기도 했다. 이후 서서히 예전과 같은 모습을 회복하긴 했지만.
  • [9] 프랑스 리그 전체의 수준이 떨어지는 계기라 할 수 있다. 이 거대구단의 몰락 이후 프랑스 리그의 여러 구단이 챔피언스 리그에 도전했지만 오직 모나코만이 결승에 한 번 올라갈 수 있었을 뿐이다. 그나마 90년대 중반에서 후반까진 낭트, 파리, 모나코 정도가 4강을 가는 등 꾸준했으나 그 이후로는 리옹을 제외하곤 조별 리그를 넘기도 버겁게 되었다. 그 이후는 기름부자들이 등장하기도 했고, 90년대 초반 사건이니.
  • [10] 그럴 필요가 없어서 잘 그러지 않았을 뿐이지, 어떤 특정한 이유로 2선에서의 작업이 원활치 못하다면 반 바스틴은 얼마든지 2선에서의 작업도 해결할 수 있었고 종종 하프라인까지 내려와서 작업을 풀어나가기도 했다. 다만 그가 몸담았던 팀들도 팀들이고, 밀란 시절 아리고 감독이 개인기량에 의한 플레이를 극단적으로 자제하게 지시하는 바람에 이런 플레이가 화려하게 드러나진 않았다. 대신 그 탓에 감독과 많이 싸웠다고 한다. 다만 커리어가 끝난 지금으로서는 그의 광휘를 가리는 차폐막이 되는 면도 있다.
  • [11] 그렇다고 썩 뛰어난 것도 아니기도 하다.
  • [12]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주 못 막는 선수인 건 아니다. 당대 유벤투스의 독일인 센터백 위르겐 콜러는 강철 같은 육체를 바탕으로 한 맨 마킹 능력으로 반 바스텐을 괴롭혔던 대표적인 선수였다.
  • [13] 물론 그와 별개로 소속 팀은 정말 압도적인 팀이었다. 지금의 바르셀로나도 이 밀란을 넘는 데는 사실상 실패.
  • [14] 팀의 전력은 유럽 축구 역사에서도 손꼽히지만 당대 세리에 판은 그 밀란을 견제하는 공룡구단이 여럿 있었다. 전통의 강호 유벤투스와 게르만 삼총사를 앞세운 더비 라이벌 인테르, 축구판 유일신 마라도나의 나폴리와 비알리, 만치니가 이끈 삼프도리아와 센시의 로마 등 2000년대 후반 바르셀로나의 리그 대항마가 레알 마드리드 뿐인 것과 비교된다. 물론 세비야, 발렌시아 같은 팀도 저력있는 강팀이였지만 신계, 인간계 드립을 보면 리그 우승 대항마라기보다는 챔스 진출 동지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