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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카르도 사모라

last modified: 2015-02-02 09:02:42 Contributors


골키퍼계의 우승 청부사

이름 리카르도 사모라 마르티네스
(Ricardo Zamora Martínez)
생년월일 1901년 1월 21일
사망년월일 1978년 9월 8일
국적 스페인
출신지 바르셀로나
포지션 골키퍼
신체조건[1] 187cm / 82kg
등번호 -[2]
소속팀 RCD 에스파뇰(1916~1920)
FC 바르셀로나(1920~1922)
RCD 에스파뇰(1922~1930)
레알 마드리드(1930~1936)
니스(1937~1938)
국가대표 46경기 / 0골(1920-1936)
감독 니스(1937~1938)
아틀레티코 아비아시온(1939~1940)
아틀레티코 아비아시온(1940~1946)
셀타 비고(1946~1949)
말라가(1949~1951)
스페인(1951~1952)
셀타 비고(1953~1955)
셀타 비고(1953~1955)
에스파뇰(1955~1957)
셀타 비고(1960)
에스파뇰(1961)

Contents

1. 소개
2. 어린 시절
3. 클럽 커리어
4. 스페인 내전
5. 국가대표 커리어
5.1. 1920년 올림픽
5.2. 1934년 월드컵
6. 은퇴 이후
7. 플레이 스타일 & 평가
8. 인격
9. 수상
9.1. 클럽
9.2. 개인
9.3. 감독

1. 소개

리카르도 사모라는 이케르 카시야스가 등장하기 전에는 이견이 없는 스페인 역대 최고의 골키퍼였다. 사모라의 별명은 El Divino. 우리말로 신성한 사나이였으며, 그 별명에 맞는 최고의 세이브들을 보여주었다. 또한 그의 패션 센스도 꽤나 유명해서 경기를 뛸 때에 뉴스보이 캡과 터틀넥 티셔츠는 그의 차밍 포인트였는데, 그는 그것이 항상 햇빛과 상대 선수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나름의 방법이라고 설명하곤 했다.

2. 어린 시절

리카르도 사모라는 1901년 바르셀로나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사모라가 교수가 되길 바랐지만 사모라는 운동에 큰 관심을 보였다.

3. 클럽 커리어

1914년에 우니베르시타리 SC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사모라는 1916년 RCD 에스파뇰에서 본격적으로 선수 생활을 시작하였다. 1918년 카탈루냐 주 리그에서 에스파뇰을 우승시켰지만 클럽 임원에게 대들었다는 이유로 지역 라이벌 중 하나인 FC 바르셀로나로 보내버렸다.
바르셀로나에서 그는 역시나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는데 잭 그린웰의 지도하에 그의 친구들인 호셉 사미티에르, 사기바르바[3], 파울리노 알칸타라, 펠릭스 세수마가 등과 함께 원래 강했던 바르셀로나를 더욱 이길 수 없는 깡패팀으로 만들어놓았다. 3년간의 바르셀로나 생활에서 그들은 카탈루냐 주 리그 3연패를 이끌어냈고 코파 델 레이도 두 번을 우승했다.
그 후에 다시 돌아온 에스파뇰에서 우승은 못했지만 스페인 최고의 골키퍼로 명성을 날렸다. 그리고 1929년에 스페인 전체를 아우르는 리그인 라 리가가 출범하였고, 거기에서 다음 시즌까지 26경기를 전부 출전했지만 1930년에 레알 마드리드로 떠나게 되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한창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었고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대표팀 수비수 하신토 킨코세스도 데려오는데 성공하였다. 첫 시즌은 죽을 쑤었지만 1931-32 시즌에는 우승을 차지하였고 다음해에도 또 우승을 차지하였다. 1936년 코파 델 레이에서는 라이벌 FC 바르셀로나와 만났고 사모라의 활약으로 2:1 승리를 거두었다. 이 경기에서 그는 호셉 에스콜라의 결정적인 슈팅을 방어하여 이 경기의 영웅이 되었다.

4. 스페인 내전

이 시즌이 끝나고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였고, 사모라는 오보의 희생양이 되었다. 스페인 방송국 ABC에서 사모라가 공화당원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오보를 낸 것이다. 스페인 국가대표 골키퍼 사모라 숨 쉰 채 발견 살해당한 것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공화당원들에 의해 투옥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공화당원들에 의해 모델로 감옥에 수감되었는데 그 이유는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국민당의 선전 모델이었기 때문이었다.[4] 이런 상황이면 거의 사망 플래그급이지만 사모라는 살아남았는데 그 당시 감방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교도소장 멜초 로드리게스와 간수들을 축구 이야기로 구워삶았기 때문이라고... 나중에 아르헨티나 대사관에 의해 감옥에서 풀려난 그는 프랑스로 건너간다. 거기에서 니스의 감독 겸 선수로 활약하다 같이 니스에 있던 호셉 사미티에르와 함께 1938년 12월에 스페인으로 돌아와서 국민당의 군인들을 위한 자선 경기에 뛰기도 하였다.

5. 국가대표 커리어

5.1. 1920년 올림픽

FC 바르셀로나에서 활약하던 중 사모라는 호셉 사미티에르, 피치치 등과 1920년 올림픽에 출전했다. 그리고 그 대회에서 은메달을 획득하였다.

5.2. 1934년 월드컵

초대 월드컵에서는 스페인이 출전하지 않아서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지만 다음의 월드컵에서는 포르투갈제물 삼아 본선에 진출하였다. 게다가 축구 종주국 잉글랜드를 상대로 비 영국팀이 처음 승리를 거둔 팀이 바로 스페인이었고, 이 경기에서 사모라는 갈비뼈가 부러지는 부상에도 골문을 끝까지 지켜 4:3의 승리를 거두었다.[5]
사모라는 이 대회에 주장으로 출전하였고 첫 상대는 브라질이었다. 하지만 스페인은 3대 1로 낙승을 거두었고 다음 상대는 개최국 이탈리아였다. 그 경기에서 사모라는 홈 버프를 받은 이탈리아를 상대로 엄청난 선방들을 연달아 보여주면서 무솔리니를 포함한 35,000명의 관중들의 입을 벌어지게 만들었다. 그나마 먹힌 골도 지오반니 페라리의 파울성 플레이 이후에 골이 나왔었다. 그 이후에도 계속된 선방으로 팀을 구해낸 사모라였지만 2차전에까지는 출전할 수 없었다. 골 장면에서의 파울로 인한 부상으로 경기를 뛸 수 없는 지경이었던 것이다. 결국 킨코세스가 대신 주장 완장을 차고 2차전을 치러냈지만 스페인은 결국 주세페 메아차의 결승골로 아깝게 패배하고 말았다. 사모라의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컵은 그렇게 아쉽게 끝났지만 사모라의 선방은 기자와 축구팬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고 그에게 월드컵 베스트 골키퍼 자리를 주는 것으로 화답했다. 신이 내린 골키퍼의 월드컵 나들이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6. 은퇴 이후

은퇴 이후 사모라는 각 팀을 돌아다니며 감독생활을 했다. 아틀레티코 아비아시온에서 2년 연속 우승을 시키며 성공적으로 감독 생활을 시작했고 1946년에는 셀타 비고를 지도하면서 미겔 무뇨스[6]를 발탁하여 키워내기도 하였다. 1961년에 에스파뇰의 감독을 끝으로 감독직에서 은퇴하였고 1978년에 사망하였다.

7. 플레이 스타일 & 평가

187cm라는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큰 키[7]를 바탕으로 뛰어난 선방 능력을 보여주었다. 흔히 30년대 최고의 골키퍼를 꼽으라면 이탈리아지안피에로 콤비, 체코슬로바키아프란티세크 플라니츠카와 더불어 사모라가 3대장으로 꼽히는데 선방에 관한 이야기는 그에게서 가장 많이 찾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그를 높이 평가한 IFFHS는 그를 20세기 최고의 골키퍼 중 5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라 리가 최소 실점을 기록한 골키퍼에게 주는 상이 바로 리카르도 사모라 상인 것으로 그의 위엄을 알 수 있다.[8]

8. 인격

인격에 대해서는 말이 꽤 많은 편이다. 왜냐하면 코냑시가를 아예 달고 살 정도였고 선수 시절에 더블 전문이었다고 이런 걸로도 더블이라니 1920년 올림픽에서는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상대 공격수에게 주먹질한 혐의로 퇴장을 당했고 대회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는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죄목은 아바나 시가 밀수 혐의였다. 게다가 탈세 혐의에 대한 위증으로 인해 1922년에는 선수 자격을 1년간 박탈당했고 레알 마드리드가 그를 데려갈 때 에스파뇰에 준 이적료 15만 페세타 중 4만 페세타를 그가 받았다고 한다.

9. 수상

9.1. 클럽

카탈루냐 주 리그 우승 5회: 1917-18, 1928-29(이상 RCD 에스파뇰). 1919–20, 1920–21, 1921–22(이상 FC 바르셀로나)
라 리가 우승 2회: 1931–32, 1932–33(이상 레알 마드리드)
컵 대회 우승 5회: 1920, 1922(이상 FC 바르셀로나), 1928–29(이상 RCD 에스파뇰), 1934, 1936(이상 레알 마드리드)

9.2. 개인

올림픽 준우승 1회: 1920
FIFA 월드컵 실버볼 1회: 1934
FIFA 월드컵 베스트 골키퍼 1회: 1934

9.3. 감독

리그 우승 2회: 1939–40, 1940–41(이상 아틀레티코 아비아시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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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키에 대한 자료는 매우 다양해서 181cm에서부터 194cm까지 존재한다.
  • [2]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 [3] 아르헨티나 출신 공격수로 바르셀로나에서 17시즌을 보냈다
  • [4] 사모라의 이 정치적 견해는 사람들에게 큰 논란거리가 되었다. 그 이유는 사모라가 바르셀로나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엘 클라시코가 왜 그리 치열했는지 역사적 배경을 안다면 사모라의 이런 정치적 견해는 참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어찌됐든 사모라의 정치적 견해가 마음에 들었는지 프랑코는 1950년대에 사모라에게 훈장을 수여했을 정도였다.
  • [5] 1900년대 초반의 유럽 축구계에서 영국이 제일 수준이 높았고, 대륙의 팀들은 모두 그 이하로 쳤었다. 실제로 잉글랜드를 필두로 영연방팀 들끼리나 전적이 비슷했지 대륙의 다른 팀들은 아예 상대가 못됐다. 1871년에 첫 축구 A매치를 거두고 나서 1929년에서야 스페인이 처음 잉글랜드를 깬 것이었다. 잉글랜드의 홈에서 비영국팀의 승리가 나오기 까지는 또 24년이 걸렸다.
  • [6] 1950년대에는 선수로, 60년대에는 감독으로 레알 마드리드를 이끈 전설적인 감독
  • [7] 지안피에로 콤비등과 같이 찍은 사진을 보면 콤비의 머리가 사모라의 눈 밑에 있는 수준이다
  • [8] 사모라 상은 1958년 마르카에 의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기록으로 평가하는 상이므로 초대 수상자를 정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고 역시나 초대 수상자는 바로 사모라이다. 여담으로 2013년 현대 최다 수상자는 빅토르 발데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