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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

last modified: 2015-04-05 09:07:39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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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의 전 축구선수, 축구 지도자
2. 대한민국의 前 야구선수, 現 삼성 라이온즈 코치

1. 한국의 전 축구선수, 축구 지도자

유치원장.jpg
[JPG image (Unknown)]

유치원장은 내 운명

1998년~1999년 K리그 감독상
차만(산 대우 로열즈) 김 호(수원 삼성 블루윙즈) 조광래(안양 LG 치타즈)

이름 김호 (金皓 / Kim Ho)
국적 대한민국
생년월일 1944년 11월 24일
출신지 경상남도 통영시
신체조건 177cm
선수시절 소속팀 제일모직 (1964~1968)
해병대(군복무)
양지축구단
상업은행
스태프 커리어 동래고등학교 (1975)
한일은행 (1983~1987)
현대 호랑이 (1988~1991)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1992~1994)
수원 삼성 블루윙즈 (1995~2003)
대전 시티즌 (2007~2009)
선수시절 포지션 센터백
국가대표 71경기

1944년 11월 24일생.
젊은 시절에는 터프한 수비가 매력적인 한국 축구 간판 센터백이었다. 1960~70년대 공격수 이회택과 함께 대표팀을 이끌었던 장본인. 지도자의 길에 들어서서는 '성공한 선수는 성공한 지도자가 되기 힘들다'는 편견을 깨뜨린 인물.

1992년 7월 사상 처음으로 국가대표 감독으로 정식계약을 맺으며 연봉 3천만원 및 추가 승리수당 및 여러 보너스 관련 계약을 했다. 그 전까지 한국 축구 국대 감독들은 대회때마다 돌아가면서 무보수로 일하던 명예직으로 교통비,식사비나 보너스가 나오긴 했지만 연봉이나 계약서는 없었다.[1]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도하의 기적 끝에 힘겹게 진출한 1994년 미국 월드컵 본선에서 댈러스,휴스턴의 무더위와 용병술로 스페인과 2:2 무승부, 독일과 3:2로 접전 끝에 패하는 등 명승부를 보여줬다. 국내감독으론 허정무 감독 이전 월드컵 본선에서 가장 선전했다고 평가 받았으며 02년 히딩크 감독 이전에는 제일 잘했던 감독으로 축구팬들이 떠올리는 인물.

다만 이 무렵에는 스페인과 독일전은 잘했는데 1승을 충분히 거둘 상대인 볼리비아를 이기지 못하고 무재배를 이뤄 16강진출에 실패한 점으로 까였다. 결국 월드컵이 끝나고 16강에 오르지 못해 죄송하다며 스스로 국대 감독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장점이 있다면 고졸 출신 감독인지라 선수 선발에 있어서 흔히 고질적인 문제인 고려대,연세대 라인을 타지 앉았다. 기존의 감독들은 거의 연세대 아니면 고려대 출신인지라 이 쪽 계열이 버프를.. 김호 본인은 지금에와서 인터뷰를 하길 동래고 시절부터 지도했던 애제자 윤성효를 데리고 가지 못한게 아쉽다고 인터뷰 했다. 잡음이 나올까봐 국가대표로 월드컵에 데려가지 앉았다고 한다.

프로에서는 1995년부터 수원 삼성 블루윙즈 감독을 맡으며 K리그 전관왕, 아시안클럽컵(현 AFC 챔피언스리그) 2연패를 기록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K리그, 대한화재컵, 아디다스컵, 슈퍼컵 등 K리그 대회를 모두 우승한 1999년의 수원은 K리그 역사상 가장 강력한 팀 중 하나로 손꼽힌다. 당시 자신이 직접 키운 김호의 아이들은 스쿼드가 후덜덜했었다.

당시 리그 대다수 팀이 3백 시스템을 채택했으나 수원에서 4백을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발레리 니폼니시 감독이 조련한 부천 SK[2]와 벌인 시합들은 지금도 K리그 팬들이 꼽는 명승부다.

조광래 감독이 수석코치로서 김호 감독을 보좌했으나 불화를 겪고 1998년 안양 LG[3] 감독으로 옮겼다. 오늘날 전설로 전해지는 지지대 더비에는 이런 두 감독의 감정다툼도 깔려있었다.[4] 원래 김호 감독이 물러난 뒤 차기 수원 감독은 조광래 수석코치가 물려받기로 했는데 김호 감독이 이를 반대해 사이가 틀어졌다 카더라. 그러나 현재는 조광래가 국가대표 감독이 될때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등 사이가 좋다.

하지만 김호 감독이 남긴 가장 큰 업적은 수원 시절 김호의 아이들이라 불리는, 1977년~1982년 사이에 태어난 고졸 신인들을 전략적으로 육성해서 한국 축구의 세대교체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비록 이들은 후임 차범근 감독과의 불화, 병역문제, 부상 등으로 지금은 국가대표에서 얼굴을 보기 힘들게 되었지만 그 성공 여부를 떠나서 양민학살을 통한 일등지향노선 대신 신인들을 전략적으로 키우려고 했던 그 폭넓은 시야는 존중받아야 할 것이다.

2003년 수원 삼성 감독에서 물러나며 은퇴했으나 2007년 7월 대전 시티즌 감독으로 부임하며 현역으로 복귀했다. 권집[5], 고창현[6] 등의 옛 제자들을 불러모으며 2007년에는 팀을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는 성과를 거둔다.[7] 그러나 2008년에는 감독 통산 200승을 기록했음에도 불구, 성적이 13위로 떨어졌고 2009년에도 시즌 초반 부진을 거듭하다가 결국 2009년 6월 사임했다. 사임 전 대전 구단 프론트와 갈등이 매우 심해 김호 측과 구단 측이 언론플레이를 하며 서로를 열심히 까댔다.

이와 별개로 김호는 대전팬들이 매우 싫어하는 감독이다. 옛 제자를 불러모으며 김형일-권집같은 망한 트레이드를 많이 일으켰고, 돈이 없는 대전과 맞지 않는 운영 정책을 펼치며 안 그래도 못 하는 대전을 더 구렁텅이에 빠트렸다. 가장 문제가 되는 대목은 바로 에이전트 비리 사건이다. 주로 디씨인사이드 국내 축구갤러리와 파투 커뮤니티 같은 하드코어 팬층이 모인 곳에서는 비리가 있다는 쪽이고, 그 외에는 검증 안된 소리라는 주장이다. 이들의 주장은 에이전트 비리가 있었다면 병주 감독처럼 검찰이 붙잡아 갔을텐데 왜 그러지 않았냐는 것이다. 하지만 김호가 무슨 휠체어 타고 나올 대기업 회장이거나 사장도 아니고 적당히 해먹었으면 검찰청이 건드릴 가치를 못 느꼈을 수도 있다.그래도 전 국대감독인데 잡아넣으면 뉴스에도 나오고 한건 했다고 자축했을 수도

이후 고향 통영시로 내려가 모교 통영중학교의 총감독으로 활동 중. 지방선거에서 무소속 두관 도지사의 선거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경남 FC의 전임 감독이자 김호 본인으로서는 애증의 관계인 조광래가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차기 경남 FC 감독 부임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2010년 11월 경남은 차기 감독을 공개 모집했고 12월 1일 FC서울 2군 감독을 역임한 최진한 감독이 부임하면서 없었던 얘기가 되었다.

2014년 7월, 홍명보 국가대표 축구 감독과 허정무 축구협회 부회장의 사퇴 이후, CBS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전화인터뷰에서 한국 축구 협회의 오래된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화제가 되었다. 김호 감독의 쓴소리에 대해 김현정 앵커가 걱정을 하자 "언론이 나를 보호해 주어야 한다"라고 했을 정도로 상당한 비판을 했다. 김호 "홍명보, 허정무는 꼬리..몸통은 축피아"

그러나 월드컵 직전에는 홍명보를 두고 나무랄데 없는 지도자라고 칭찬을 했다. 그리고 홍명보호가 출범 초창기부터 졸전을 거듭할 때도, 엔트으리로 우려를 살때도 제대로 쓴소리 한번 한적 없었다. 그러다 월드컵 끝나고 결과가 잘못되니 바로 태도 바꿔서 축협을 디스하고 나섰다.

일반적으로 국내축구판에서 김호 감독은 대표팀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 특히 2000년대 이후로는 이용수 전 기술위원장, 조광래 전 감독 등과 함께 비주류 계열로 분류된다. 정몽준 회장이 분명히 업적이 있지만[8][9], 지나치게 장기집권하면서 축구를 정치에 이용하고 있다고 비판했고, 매번 축구협회장 선거 때마다 반정몽준, 반조중연 후보를 지지했다.[10] 이회택 부회장의 추천으로 조광래가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가자 이를 적극 지지한 것도 이런 이유이다. 축구판 탕평책이었는데 조광래가 망쳐버렸지...

2. 대한민국의 前 야구선수, 現 삼성 라이온즈 코치

김호(야구) 항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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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그만큼 축구협회가 주먹구구 동네구멍가게식으로 굴러가고 있었다는 이야기. 이런 조직을 체계적으로 정비한게 정몽준이다.
  • [2] 연고지를 옮겨 지금은 제주 유나이티드.
  • [3] 연고지를 옮겨 지금은 FC서울.
  • [4] 여기에 기름을 부은 사건이 바로 서정원의 수원 삼성으로의 전격복귀였다.
  • [5] 트레이드 상대가 김형일이었다. 이후 김형일은 대표팀에 선발되어 남아공 월드컵 엔트리에도 포함(물론 출장수는 0이다.)되고 포항 스틸러스의 주장을 역임할 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펼친 반면 권집은 활약도 딱히 없었고 게다가 승부조작까지 했던 사실이 드러나며 완벽히 망한 트레이드.
  • [6] 알려진 것과 다르게 고종수는 최윤겸 감독이 데려왔다. 하지만 최윤겸 감독이 2007시즌 중반 프런트와 갈등을 일으키며 사퇴하였고, 그 후 김호 감독이 맡은 것이다.
  • [7] 김호 감독이 부임할 당시 대전 시티즌 분위기가 개판이라 가능성 없다는 판정을 받았으나(플레이오프 진출을 위해서 남은 5경기를 모두 이겨야 했다.) 남은 경기를 전부 이기면서 진출 성공.
  • [8] 소위 축구계 야당 중에서도 정몽준의 업적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동네구멍가계 수준으로 운영되던 축구협회를 연간 예산 천억원대의 거대조직으로 키워서 유소년 축구에 엄청난 투자를 가능하게 만든건 분명히 정몽준의 독보적인 업적이다.
  • [9] 사실 축구계 야당이란 사람들도 대부분 정몽준과 함께 일하다가 이런 저런 이유로 때려치고 나온 사람들이다. 축협 이사였던 신문선, 기술위원장이었던 이용수, 국가대표 감독이었던 김호 등등
  • [10] 가장 최근 선거에선 조중연도 정몽준 쪽과 결별하고 독자 후보를 내세워서 3파전 양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