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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규

last modified: 2015-02-18 09:38:20 Contributors

Contents

1. 축구 선수
1.1. 클럽
1.2. 국가대표
2. 영화 배우

1. 축구 선수


FC 서울 No.6
김진규 (金珍圭 / Kim Jin-gyu)
출생 1985년 2월 16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경상북도 영덕군
포지션 터백
신체조건 183cm, 80kg
등번호 FC 서울 - 6번
소속팀 전남 드래곤즈(2003~2004)
주빌로 이와타(2005~2006)
전남 드래곤즈(2007)
FC 서울(2007~2010)
롄 스더(2011)
반포레 고후(2011)
FC 서울(2012~)
국가대표 42경기, 3골

1.1. 클럽

한국축구선수. 2003년 전남 드래곤즈에서 데뷔하여, 2004년 AFC U-20 축구 선수권 대표팀 주장으로 선발되는 등 주목받다가 2005년 J리그의 주빌로 이와타로 이적하여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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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독일 월드컵 직후 박주영과 함께 이탈리에 세리에 A 토리노와 링크가 뜨기도 했지만 불발로 그쳤고, 2007시즌 J리그 생활을 청산하고 친정팀 전남 드래곤즈로 복귀했다. 전남에서 반시즌 정도 소화한 다음 곽태휘와 트레이드 되어 FC 서울로 적을 옮겼고 매 시즌 20경기 이상 꾸준히 출전하며 주전으로 뛰고있다.

전형적인 파이터 형 수비수로 터프한 몸싸움과 대인마크가 트레이드 마크이며 겉으로도 드러나는[1] 강력한 다리힘에서 나온 롱패스를 활용한 공격전개 능력이 좋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힘진규, 허벅진규 등이다. 프리킥도 곧잘 차는데 김진규의 프리킥은 프로 데뷔 후 지금까지 딱 세 번 들어간 실로 부정확한 물건으로[2], 삼동현의 골과 함께 지구멸망의 징조로 불렸다. 골키퍼나 수비진이 아닌 골대 뒤 관중들을 두렵게 하는 프리킥으로 유명하다.[3] 그래서 김치우나 몰리나가 주로 찬다. 경험이 쌓이고 수비진 고참이 되고 나서는 라인을 조율하는 커맨더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단점은 발이 느려서 발 빠르고 무게중심을 잘 활용하는 선수들에게 취약한 면모를 보인다는 점. FC 서울은 귀네슈 시절부터 다이렉트 패스를 통한 공격축구를 모토로 삼았고 주전 센터백인 김진규의 괜찮은 롱패스를 활용하는 방안으로 수비진을 끌어올리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김진규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선 아디나 김주영같이 발 빠르고 활동량 많은 동료 수비수와의 호흡이 필수다. 이외 다혈질인 성격탓에 불필요한 카드를 수집하거나 지나치게 거친 플레이로 눈총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도 있어 타 팀 팬들은 싫어하는 편이다. 나이 들어 후배 수비수들을 리드해야 할 위치가 되고나선 다소 나아졌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K리그에선 손꼽히는 뛰어난 수비수이다. 서울이 2007, 2009, 2012시즌 리그 최소실점, 2010시즌 최소실점 2위를 기록하는데는 김병지, 김용대, 아디 등 뛰어난 동료들의 공도 컸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팀의 중앙수비 라인을 책임진 김진규의 공이 컸다.

2011년 FA로 풀리자 이적료 없이 중국의 다롄 스더로 이적해 안정환과 한동안 한솥밥을 먹었다. 때마침 스트라이커 정조국도 프랑스 오세르로 이적했기에 순식간에 주축 선수들을 잃은 서울 팬들은 격하게 분노했다. 그나마 정조국은 더 큰 무대로 간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김진규는 K리그보다 한 수준 아래로 평가 받는 중국 리그로 이적하여 팬들의 분노가 더 심했다. K리그 디펜딩 챔피언 팀의 주전 센터백이 중국 리그로 이적한 것이니 리그 격 운운하며 눈에서 불을 뿝는 팬들 많았고 이 때문에 그가 승부조작 블랙리스트에 올라서 K리그 이적이 불가능하게 되어 중국으로 추방된 것이라는 인신공격성 낭설까지 떠돌았다.

이후 2011년 7월, 반 시즌만에 중국 생활을 청산하고 J리그 반포레 고후로 이적했으나 역시 오래 머물지 못했고 2012년 계약이 만료되자 FC 서울로 돌아왔다. 팬들은 오랫동안 호흡을 맞췄던 아디는 물론 김주영, 김동우 등 팀 내 젊은 선수들과의 조화를 기대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한동안 라이벌인 수원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줬다. 지금까지 수원을 맞아 자책골 2번과 함께 잦은 실책성 플레이를 보여주었으며 2012년 첫 라이벌전에서는 결정적인 찬스에서의 헤딩슛이 골문을 크게 빗겨나가며 팀의 0:2패래를 지켜봐야만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김진규는 일본 주빌로 이와타에서 뛰던 당시 수원과의 아시아 챔피온스리그 조별리그 경기에서 반칙으로 PK를 헌납한 적이 있었고 요행이 골키퍼의 선방으로 체면은 살렸으나 얼마후 높은 공에 헛발질을 하며 나드손에게 결승골을 허용하는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베테랑 선수지만 아무래도 수원과의 상성이 안 좋은듯. 8월 18일 벌어진 2012시즌 3번째 수원전에서도 페널티 박스안에서 파울을 범하며 페널티킥을 내줬고, 후반엔 공중볼 클리어링에 실패하는 결정적인 실책으로 실점의 빌미를 제공하며 0대2 완패의 주역이 되었다. 그러나 2013시즌 8월 3일에 열린 슈퍼매치에서는 몰리나의 프리킥을 헤딩 결승골로 연결시켜 팀에게 3년만의 슈퍼매치 승리를 안겼다. 자신의 자책골로 시작되었던 슈퍼매치 무승의 기록을 자신의 결승골로 끊어낸 것이다.

그리고 슈퍼매치에서 몇번 안좋은 모습을 뿐[4] 팀은 시즌내내 꾸준한 모습을 보이며 우승했고 김진규와 아디가 버틴 수비진은 최소 파울로 최소 실점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우승에 큰 공을 세웠다. 시즌 종료후 마음 편하게 상무에 입대해 13시즌은 2부리그에서 시작할 줄 알았으나 훈련소 입소 후 받은 재검에서 예전에 입은 오른쪽 무릎부상이 재발해 훈련소에서 나와[5] 수술을 마치고 재활에 들어갔고 FC 서울 전지훈련에 참가했다.

시즌 초반에는 수술 여파로 폼이 떨어졌고 파트너 김주영도 동반 부진하는 바람에 서울 수비진은 완전히 붕괴, 7경기 연속 무승의 원흉이 되었으나 시즌 중반 폼이 어느정도 회복되면서 다시 준수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십자인대 부상이후 주력이 예전만 못한 김주영 보다는 노련한 아디와 호흡을 맞출때 더 준수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팀의 주포 데얀이 부상 여파로 전해만 못한 가운데 갑자기 공격본능을 폭발, 17라운드 성남전부터 21라운드 수원전까지 5경기 연속 공격포인트(5경기 4골 1도움)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2012시즌까지 통산 172경기 9골을 기록하던 선수가 2013시즌 20경기에서 6골을 기록했다. 최종성적은 35경기 6골 1도움. 14시즌에는 기존의 김주영, 새로 영입된 이웅희와 함께 쓰리백을 이뤄 출전하고 있다. 시즌 초반에는 적응에 애를 먹으며 고생했으나 시즌 중반이 되자 쓰리백에 훌룡하게 적응해 공격수들이 부진한 와중에도 좋은 폼을 보여주었다. 시즌 기록은 33경기 출장 2골 2도움.

1.2.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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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2006년 딕 아드보카트 감독 선임 이후[6] 대표팀에 자주 얼굴을 비추었고 2006년 독일월드컵에 주전 센터백으로 출장했다.[7]
핌 베어백 감독 재임 시절에는 부동의 국대 주전 센터백이었으나 2007년 아시안컵 포함한 성인 대표팀 무대, 올림픽 대표, K리그 등 수십 경기에 번갈아 가며 출장하며 굴려지다 부상으로 폼이 떨어져 고생했다. 허정무 감독 부임 이후 곽태휘, 조용형이 부상하면서 2008년 올림픽 대표팀 이후로 한동안 태극마크와는 인연이 없다가 최강희 감독 부임한 12년 8월 5년만에 태극마크를 달았다.

2. 영화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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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1922~1998)

대한민국의 1960년대 전설적인 영화배우. 그의 인기는 1960년대 최고 인기 스타였던 신성일, 최무룡, 신영균과 비교해 뒤지지 않았을 정도.[8] 1950년대 중반 주연으로 올라선 그는 다른 배우들과 달리 지적이고 부드러운 이미지를 통해 여성 관객들의 인기를 얻었다. 지금 배우와 비교하자면 박해일이나 한석규와 비슷한 스타일. 특히 대한민국 영화 사상 손가락 안에 드는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이범선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1961년작 영화 오발탄의 주연을 맡기도 했다. 오발탄에서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를 뽑고 피를 흘리며 택시를 타고 뇌까리는 '가자'는 1960년대 영화 최고의 장면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그리고 같은 해에 찍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사랑방 손님 역할로도 유명하다. 모르겠으면 옥희 옆에서 느끼한 목소리를 내는 아저씨로 기억하면 된다 1965년에는 벙어리 삼룡이의 주연을 맡으며 최고 전성기를 보냈다. 덕분에 1960년대에 받은 남우주연상만 7개다.(부일 5개, 청룡 2개) 자신이 감독한 영화 '종자돈'의 실패 이후 이혼 등의 가정사로 곤혹을 겪었고 이만희 감독[9]의 마지막 작품인 1975년 삼포 가는 길이 사실상 마지막 히트작이 되었다. 신사적인 이미지와 달리 여자 관계가 무척 복잡했고, 술만 먹으면 개로 변했다고 그의 2번째 부인이 쓴 책에 나온다.

여담으로 상당히 이순신을 좋아했는지 1971년에 '성웅 이순신'을 찍고 말아먹은 뒤 1978년 '난중일기'를 또 찍기도 했다.
1987년 '하녀의 방'을 마지막으로 은퇴, 1998년 타계했다.

장녀 김진아도 배우였으며 장남 진근도 배우로 활동 중이다.자녀들도 진자 돌림 그러나 김진아는 2014년 8월 20일 암으로 하와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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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다리힘이 중요한 축구선수들 중에서도 키에 비해 허벅지 두꺼운걸로 유명하다. 맞는 바지가 없어 36인치를 억지로 입는다고.
  • [2] 그나마 한번도 2013 아챔에서 베갈타 센다이의 골키퍼가 알을 까서 들어간 골이다.
  • [3]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보러가기
  • [4] 사실 안좋았다고 하기도 뭐한게 실수가 좀 있어서 그렇지 전체적으론 꾸준했다. 특히 라돈치치-스테보라는 장신 트윈타워를 저지하는데는 김진규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 [5] 이 뜻밖의 면제로 혜택을 입은 선수가 경남의 이용기. 밀렸다가 김진규가 빠지면서 남은 자리에 들어갔다.
  • [6] 성인대표팀 데뷔는 2004년 7월 14일 트리니다드 토바고 전에서 했다.
  • [7] 첫경기 토고전에선 김진규-김영철-최진철의 쓰리백이었고 윙백인 이영표와 송종국도 수비적인 플레이로 일관해 전반전 내내 공격이 안풀렸다.
  • [8] 다만 1967년 감독을 맡은 영화 '종자돈'의 실패 이후, 1970년대에 접어든 이후에는 신성일이나 최무룡이 최고의 자리를 유지한 반면 김진규는 하락세를 탔고 1970년대 중후반 이후에는 거의 스크린에서 보기 힘들어졌다.
  • [9] 배우 혜영(1962년생)의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