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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스 히딩크

last modified: 2015-11-06 17:09:59 Contributors


전설로 남을 그의 어퍼컷.


수염을 길렀을 때의 모습. 간지폭풍 서기장 동지를 닮은 듯 하기도…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거스 히딩크 (Guus Hiddink)
생년월일 1946년 11월 8일
국적 네덜란드 대한민국[1]
출신지 헬데를란트 주 파르세벌트
포지션 미드필더
소속팀 데 그라프샤프 (플레잉 코치) (1967~1970)
PSV 아인트호벤 (1970~1972)
데 그라프샤프 (1972~1976)
NEC (1977~1981)
워싱턴 디플로매츠 (임대) (1978)[2]
새너제이 어스퀘이크스 (임대) (1980)[3]
데 그라프샤프 (1981~1982)
지도자 데 그라프샤프 수석코치 (1982~1984)
PSV 아인트호벤 수석코치 (1984~1987)
PSV 아인트호벤 (1987~1990)
페네르바흐체 SK (1990~1991)
발렌시아 CF (1991~1994)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1994~1998)
레알 마드리드 CF (1998~1999)[4]
레알 베티스 (2000)[5]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2001~2002)
PSV 아인트호벤 (2002~2006)
호주 축구 국가대표팀 (2005~2006)
러시아 축구 국가대표팀 (2006~2010)
첼시 FC (2009)[6]
터키 축구 국가대표팀 (2010~2011)
FC 안지 마하치칼라 (2012~2013)[7]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2014~)


Contents

1. 소개
2. 선수 커리어
3. 감독 커리어
3.1. PSV 아인트호벤
3.2. 네덜란드 국가대표팀
3.3. 레알 마드리드, 레알 베티스
3.4.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3.4.1. 취임
3.4.2. 오대영 감독
3.4.3. 우리는 세계를 놀라게 할 것이다
3.4.4. 히딩크의 전설
3.5. 다시 PSV 아인트호벤으로
3.6. 호주 축구 국가대표팀
3.7. 러시아 축구 국가대표팀첼시 (감독대행)
3.8. 2009년 이후
3.9. 네덜란드 국가대표팀 감독 시즌 2
4. 징크스
5. 한국과의 관계
5.1. 한국에서의 위상과 평가
5.2. 한국에 대한 애정
6. 트리비아
7. 감독 기록
7.1. 리그 기록
7.2. 대회 기록

1. 소개

Guus Hiddink
대한민국 축구사에 길이남을 명장
대한민국을 월드컵 사상 최초로 4강으로 올려놓은이런시절이 언제 다시 올까감독
상암 희씨의 시초

네덜란드 출신의 축구 감독. 네덜란드어 발음으로는 휘스 히딩크에 가깝지만[8] 본인의 요청으로 대한민국 언론에서는 영어 발음대로 '거스' 히딩크라 표기한다. 다만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당시 휘스 또는 후스 히딩크라고 표기하던 언론도 있긴 했다. 한국팬들은 못할때 '오대영'이라 부르다가 전설이 아닌 레전드를 보여주고 나자 '구국의 명장 희동구'라고 칭송했다. 참고로 중화권에서는 후이딩커(暉定克)이라고 표기했다.

히딩크의 가문은 고향인 파셰펠트에서 수백년간 뿌리를 내린 명성이 있는 집안이라고 한다. 그의 아버지 게트 히딩크는 2차 대전 당시 겉으론 시청 공무원직을 수행하며 암암리에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는데, 직접 총을 들고 싸우진 않았지만, 유태인들을 숨겨주거나(!) 배식표를 빼돌려 그들의 끼니를 해결해 주었고, 독일군이 배급하는 식량을 빼돌려 레지스탕스의 군량을 조달하였다. 거기다 적지에 떨어진 미군 조종사들을 중립국으로 피신시키는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오오, 용자! 그 때문에 전쟁이 끝나고 아이젠하워(!)로부터 감사장을 전달받기도 했다고.

여섯 형제의 3남으로 태어난 히딩크는 어린 시절 개구쟁이로 학교 수업을 자주 땡땡이(...)를 치곤 했다고 한다. 사냥을 좋아하는 외할아버지가 부추겨서라는데, 그 때문에 외할아버지로부터 모험심이나 결단력을 전수받았다고. 아무튼 이런 개구쟁이다 보니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공차는 걸 좋아해서 결국 축구선수가 되었다[9].

선수 시절에는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으나, 감독으로서는 맡는 팀마다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결과를 내놓았다. 이를 두고 히딩크 매직이라 한다. 20세 연하의 흑인 엘리자베스 피나스가 여자 친구이다.[10][11]여자친구 때문에 신문선에게 까였다. 근데 신문선은 월드컵 끝나고 히딩크 책도 썼잖아. 철면피?

2. 선수 커리어

똑…또또똑…똑같다

히딩크는 처음부터 프로선수가 되고자 다른 선수들처럼 유스팀에 입단해서 프로선수가 된 것이 아니라 네덜란드 스포츠 전문대학(CIOS)에 입학하여 지도자를 목표로 했다고 한다. CIOS 졸업 후 2급 지도자 자격증을 취득,[12] 데 그라프샤프의 코치로 부임했지만 나이도 스물이고 기량도 괜찮았기 때문에 감독이 선수 겸 코치로 활동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의를 해 곧바로 수락했다고 한다. 포지션은 중앙 미드필더.

1960년대 당시,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아약스PSV같은 강팀을 제외하곤 급료도 부족한 편이어서 선수들 대부분이 오전에 일하고 오후에 훈련하는 투잡을 뛰었다고 하는데 히딩크는 코치직을 겸임하고 있었으므로, 오전에 유소년을 지도하고 오후에 팀 훈련에 참가했다고 한다. 더불어 야간에 체육 전문대학에 입학하여, 체육교사 준비도 같이 했다고. 3시즌 동안 데 그랴프샤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자 PSV로 이적하였는데 주전 경쟁이 심하여 제대로 출전하지도 못했다. 다시 데 그랴프샤프로 이적했고, 후에 나이메이건으로 이적했다.

나이메이건 시절에는 체육교사와 선수를 겸임했는데 특수학교에서 장애아들을 지도하면서 얻은 경험[13]이 훗날 감독 생활을 할 때 많은 도움[14]이 됐다고 한다. 나이메이건 시절에는 시즌 종료 후 즉, 5월부터 다음 시즌이 시작되는 9월 즈음까지 미국에 잠시 임대되어 미국리그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당시 룸메이트가 조지 베스트였다고... 나이메이건에서 은퇴 후 다시 데 그라프샤프로 돌아와 코치 생활을 시작했지만 선수가 부족한 탓에 감독의 부탁으로 1시즌 더 선수생활을 하게 됐다. 포지션은 리베로. 하지만 1981/82 시즌을 끝으로 완전하게 은퇴한다.

3. 감독 커리어

3.1. PSV 아인트호벤


정식감독이 되자마자 트레블

은퇴 후 1982년 데 그라프샤프에서 수석코치로 지도자 커리어를 시작한 히딩크는 1984년 PSV 아인트호벤 수석코치로 이동했고, 1986/87 시즌 도중, 감독이 선수들과의 불화로 해임되자 감독 대행을 맡아 당해에 리그우승을 이뤄냈다.
그 뒤, 정식감독으로 취임하여 트레블을 달성하였다.[15]그 후로도 리그 우승을 두 번, 2위를 한번 달성하여 아인트호벤 역사에 있어 전설적인 감독이 되었다. 현존하는 감독들 가운데 유럽 클럽 트레블을 이룬 일곱 명중 한명.[16]

그 뒤 1990년 터키페네르바흐체 SK로, 이듬해에는 스페인 발렌시아 C.F.로 자리를 옮긴다. 그러나 이 두 팀에서는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했고, 1994년 12월 네덜란드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한다.[17]

3.2. 네덜란드 국가대표팀


1998 월드컵에서 로날드 쿠만(당시 수석코치)과 함께

4강 징크스의 시작.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을 맡은 그는 선수들을 휘어잡기 위해 많은 노력을 가했고, 그 예로 항명을 했던 에드가 다비즈는 유로 1996 대회 도중에 쫓겨났다.[18] 물론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19] 그러나 이 때 프랑스와의 8강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패배하며 탈락했다. 특히 당시 조별 예선에서 웸블리에서 7만 6천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홈팀 잉글랜드에게 4:1로 굴욕적인 대패를 당하였기 때문에[20] 네덜란드 국민들에게 엄청난 욕을 먹기도 했었다.[21]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조별 예선에서 우리나라 국대를 5:0 떡실신시켰던 경력이 있다.[22][23] 사실 조별 예선에서는 벨기에멕시코에게는 비겼을 정도로 고전했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 아르헨티나를 격파해 4강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하며 오렌지 군단의 우승이 보이는 듯 했으나 브라질과의 승부차기에서 패배한 뒤 크로아티아와의 3, 4위 전에서도 패배하며 4위로 마감하였다. 이후 감독직 사임.

당시 네덜란드의 전력으로 유로 8강 ㅡ 월드컵 4위는 사실 기대 이하의 성적이었다. 이후 유로 2000을 지휘했던 프랑크 레이카르트도 4강에서 그치자 바로 사임했을 정도. 하지만 그 뒤에도 쭉 결승을 못 갔던 걸 보면 그게 한계였을지도 모른다

3.3. 레알 마드리드, 레알 베티스



사임 직후 1998년 7월 15일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으로 부임한다.[24] 팀 역사상 최초로 도요타 인터컨티넨탈 컵[25]을 들어올렸지만[26] 그게 다였다.(...) 히딩크 감독 자서전에는 수뇌부와의 갈등 때문에 본인 스스로 사임한 걸로 나와있다. 물론 수뇌부와의 마찰이 심하기는 했다.[27] 그러나 부임 기간 동안의 성적도 19승 4무 11패로 팀에 걸맞지 않은 성적이었고 무엇보다 엘 클리시코에서 라이벌 바르셀로나에게 완패를 당해 일곱 달 만에 경질당한 것이다.

그 뒤 무직으로 지내다가 2000년 2월 5일 레알 베티스의 감독으로 갑작스럽게 부임한다. 그러나 이 시절은 정말 흑역사 오브 흑역사로, 1승 6무 6패라는 처참한 성적을 기록하고 짤린다. 이 뒤 셀틱과 같은 팀에서 오퍼가 왔지만, 뜻밖에도 그는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감독직을 수락한다.[28] 삼현 축구협회 사무총장이 "이미 알려진 강팀을 이끌고 성적내는 것과, 한국팀을 이끌고 성적 내는 것의 차이점"을 이야기하며, 설득낚시하는데 성공한 것.[29][30]

3.4.1. 취임


이 당시 대한민국 사정을 이야기해보자면 차범근을 앞세운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에서는 우연히도 네덜란드를 이끌던 히딩크에게 완전히 털렸고, 그 이후 크고 작은 대회들에서 광탈의 향연이 연속되어 월드컵에 나가 단 한 경기도 이겨 보지 못하는 굴욕이 계속되며 이대로 가다간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서 월드컵 역사상 최초의 16강 진출 실패 개최국이 되겠다며 비난 여론이 벌떼처럼 들끓었다. 게다가 단독 개최도 아니고 일본과의 공동 개최라는 상황이었으니 한일전 특유의 정서도 겹쳐 국민들의 불안감은 더욱 심했다. 심지어 김대중 대통령까지 나서서 대한축구협회와 문화관광부를 압박하였다.

당시 기술위원장으로 일했던 이용수 해설위원의 회상에 의하면, 당시 그가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시작했던 하루 일과가 대국민 사과문을 작성하고 수정하는 거였다고. 심지어 정몽준은 농담으로 이용수에게 "대표팀이 16강에 못 든다면, 우리 둘 중 하나는 한강에서 뛰어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할 정도였다.

이번 월드컵 국대의 운명을 '외국인 감독 영입'이라는 승부수에 걸기로 한 이들은 어차피 지를거면 화끈하게 지르자며 세계 초일류급 감독을 영입할 계획을 세우고 프랑스 국대에게 월드컵 우승을 안겨 준 메 자케 감독과 접촉하나 실패했고, 영입 2순위로 거론된 히딩크가 대한민국 감독직을 수락하며 한 배를 타게 된다. 사실 이 시절 히딩크는 한물 간 감독으로 평가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선택한 대한민국이나 이를 받아들인 히딩크 모두 도박수를 던진 셈이었다[31].

3.4.2. 오대영 감독

2000년 12월 20일 부임한 그는 처음부터 거센 비판에 휩싸였다. 심지어 2001년 초반, K리그 경기를 둘러보던 자리에서 한숨을 쉬었다고 기자들은 한국 프로축구를 비하했다며 1면(스포츠 조선)에 실어가면서 정신없이 씹어댔다. 평소에 'K리그는 거칠다', '지루하다', '관중없다' 등 온갖 구실로 비하하던 게 누구인데?

대구스타디움에서 열렸던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 개막전에서 당시 세계 최강 프랑스에 0:5로 대패했고, 이후 남은 2경기를 이겼음에도[32] 골 득실차에 밀려 4강 진출에 실패했는데 이것도 큰 비판을 받았다. 같은 대회에서 일본이 준우승했기 때문.[33]

거기다 같은 해 광복절, 유럽 원정을 가서 브르노에서 열렸던 체코전에 역시 0:5로 대패하면서 오대영 감독이라 조롱하는 별명이 붙었다. 이랬던 인간들이 훗날 히딩크를 신처럼 떠받들며 후임 감독들을 까댔다는 건 안 자랑. 당시 언론들은 비슷한 시기 오스트레일리아를 3-0으로 이긴 일본[34] 견주면서 더 욕했다. 당시 체코 1진을 상대로 원정 가서 당한 것과 오스트레일리아를 안방에서 이긴 것을 비교하는 것은 어떻게 봐도 무리수거늘...

상당수 축구인과 관련인사의 입장도 부정적이었다.故 이주일은 "외국인 감독 하나 데려오면 뭐가 달라지나? 그 으로 유망주 육성을 해야지!" 대놓고 비난했고, 국내 축구 인사들 대부분 '쓸모없는 평가전은 그만하고 단체 합숙하며 조직력을 키워야 한다'는 식으로 비난을 했다.

당시 히딩크를 옹호한 사람은 훗날 붉은 악마의 중추로 활약한 극소수 축구 팬들과, 당시 기술위원장이였던 이용수, 프랑스에서 히딩크에게 털렸던 차범근 전 국가대표팀 감독, 그리고 정몽준 축협회장과 축협 인사들 정도였다.

이런 온갖 비난과 헐뜯음 속에서도 그는 묵묵히 하던 일을 다했고 열심히 선수들을 물색하고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체코에게 대패했을 땐 되려 떳떳하게 "강호에게 크게 진다는 게 부끄러운 게 아니다. 당신들(기자들)은 대한민국 축구를 굉장히 수준 높다고 멋대로 착각하고 있다." 며 씹어주었고 진실을 말해서인지 언론에겐 틈만 나면 비난받곤 했다. 근데 기자들이 언제 그런거 따져가면 씹어댔나? 그냥 씹고 보는 거지 뭐.

3.4.3. 우리는 세계를 놀라게 할 것이다

2001년 12월 죽음의 조라 할 만한 조 편성이 이뤄지자 그야말로 여론은 망했어요. 루이스 피구 등의 황금 세대가 포진한 FIFA 랭킹 4위의 우승 후보 포르투갈에 유럽 예선을 가장 먼저 통과한 폴란드, 그나마 만만한 미국마저도 FIFA 랭킹 13위의 북중미 강호... 거의 광탈 예약이라며 개최국이 홈에서 예선 탈락하게 생겼다는 여론이 대부분이었고 역시 온갖 흠집잡기가 이어졌다.

2002년 초반 북중미 골드컵에서 쿠바와 비기자 조중연 당시 축구협회 부회장은 스포츠조선과의 인터뷰에서 히딩크 해임안을 논의하겠다고까지 했다. 그나마 이 대회에서 4강까지 진출하면서 이 얘기는 없던 일로... 하지만 이 부분은 어느 정도 걸러 들을 필요가 있다. 이미 대표팀 감독은 대안이 없던 상황에서 히딩크를 뽑은 거고 당시에는 시기가 이미 2002년이라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다. 그리고 실세인 정몽준 축구협회장의 발언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여론무마용 인터뷰에 가깝다고 봐야할 듯. 여담으로 당시 경기력 자체는 상당히 좋지 않았다. 연습경기에서 LA 갤럭시에 0:1로 패한 것을 시작으로 예선 미국전 1:2 패, 쿠바전 0:0 무(1무 1패 쿠바에 다득점에 앞서 2위로 8강행), 8강 멕시코전 0:0(승부차기 4:2승), 4강 코스타리카전 1:3패, 3-4위전 캐나다전 1:2패로 총 2무 3패를 해놓고도 4위... 2년전인 2000년 골드컵때는(당시 감독은 허정무) 예선에서 2무승부 하고도 추첨에서 캐나다에게 져서 8강도 못가고 그 캐나다가 우승까지 먹었던 걸 본다면...[35]

이와 상관없이 2002년 3월, 히딩크는 유럽 전지훈련 도중 가진 외신과의 기자회견에서 "세계를 놀라게 하겠다." 며 다가올 월드컵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댁 실력에 그게 가능하겠슈? 아놔~ ㅋㅋㅋ"... 국내여론도 별반 다르지않아 잘해야 1승, 기적이 일어나야 16강이라며 큰 소리 좀 그만치라는 비난여론이 대다수였다. 그러나 히딩크는 아랑곳하지 않고 월드컵 개막일을 50일 앞둔 기자회견에서는 "현재 16강 가능성은 50%다. 매일 1%씩 올리면 월드컵 개막일인 5월 31일에는 지금의 가능성이 100%가 될 것이다." 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월드컵을 앞두고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프랑스와 연달아 가진 평가전에서 결과는 1승 1무 1패. 스코틀랜드에게는 4-1 대승을 거뒀고, 잉글랜드와는 1-1 무승부, 프랑스에게는 2-3으로 석패했다.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대승을 거둘 때만 해도 "시차적응도 안된 애들을 데리고 무의미한 승리를 거뒀다." 며 애써 깎아내리던 언론들도 잉글랜드, 프랑스와의 대결에서 인상적인 경기력을 선보이자 "어라? 이거 좀 해볼만 한데?" 라는 쪽으로 급선회하게 된다. 물론 여전히 우린 안될거야 라는 의견도 많았다.[36]

3.4.4. 히딩크의 전설


그리고, 한국 축구사에 다시 없을 전설이 시작되었다.

youtube(wCzNlQum7Q4)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조별 예선에서 폴란드를 이기면서 대한민국월드컵 사상 첫 승을 따 냈고 미국과 비긴 상황에서 포르투갈을 만나 1:0 승을 거두고 16강 진출을 확정짓는다. 참고로 이 포르투갈 전에서 박지성의 그 유명한 결승골이 터졌는데, 이때 박지성이 팀동료들을 모두 뿌리치고 히딩크에게 달려가 둘이 얼싸안는 장면은 신물나도록 패러디된 이 월드컵의 또다른 명장면. 물론 트레이드 마크인 어퍼컷 세레머니도 빼먹지 않았다.

그후 대한민국은 16강에서 이탈리아와 만나게 되었다. 비록 G조에서 졸전 끝에 겨우겨우 2위로 16강에 진출하긴 했으나[37] 여전히 우승후보로 꼽을 수 있는 팀이었기에 만만치 않은 대결이었다. 그러나 이왕 16강에 올라온거 8강에도 가보자는 자신감도 있었고, 프란체스코 토티의 거만한 인터뷰[38]도 겹치면서 분위기는 달아올랐다.

운명의 16강전. 과연 시작부터 양팀이 맹렬하게 붙기 시작했고 전반 3분 박지성이 상대 진영을 파고들자 코코가 태클을 걸어 프리킥을 얻어낸다. 송종국이 문전으로 프리킥을 날리지만 수비수 크리스티안 파누치가 헤딩으로 걷어내는데, 페널티킥이 선언되었다! 파누치가 공을 걷어내기 직전 설기현의 옷을 잡아채 넘어뜨리는 것을 주심이 정확히 캐치한 것. 안정환이 키커로 나서지만 지안루이지 부폰에게 막히고, 얼마 못가 이탈리아크리스티안 비에리가 선제 골을 넣은 뒤 토티의 도발을 실현시키겠다는 의미인지 바로 수비진형으로 바꿨다.

이후 진흙탕 같은 경기가 계속되지만 좀처럼 이탈리아 수비는 흔들리지 않았고, 이에 히딩크는 홍명보를 빼고 차두리를 투입하는 모험을 감행한다. 이것이 그대로 적중하여 점차 공격이 되살아나기 시작했고 후반 43분 문전 혼전중에 파누치가 공을 제대로 잡지 못한 것을 마침 앞에 있던 설기현이 바로 차넣어 동점골을 기록한다. 이후 1분만에 비에리가 노마크로 공을 잡지만 허공으로 날리고, 추가시간 종료 직전 차두리버헤드킥을 부폰이 정면에서 잡아내면서 경기는 연장전에 돌입한다.

연장 전반 황선홍의 그림같은 프리킥을 부폰이 간신히 잡아내고 토티가 송종국과의 경합 끝에 페널티 지역에서 쓰러지지만 주심은 이를 시뮬레이션으로 판단해 경고누적으로 퇴장시킨다. 그리고 연장 후반 설기현의 패스미스로 인한 실점 위기를 이운재가 잘 넘긴 뒤, 연장 후반 12분 이영표가 올린 크로스를 안정환이 기막힌 점프력으로 헤딩하여 골든골을 성공시킨다. 이 안정환의 골은 대한민국에서는 영웅으로 만든 골이었지만 세리에 A 페루자에서 방출당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탈리아를 꺾은 대한민국은 8강에서 이미 월드컵에서 2번 만난 적이 있는 스페인을 만나게 된다. 스페인의 매서운 공격이 경기 내내 계속되었다. 대한민국의 수비진을 뒤흔든 스페인의 공격수 호아킨 산체스는 계속해서 슈팅을 시도했으나 이운재의 선방과 슈퍼 세이브가 실점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120분간의 사투가 끝나고 승부차기에 돌입해 5:3으로 대한민국이 승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호아킨 산체스는 이 승부차기에도 이운재의 선방에 골을 넣지 못했다. 호아킨 : 부들부들

그러나 2번이나 연장전을 간 탓에 체력적인 한계를 드러냈고[39] 결국 4강에서는 독일미하엘 발락에게 결승 골을 내주며 패배했다. 경기만 보면 이탈리아, 스페인보다 독일전이 더 이길 만했기 때문이다. 이미 대표팀은 16강과 8강에서의 필사적인 경기로 체력이 바닥인 상황이라 독일을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체력이 좀만 남아있었더라면...[40] 이어진 3, 4위전에서는 터키를 만나 11초만에 실점하는[41] 경기 끝에 2:3으로 패배. 종합 4위로 전설적인 월드컵을 마감하였다.

당시 경기들을 보면 현재의 국가대표보다 매우 스피드 있는 경기력이 돋보이는데 홈 어드벤티지의 이점을 이용한 히딩크 감독이 경기 전 기장잔디를 짧게 손질하고 스프링쿨러를 가동해달라는 주문을 넣었기 때문. 이유는 축구화의 스터드에 잔디가 길수록 빠른 볼컨트롤과 스피드에 방해가 되는 요인이라는 것이 그 이유. 이 사실을 2003년에 출간한 자서전에서 밝힌적이 있다.[42]

그 당시 대한민국이 지역예선을 거쳤을 경우 본선 진출조차 호락호락하지 않은 전력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런 결과는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웠다.[43] 거기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이전 참가했던 5번의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은 조별 예선 통과는 커녕 단 한 경기도 이겨 보지 못한광속탈락했다는 점이다.[44] 조 4위인 경우가 다반사였고 그나마 미국 월드컵에서 조 3위로 탈락한게 가장 나은 성적... 본선 진출은 커녕 조별 예선에서 단 한경기도 못 이겨 본 팀이 죽음의 조에서 살아 남아 우승 후보로 꼽히는 강호들을 제치고 4위가 된걸 생각해보자. 그 당시에 인간 승리, 인생 역전 소리가 나왔던 것이 결코 오버가 아니다.

대다수의 해외 언론 및 전문가들은 축구에서 변방인 아시아 국가의 전력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이는 국내여론도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얻어낸 결과였기에 더더욱 값졌다.

물론 대한민국이 역대 홈 팀들 중에 가장 오랫동안 준비했던 팀이었고, 유례 없을 정도로 엄청난 지원과 장기 합숙 훈련을 하긴 했었다. 히딩크 부임 기간에만 2001년 1월 홍콩오만, 2월에는 UAE, 4월에는 이집트, 8월에는 네덜란드, 2002년 1월에는 미국, 2월에는 우루과이, 3월에는 스페인에서 장기 전지훈련을 가졌고 자신이 원하는 코칭 스탭을 꾸리는 등 많은 지원을 받았다. 히딩크 이전이나 이후의 대한민국 감독 뿐만이 아니라 타 국가 대표팀의 감독들을 봐도 이 정도의 지원을 받는 것은 유례가 없긴 했다. 그만큼 2002 월드컵이 우리나라에게는 절박했던 것.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16강으로 이끈 다음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I am still hungry)."라는 발언을 했는데, 이는 붉은 악마의 카드 섹션이었던 '꿈★은 이루어진다'와 함께 오랫동안 기억될 2002년의 인상적인 명언으로 자리잡았다.

2002 월드컵에서의 공로로 외국인 경기지도자 최초로 대한민국 최고의 체육 훈장인 청룡장을 받았다.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을 맡기 전까지 레알 베티스 같은 팀에서도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는 등 자신의 감독 커리어 중 가장 암울한 시기를 보내던 히딩크 감독은 대한민국의 4강 신화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당연히 계약연장 얘기가 나왔지만 담담하게 감독직을 내려놓고 떠났다.[45] 박수칠 때 떠나라

3.5. 다시 PSV 아인트호벤으로


히딩크가 원했던 행선지는 고향 PSV. 2002년 8월 1일 그는 아인트호벤의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02/03, 04/05, 05/06 에레디비지에 타이틀을 거머쥐었고, 2003년 네덜란드 수퍼 컵, 2005년 네덜란드 컵에서 우승하였다.

04/05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팀을 4강에 올려놓았다. 홈구장인 필립스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AC 밀란과의 4강 2차전에서 90분까지 통합 2:2로 팽팽하게 버티고 있었는데,[46] 연장전에서 승리만 한다면 이스탄불에서 리버풀과 격돌할 기회가 주어지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인저리 타임에 암브로시니에게 골을 허용하면서 꿈은 산산조각나버렸고, 뒤늦은 코쿠의 골과 박지성의 선제골은 부질없는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 성적은 2000년대 들어와서 페예노르트 로테르담UEFA컵 우승(2002년)과 더불어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 최고의 성적이다.[47] 그리고 더불어 그가 아인트호벤에서 기록한 6회 리그 우승 ㅡ 네덜란드 컵 (KNVB 컵) 4회 우승 ㅡ 네덜란드 수퍼 컵 (요한 크루이프 쉴드)[48] 1회 우승 ㅡ UEFA 유로피안 컵 1회 우승은 60-70년대 아약스의 황금기를 이끈 리누스 미켈스의 리그 4회 ㅡ 컵 대회 3회 ㅡ 유로피언 컵 1회 우승을 뛰어넘는 독보적인 기록이다.

3.6. 호주 축구 국가대표팀


2005년 7월 22일 히딩크는 호주 국가대표팀 감독이 된다. 특이하게도 그는 독일 월드컵 전까지 호주 국대팀과 PSV의 감독을 동시에 맡았다. 그렇게 투잡을 뛰면서도 PSV는 05/06 에레디비지에에서 우승했다. 우승 직후 그는 PSV를 떠나 호주 국대에 집중했다.

2006 FIFA 월드컵 독일에서는 팀을 16강에 진출시켰다. 이때 호주는 일본과의 경기에서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1골을 빼앗기지만, 그 뒤 3골을 연이어 넣으면서 일본침몰을 이룩한다. 그리고 나서 그가 한 말은 "정의가 승리했다."였다.한국사람 다되셨네
16강전에서 이탈리아에게 0:1로 패배했을 때 당한 실점이 바로 파비오 그로소를 넘어뜨렸다는 이유로 받은 PK였는데 이는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다. 그로소는 호주가 반칙을 했다고 주장했지만 슬로우 카메라로 볼 경우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는 마테라치의 퇴장에 대한 보상판정이라는 평도 있다.

PSV 감독을 하고 있을 2005년 당시 호주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마크 슈워처, 팀 케이힐, 해리 큐얼, 마크 비두카 등 최고의 황금라인을 자랑하며 전성기를 구가하던 팀이었지만 플레이오프의 벽에 막혀 번번히 월드컵 본선에 나가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플레이오프를 앞두고 히딩크에게 감독 제안을 하게 된다. 하지만 PSV 계약기간이 남아있어 협상이 쉽지 않았는데 결국 PSV와 공동감독 형식으로 2006 독일월드컵까지 1년 계약을 하는 것으로 협상이 마무리되었다. 호주 감독직을 수락하고 플레이오프에서 우루과이를 승부차기 끝에 물리쳐 32년만에 본선 진출을 성공시키고 (1954년 이후 1986년까지 본선에 못 올라왔던 우리와 텀이 같다. 그 이후 지금까지 연속 진출하는것도.) 너무도 짧은 기간에 겸임감독 형식이라 상대적으로 집중도가 떨어졌는데도 국제대회 경험이 없던 호주를 16강에 이끈 것만 해도 상당히 우수한 기록이었다. 2014 현재까지도 호주가 다시 이런 성적을 못 내고 있다는 것만 봐도 그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다. 호주 역시 2006년 독일월드컵이 끝나고 계약 연장을 제시했지만, 이미 러시아와 계약을 먼저 체결하는 바람에 불발되고 아쉽게 호주 감독직에서 내려오게 된다. 이 때 32년만의 월드컵 진출 - 호주의 유일한 월드컵 16강이라는 성적 덕분에 호주에서도 그의 평가가 아주 호의적이라고 한다.

3.7. 러시아 축구 국가대표팀첼시 (감독대행)


2006년 6월 히딩크는 러시아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는다. 유로 2008에서는 러시아를 4강에 올려놓는 쾌거를 이룩한다. 한국의 4강 진출만큼이나 대단한 업적. 조별 예선에서 스페인에게 1:4로 개관광당할 때까지만 해도 진출이 어려워 보였으나 그리스, 스웨덴을 연파하여 8강에 진출한 뒤 조국 네덜란드를 3:1로 관광보내며[49] 4강까지 진출한다. 그러나 4강에서 다시 만난 스페인에게 또 0:3으로 떡실신. 이때 스페인이 2008~2010년까지의 무적함대의 효시였으니 이상할 것도 없지만...

러시아 국가대표팀 부임 중 첼시 구단주 로만과의 친분으로 2009년에 경질된 스콜라리 감독에 이어 임시로 감독대행을 하게 된다.

2008/09 챔피언스리그에서 리버풀 FC를 꺾고 4강에 안착했다. 그리고 FC 바르셀로나와의 오심으로 얼룩진 준결승 2차전에서 후반 인저리타임에 결승골을 얻어맞고 결승 진출 좌절. 심판 개X끼야!!

그러나 히딩크의 잉글랜드 고별전인 FA컵 결승에서 에버튼을 상대로 2:1의 멋진 역전 드라마를 쓰며 결국 징크스를[50] 깼다. 결계 해제


그외 자세한 것은 첼시 히딩크 항목으로

월드컵 남미 지역 예선에서 아르헨티나가 마라도나를 감독으로 부임시키자마자 볼리비아에게 1-6으로 패배를 당한 것을 기점으로 유례없는 부진의 늪에 빠졌다. 이에 아르헨티나 축구협회에서는 히딩크에게 마라도나와의 공동감독을 제의 했다. 히딩크는 이에 대해 마음에 들어하는 발언을 했으나 러시아와의 계약기간을 지켜야 해서 거절했다. 관련 기사 (스포츠서울) 후일담으로 히딩크 영입에 실패한 아르헨티나는 곤살로 이과인을 엔트리에 포함시키고서야 간신히 본선에 진출했다.

3.8. 2009년 이후


FC 안지 마하치칼라 감독시절 항목이 지날수록 점점 후덕해지고 계시다

2009년 러시아 대표팀의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 본선 진출을 달성하지 못하자 자진 사퇴했다. 그의 거취는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사 중 하나였고, 여기저기서 루머가 흘러나왔다. 그 중 가장 압권인 루머는 바로 북한 대표팀의 감독을 맡는다는 것. 2002년에 같은 문화권인 대한민국 대표팀도 맡았기에 북한 대표팀도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지 않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대한민국 네티즌들의 반응은

남한 감독 시절: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
북한 감독 시절: 나는 정말로 배가 고프다.
한번만 져도 아오지 탄광행.
(…)

결국 히딩크 감독의 북한 대표팀 부임건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게 그럼 진짜 될 줄 알았어?

그 외 여러 국가로부터 감독부임설이 솔솔 나왔다. 아프리카 지역 예선에서 튀니지를 간신히 제치고 올라온 나이지리아의 감독으로 부임한다는 설도 돌았다. 나이지리아는 한국과 같은 조가 됐으니 만약 성사됐으면 적장으로 재회했을 것이다. 그러나 히딩크는 다 된 밥(이미 본선에 오른 나라)에 숟갈 하나 얹기 민망했던지 고사하고, 월드컵 본선진출에 실패한 터키와 4년 계약을 맺었다.

2010년 6월 남아공 월드컵 경기 중 한국이 아르헨티나에 4대1로 깨지자 인터넷에 '히딩크의 쓴소리'로 알려진 글이 올라와 큰 관심을 모으고 정식 기사화까지 되었다. 그러나 문제의 글은 나중에 낚시글로 판명났다. 낚시와 오보의 합작 (시사인) 인터넷 베껴서 기사 쓰는 우리 기레기님들

2010년 12월 무승 행진으로 위기에 빠진 첼시 FC의 구원투수로 또 거론 중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현재 유로컵 예선 경기가 내년 중반까지 딱 1경기 뿐이라, 터키의 양해를 얻고 2중 감독도 가능하다는 분석. 그런데 터키축구협회장이 첼시와 히딩크에게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 터키가 자기 마음대로 왔다가 마음대로 떠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라는 경고를 했다. 터키 축구협회장 경고 (스포탈코리아) 히딩크 본인도 첼시와 협상한 적이 없다고 말했고, 히딩크 첼시 협상 부인 (뉴시스) 2011년 6월 22일 첼시는 안드레 비야스 보아스를 새로운 감독으로 계약했다. 결국 별 일이 없는 한 터키 감독으로 있을 듯.

2011년 6월 11일,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명예회장은 히딩크에게 유럽무대에서 감독을 은퇴한 후에 한국 축구의 명예감독을 맡아달라고 요청했고, 히딩크는 곧바로 수락했다.히딩크 명예감독 수락 (이데일리)

유로 2012 독일 원정에서 3-0으로 대팍 깨지긴 했지만 벨기에오스트리아 정도는 어렵지 않을 듯 싶었는데 뜻밖에도 약체인 아제르바이잔 원정에서 1-0으로 패하면서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참고로 아제르바이잔은 조 꼴찌인 카자흐스탄과 1승 1패를 주고 받았으며 조 4위로 꼴지에서 겨우 벗어난 팀이다. 그나마 아제르바이잔이 벨기에와도 안방 경기에서 1-1로 비겨 벨기에의 탈락에 기여하긴 했지만. 조 1위로 본선에 올라간 독일에게 2패를 당한데다 아제르바이잔 경기 패배로 터키가 조 3위로 추락했는데 마지막 10차전 경기에서 독일이 벨기에를 이기고 터키가 아제르바이잔을 1-0으로 겨우 잡으면서 조 2위로 역전,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따내 크로아티아와 대결하게 되었다.

그리고 11월 11일에 벌어진 플레이오프 1차전, 터키 안방 경기임에도 크로아티아에게 압도적으로 밀리면서 슛팅수에서도 크게 뒤진 터키는 3:0 대패를 당해 비난을 듣었고 원정에선 0:0으로 비기면서 허무하게 탈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날부로 터키 감독을 사임했다.

그가 터키를 맡아 유로컵에 임한 것은 부담감이 큰 일이었는데, 유로컵 2008 대회에서 터키는 자국감독 파티흐 테림의 지휘 아래 대회 첫 4강에 올랐었기 때문이다. 사실 터키의 유로컵 성적은 들쑥날쑥인데 워낙에 축구강호나 안방경기에서 위력을 펼치는 상대들이 판치는 유럽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 터키는 96년 대회에서야 처음으로 유로컵에 참가하여 꼴찌로 탈락하더니만 2000년에는 첫 8강, 2004년에는 플레이오프에서 라트비아에게 탈락, 2008년에는 4강에 올랐다. 과연 히딩크가 터키를 유로컵 본선에 2회 연속 진출시킬 것인지 그리고 진출시킨다면 전 대회에서 거둔 4강 성적을 넘어설 수 있을지 관심을 모았는데 유로컵 본선 탈락과 같이 사임하면서 아쉽게 끝을 맺고 말았다.

2011년 11월에 난데없이 한국 국대 감독으로 히딩크가 재계약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누군가의 엉터리 트위터 글이었다. 히딩크 한국 복귀 헛소문 판명 (골닷컴)

2011년 11월 15일에 벌어진 월드컵 3차예선 5차전 경기 레바논 원정 완패로 조광래가 비난당하는 와중에 히딩크를 다시 불러오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런데 한국에 과연 또 올까? 월드컵 4강 성적이 되려 부담이 될텐데

그리고 12월 7일 조광래가 해임되면서 감독으로 돌아오나 했지만 축구협회에서는 고트비, 최강희, 홍명보를 알아보다가 무산되자 김호곤을 올리고 있다는 정보가 나오는 등 히딩크에 대해선 별 말이 없는 상태. 되려 김호곤 밖에 없다는 축구협회는 그를 거론조차 안하고 있다

결국 최강희가 감독이 되면서 한국에 다시 올 일은 없어졌다. 더불어 첼시가 리그 4강 진입이 어렵다는 전망이 나오면서 보야스 감독의 후임으로 또 그가 거론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그러다가 2012년 2월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 FC 안지 마하치칼라 감독으로 2년 계약을 맺었다. 첫 해 리그 성적은 5위로 안지가 펑펑 들인 돈에 견주면 좀 아쉬운 결과였지만 시즌 중반에 감독을 맡았기 때문인지 구단주는 유로파리그 진출이라도 해낸 것에 만족한다며 두둑한 보너스를 지급했다.

그리고 한국시간으로 2012년 11월 28일, 네덜란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2/13 리그를 마지막으로 사령탑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은퇴 후 무엇을 할지 정하지 못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놀지는 않을 것" 이라며 "유소년이나 코치들을 지도하거나 축구 선수들의 인생 설계를 도와줄 수도 있다" 고 말했다. 이로써 안지가 그의 감독직 마지막 커리어가 되었다.

올림픽 감독을 성공적으로 끝낸 홍명보의 코치 연수를 도와주기 위해 그를 안지로 초청하였다. 홍명보가 안지에서 받던 코치 연수는 시즌 종료와 함께 일정이 모두 끝났다. 사실상 히딩크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고 이전부터 홍명보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루머도 이를 계기로 사라졌다.[51]

2012/13 시즌에는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에서 3위에 머물러 2위까지 받는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얻지 못했고, 컵대회 결승에서는 CSKA 모스크바에 승부차기 끝에 패했다. 유로파 리그에서는 8강에서 탈락했다. 이 때문에 일부 안지 팬들은 감독을 교체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헌데 은퇴를 번복하고 안지에서 1년을 더 한단다. 인터뷰에서 서툰 러시아말로 "пока ещё я голоден"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를 말하면서 배고파서 1년 더 감독을 한다고 밝혔다. 설마 육체적으로 배고프다고 해석하는 사람은 없겠지 히딩크 배고픔의 유통기한 (스포탈코리아)

파리 생제르맹 FC에서 레알 마드리드 감독으로 떠날 게 확실시된 안첼로티에 이은 새로운 감독으로 바로 히딩크를 영입하려 했다. 그러나 히딩크는 안지에 잔류하기로 결정한 듯. 히딩크 안지 잔류 선언 (풋볼리스트)

아마 안지에서의 될듯말듯했던 미묘한 성적이 아쉬웠던 모양.(리그 3위로 챔스 진출권 놓침, 컵대회 결승 승부차기 패)

그런데 7월22일 갑자기 안지 감독을 사임했다.

2013년 10월 호주에서 7년만에 다시 국대감독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전 일본 국대 감독을 맡기도 한 홀거 오지크를 감독으로 영입한 호주 국대팀은 2014 브라질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뤄냈지만 이후 가진 브라질, 프랑스와 친선경기에서 0:6으로 나란히 참패하자 오지크 감독을 해임하면서 감독직이 비었기 때문이다. 일부 외신에서 히딩크와 알렉스 퍼거슨을 호주 국대 후보로 올렸다고 하는데 퍼거슨은 가능성이 낮은 상황.만약 맡았다면 다시 한번 조국 네덜란드와 격돌하게 되었겠지만 10월 23일, 예상을 깨고 호주 축구협회는 그리스(터키계 조상도 있는)계 호주 축구감독인 엔제 포스테코글루를 국대감독으로 임명했다.

3.9. 네덜란드 국가대표팀 감독 시즌 2


2014년 3월 1일, 16년만에 네덜란드 감독으로 복귀할 것을 밝혔다. 2014 브라질 월드컵이 끝나면 사임하는 루이스 반 할 감독에 이어 감독을 맡아 유로 2016 대회까지 맡을 예정. 전임 감독인 반 할이 월드컵 3위라는 훌륭한 성적을 냈기에 부담이 꽤 클듯하다. 첫 경기 대진이 묘한데, 상대가 이탈리아다. 비록 2006년 월드컵에서 호주를 무너뜨리며 복수를 했지만 2002년의 그 충격과 공포를 이탈리아는 아직도 잊지 않고 있는데,결국 이탈리아에게 2:0으로 지고 말았다.

유로 2016 예선에선 체코와 원정경기에서 1:2로 패했다. 2010년대 들어서 유럽에서 약체나 중위권팀이 고춧가루를 날리거나 발목을 잡는 상황이 꽤나 많이 벌어지고 있기에 일방적으로 까기도 뭣하다. 웨일스도 안도라 따위에게 2:1로 신승하고, 에딘 제코의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는 키프로스에게 역전패를 당했다, 심지어 포르투갈은 알바니아에게 0:1의 충격패를 먹는 이변이 벌어졌다.뭐 그래도 떨어질 팀은 떨어지기 마련.

그렇게 한두번 있는 이변이라고 다들 생각했는데 10월 14일 아이슬란드전에서 0:2 패배를 당하면서 부임 이후 1승3패로 매우 안 좋은 시작을 보이고 있다. 벌써부터 경질설이 나오고 있는 중. 약체팀들에게 잇달아 발목을 잡혔다는 것이 결정적이다. 때문에 히딩크의 방식이 '구식'이라며 집중포화를 맞고있다. 악화된 자국의 여론과는 반대로 한국의 축구팬들은 한일월드컵의 영웅인 그가 2002년의 6월 처럼 승부사적 기질을 발휘해 이 위기를 극복하기를 염원하며 응원하고 있는 중.네덜란드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히딩크 퇴물 다됐는데 아직도 한국에선 신이네요'라고 깠지만....


심기일전에도 불구하고 2014년 11월 13일 암스테르담 아레나에서 치러진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경기에서 2-3으로 패배했다. 히딩크는 11월 16일에 있을 라트비아와의 유로 2016 예선에서 패배하면 감독직에서 사퇴하겠다고 선언하며 배수의 진을 친 상태이다. 결과는 부임 후 최고의 경기력을 보여주며 6-0으로 대승을 거두면서 한숨돌리게 되었다.다만 언론과 축구협회와 냉랭한 관계가 지속되고 있어 차후 행보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2015년 3월 28일 유로 2016 예선 터키와의 홈 경기에서 0-1로 밀리고있다가 추가시간 극적인 동점골로 1-1 무승부를 만들어 겨우겨우 비겼다. 물론 에이스인 아르옌 로벤의 부재가 컸다고는 하지만.... 예선 일정의 절반인 5경기를 치른 가운데 네덜란드의 순위는 현재 조 3위로 2위인 아이슬란드에게는 승점 5점차로 뒤쳐져있고 조 4위인 터키에게는 2점차로 앞서고 있다. 본선이 24강으로 확대된 유로 2016의 경우에는 예선 조 1,2위가 본선에 가고 조 3위가 플레이오프에 가는 방식이긴 하지만 그 네덜란드가 3위자리도 간당간당한 상황이니 당연히 네덜란드 팬들의 반응은 좋지 않다.

4. 징크스

히딩크의 징크스는 4강을 못넘는 것과 독일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맨날 못넘는건 아니지만... PSV 아인트호벤 트레블 시절을 빼면 틀린 말도 아니다.
  •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네덜란드 : 4위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한국 : 4위
  • 2004-2005 UEFA 챔피언스리그 PSV : 4강
  • UERO 2008 러시아 : 4강
  • 2008-2009 UEFA 챔피언스리그 첼시 : 4강[53]

위의 사례처럼 그가 이끈 팀들은 요상하게도 이전과 비교하자면 엄청난 성적을 내기는 하는데, 결국 4강을 넘지 못한다는 징크스가 있었다. 그가 팀을 맡을 때마다 과연 징크스는 깨질지 아니면 계속될 것인지에 대해 호사가들이 주목하고는 했다. 물론 4강도 누구나 쉽게 거두는 성적이 아니라면서 징크스 운운하기 전에 그 성과부터 알아주자는 의견도 많지만.

그러나 징크스를 논하기에 앞서 그가 맡은 팀들은 4강에 들거라고는 예상도 못할 약체팀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약체팀을 단숨에 4강팀까지 업그레이드 시키는 걸 보면 오히려 대단한 일이다. 월드컵에서 1승도 못 거두던 대한민국은? 소련 시절 유로컵 우승도 했지만 1988년 유로컵 대회 준우승 이후로 월드컵이나 유로컵 토너먼트도 못 넘던 유럽에서 중위권이던 러시아는? 그리고 2000년대와서 레디지비에 리그로서 유일무이한 UEFA 챔피언스리그 4강을 거둔 PSV 아인트호벤은? 오히려 4강을 간 것은 칭송하면 모를까. 약체급 이끌고 4강 가는 게 개나 소나 하는 건줄 아남? 유일하게 아쉬운 것이 있다면 1998년 당시 대단한 전력으로 손꼽히던 덜란드 축구 국가 대표팀을 이끌고도 4강에 머무른 것 정도.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그가 이끄는 팀은 독일을 상대로 연전연패한다는 점이다. 2002년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팀을 지휘했을 때는 4강 징크스와 독일 징크스가 동시에 적용이 된 사례로, 준결승에서 패했는데 그 상대가 독일이였다. 2010년 월드컵 때는 러시아 감독을 했었는데 그때도 독일에게 패해 플레이오프로 밀려났고 슬로베니아에게 2차전에서 패해 탈락하게 된다. 그리고 터키에서도 독일을 상대로 유로컵 예선에서 2연패(0-3, 1-3)를 당했다.[54]

히딩크에겐 터키에 대한 징크스도 있는데 1998 월드컵 예선 당시 네덜란드는 예선에서 조 1위(6승 1무 1패)이긴 했지만 같은 조의 터키에게 1무 1패(0:0,0:1)를 당했었다. 그나마 터키는 역시 같은 조에 있던 벨기에에게 덜미를 잡혀 아쉽게 탈락했는데, 이 때 터키벨기에를 이겼더라면 터키한국1998 월드컵에서 네덜란드와 같은 조에서 만날 뻔 했다. 그리고 2002 월드컵 3, 4위전에서도 터키에게 지는 등 국대 감독으로서 터키를 이겨본 적이 없다는 징크스를 가지고 있다. 터키 감독이 되어 다른 나라에게 진 일은 여럿 있었지만 거기다 터키 감독 시절 추억의 한국대표팀과 홈에서 평가전도 치렀지만, 더 이상 한국 선수들은 10년 전과 달리 순진하지 않았다. 거기다 구자철기성용이라는 일진 녀석들이 터키 선수를 교묘히 퇴장까지 시키고... 그리고 이번 유로 2016 예선에서도 터키와의 홈 경기에서 1:1로 겨우겨우 비겼다.

5. 한국과의 관계

5.1. 한국에서의 위상과 평가


대한민국 축구를 최고의 황금기로 이끈 감독.
한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국민 감독, 최고의 레전드.
한국인의 친구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세 번의 5:0 패배를 만든 분.[55] [56]

4강 신화 덕분에 그의 한국내에서의 인기는 넘사벽으로 아직까지도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인기있는 감독.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레전드라고 일컫어지는 인물들중 유일한 외국인 레전드이며 KFA 명예의 전당 최초의 7인 중 1인이다. 명실상부한 국민 감독으로서의 입지가 1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탄탄하며 그 어떤 한국 감독보다도 훨씬 인기가 좋다. 그에 대한 한국 축구팬들의 애정과 그리움은 아직까지도 식을줄을 모르고 있을 정도로 그의 한국내 입지는 그야말로 언터쳐블이라 해도 무방하다. 여기에 대한 반작용인지 일본에는 히딩크 감독의 안티가 많다. 게다가 2006년 호주 대표팀을 맡아 일본을 개발살냈으니, 싫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가 탈세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자 2ch 등지에선 축제 분위기였다가 오래가지 않아 풀려나니 도로 실망했던 적도 있다.

물론 위에도 서술했듯 처음부터 이런 평가를 받은건 아니었고 웬 외국인 감독 하나가 굴러들어와선 개최국 망신 다 시키겠다며 대부분의 국대감독들이 다 그렇듯이 어마어마한 비난에 시달려야만 했었다. 그러나 히딩크는 "월드컵에서 우리는 분명 세계를 놀라게 할 것이다. 모든 것은 그 때에 알게 될 것이다." 라며 준비과정에서 흘러나오는 어떠한 비판도 수용할 것이라 하여 더더욱 언론을 벙찌게 만들었다. 거기다 언론이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비판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때도 자신은 6월을 기다려 왔고 세계 유명 축구팀들이 비웃어도 반박할 필요 없이 월드컵에서 보여주면 된다며 무한한 자신감을 표출했다.

특히 "개최국으로서 16강만 넘으면 체면치레 하는거다." 라며 대부분의 여론이 히딩크에게 16강 진출을 두고두고 강조할 때도 "한국 국민들이 원하는 16강은 나의 바람이 아니다. 내게는 그 이상의 바람이 있다." 며 야망을 드러내었다. 당시엔 조별 예선이나 통과하고 그런 말해라는 반응이 많았지만 정말로 16강을 통과해 버리고, 이후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 라는 초절정 명언과 그에 걸맞는 성적까지 겹쳐지자 꿈을 현실로 만든 남자라며 붉은 악마들의 정신적 지주로 등극했다. 여기서 무슨 말이 the 必要韓紙?

감독으로서 히딩크가 평가한 한국축구의 문제점은 공격수는 많으나 수비수의 자원이 부족한 것, 그리고 정신력이었다고 한다. 어? 이건 지금도...[57] 훈련중에도 전술적, 기술적 실수는 문제삼지 않았으나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선수가 가장 싫다며 선수들의 정신력에 많은 비판과 조율을 요구했다.

한국 선수들이 기술은 유럽보다 딸리지만 붉은 전사 투혼만은 살아있다라고 생각했던 세간의 평가와는 정반대되던 셈. 그는 한국 축구의 기술이 유럽에 비교해서도 훌륭한 수준이라고 평가했으며 특히 양발잡이들이 많다는 점을 놀라워 했다고 한다. 히딩크는 한국선수들의 승리에 대한 의지는 제법 높게 평가했지만 그마저도 독일이나 이탈리아가 보여주는 그 무시무시한 승부근성에 비교해보면 부족하다고 말하였다.

특히 히딩크가 가장 혹평했던 것은 한국선수들이 공만 잡으면 지나치게 흥분하여 오히려 골 결정력에 방해가 되는 것과 어린 선수들이 고참 선수들을 무서워 해 기가 눌려있다는 것. 특히 한국 특유의 선후배간 위계질서를 가장 좋지 않게 보아 "그라운드에서는 반드시 나이를 막론하고 반말을 쓰고 위계질서에 관계없이 서로간에 대화를 하며 경기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며 모든 선수들이 훈련 중 반말을 쓰게 하고 존댓말을 쓰는 사람은 월드컵 안 데려가겠다고 으름장을 놨다고 한다.[58][59]

히딩크는 이런 수직적 관계가 축구의 창의성을 말살한다고 보았고 선배가 잘못을 하면 후배라도 반드시 지적하고 수정하라는 철학을 강조했다. 당시 몇몇 고참 선수들은 한국의 유교적 정서에 대한 이해 부족이라고 가오잡고 혹평했으나 지금에 와서는 대부분의 경우 대표팀과 축구계에 존재하는 위계질서나 권위의식을 타파하기 위한 신선한 시도였고, 결과적으로 20대 초반의 이천수, 박지성 등의 선수들이 기죽지 않고 활약하는데 도움이 된 것 같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더불어 수비수 자원의 부족 및 유소년 발굴 시스템의 안일함 등등 제 3자인 외국인 감독의 시각에서 한국 축구 및 국가 대표팀의 문제점에 대해 냉철하게 분석, 지적했다는 점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 외에도 기존에 주목받지 못하던 선수들을 기용 및 발굴해 호평을 받았는데 미리 선발된 선수 외에 선발되지 못한 쪽에도 더 좋은 선수가 많을테니 잔뜩 추천하고 계속 뒤져보라고 지시하였다고 한다.[60] 그리고 해외에서 잘 나가던 선수들보다 한국에 오래 머물고 있어 경기력이 다듬어져 있던 국내 선수들의 체력 등을 더높이 평가했다고. 홍명보 보고있나? 이 당시에 많은 이들의 예상을 깨고 스타 선수였던 이동국은 탈락한 반면 신참에다 당시 아무런 기대도 받지 못하던 박지성이 최종 엔트리에 합류하여 이 월드컵의 또 다른 스타가 된다. 박지성 본인에겐 히딩크가 축구인생의 은인이었던 셈.

아무튼 2002년 월드컵으로 히딩크는 내리막길 감독이라는 평가에서 벗어났고 대한민국 내에선 국민영웅 대접을 받았다. 월드컵 시작하기 전에 오대영 감독이라고 그렇게 까대던 국내 언론들도 그를 거의 한국 축구의 성자로 떠받들며 매일 같이 찬양 일색이었다. 혹자는 만약 독일을 이기고 결승에 진출했더라면 국내에 히딩크를 숭배하는 종교가 하나 나왔을지도 모른다고 하기도. 근데 농담으로 안 들려서 더 무서워...

2002 월드컵은 홍명보 등 고참들이 안정적인 기량을 보이고 이영표등 수비수들의 활약도 돋보였던데다 그 어려운 세대 교체마저도 완벽하게 이루어내면서 4강 진출이란 성과를 이룩한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의 리즈 시절이었다. 동시에 히딩크 본인에게도 전성기이자 인생역전 그 자체였다 할수 있다.

5.2. 한국에 대한 애정


히딩크 재단을 통해 한국 축구의 발전에 꾸준히 기여중인 거스 히딩크[61]

한국 팀을 개박살 낸 뒤 한국 국대 감독을 맡고나서 인생역전을 이루어낸 만큼 한국에 대해선 당연히 애정어린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62] 월드컵 이후 PSV 아인트호벤 감독으로 떠나기 전 인터뷰에서 한국과 정이 많이 들어 떠나고 싶지 않지만 자신이 참가할 큰 대회도 당분간 열리지 않을 것 같고 여기서 서로 헤어지는게 좋은 이별이 될 것 같다고 말하였다. 2012년 방한 후 기자회견장에서 수많은 기자들의 박수갈채를 받자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며 감회에 젖기도 했다.

월드컵 전 2002년 5월에 한 인터뷰 역시도 화제가 됐는데, 단순히 이번 월드컵 무대만을 위해 뛰고 있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한국축구가 세계무대에서 경쟁력을 갖춘 강력한 팀으로 가는 길에 작은 기여를 하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또한 한국 선수들의 첫인상에 대해선 착하고 순수하며 의지가 강해 그들을 매우 사랑한다고 애정을 드러내기도...

더불어 "과거의 한국축구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변방의 소속팀이었지만 이제는 내가 속한 나라이며 내가 이끌고 있는 우리의 나라이다. 비록 국적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그 문화의 차이가 다르지만 내가 선택한 나라, 또한 가능성이 있는 나라이다. 남들이 뭐라 떠들든 나는 내가 생각한 길을 갈 것이며 궁극적으로 이는 성공으로 이어질 것으로 확신한다."며 비난여론에 대응하고 감독으로서 책임감을 드러냈다.

이렇듯 히딩크가 대한민국에 대해 유독 각별한 애정을 표하는 것을 단순한 립 서비스로만 볼 수 없는 이유는 대한민국 대표팀을 맡지 않았더라면 자기 자신도 자칫 한물간 3류 감독 신세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63] 거기에 각종 상금과 CF[64] 출연료 등으로 거액의 돈까지 벌어들인데다 한국에서는 거의 "한국 축구의 은인" 이라며 감독 인생 동안 받아본 적이 없을 만큼의 영웅 대접을 다 받았으니 대한민국 활동을 통해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쥐었다고 할 수 있다. 히딩크 본인도 이때가 자신의 Career high였다며 그리워하는 발언을 후에 남기기도 했다. 특히 인천국제공항에 존재하는 외국 국가원수 전용 비밀 출입문인 더블 게이트를 이용하는 국가 원수급 대접을 받아본[65] 인물이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생각보다 한국에서의 위상은 훨씬 더 대단하다.

심지어 그를 한국으로 귀화시켜 '희동구'라는 한국 이름을 주고 상암 희씨의 시조로 삼자(...)는 애정어린 농담까지 돌아다녔을 정도. 농담이야? 정말로? 난 찬성인데? 월드컵 직전에 돌아다녔던 유머 중에는 우리나라가 16강에 진출시, 8강 진출시... 등으로 국민 반응을 예측한 것이 있었다. 해당 유머에 따르면 8강 진출시 정몽준 당시 축구협회장과 히딩크 감독이 원내 1위 정당을 설립, 4강 진출시 헌법개정으로 히딩크 감독 대통령 취임 등등. 동아일보 기사... 어?

하지만 이는 모두 그 빛나는 성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찌됐든간에 성과가 나왔기에 이 정도의 대접을 받을수 있었던 것.

여담으로 만화가 허영만관상을 소재로 한 만화 에서 히딩크를 다루며, 수재민 연금으로 겨우 5천만원(!?)을 냈다고 비판한 관상가 인터뷰를 실은적이 있다. 사실, 네덜란드 사람들은 1945년 전후 2차례의 불경기를 겪으며 근검절약이 몸에 배었다.[66] 히딩크가 그 정도 액수를 '쾌척'한 것이 대단한 것이다. 사실 자발적으로 하는 기부에 "한국에서 이렇게까지 사랑을 받는데 적어도 얼마 이상은 내야된다"라는 기준을 부여하는 것도 우습긴 하다. 하지만 조세 피난처를 이용해 탈세한 혐의가 인정돼 유죄판정을 받은 만큼 짠돌이임은 확실하다.http://tvpot.daum.net/v/an4wLKMV01w$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까지도 2002 월드컵과 한국에 대한 그의 애정은 식지않았다. 2002 월드컵 10주년 기념 올스타전에 초청된후 "한국 사람을 세계 곳곳에서 만날 때마다 언제나 환영받는 느낌이 떠오른다."며 "한국에 그동안 여러 번 와서 2번째 고향 같다."라고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이후 올스타전 경기에서 박지성이 골을 넣고 포르투갈 전에서의 그 유명한 세레머니 포즈를 취하며 달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 어퍼컷 모션을 취하며 포옹, 10년전의 명장면을 재현하여 많은 팬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한국 축구선수들 및 인사들의 그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평이 대부분이고 이 월드컵으로 스타가 된 한국 선수들과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아직까지도 교류가 활발하다. 이당시 거미손 골키퍼로 이름을 떨친 이운재가 힐링캠프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2년전부터는 홍명보, 박지성, 안정환, 이운재 등과 함께 2002 월드컵 계모임을 시작해 얼굴을 보고있다고 한다. 회장은 홍명보. 홍명보가 자신의 팀으로 와 지도자 연수를 받을 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이영표, 박지성의 경우 월드컵이 끝나자마자 자신의 팀으로 데려가 해외 진출의 발판을 마련해주는 등 신경도 많이 쓰는 편이다.

선수들의 히딩크에 대한 인상은 호랑이처럼 엄하지만 할아버지처럼 푸근했다고 한다. 특히 선수들에게 주눅들지 말라며 자신감을 심어준 것과 끝까지 믿어준 것에 감사한다는 평이 많은 등, 정신적인 면에서 선수들을 지탱해 준 것에 대한 감사도 많이 받았다. 심지어 월드컵에 출전도 못해보고 2002년 당시 벤치신세를 지켰던 선수인 윤정환 역시도 당시에는 벤치 신세로 만들어 서운했지만 그럼에도 히딩크에게서 정말 많이 배웠다며 자신의 평생에 가장 존경하는 감독이자 롤모델로 히딩크를 뽑았다. 선수에게 동기부여를 하는 능력이 매우 탁월하고 냉정한 분석력이 있으며 선수에게 끊임없이 다가서려 하는 면모를 특히 존경한다고.

이 중 박지성과는 말할 필요도 없이 서로 최고의 은사-제자라고 치켜세울 정도로 한국 선수들 중에서도 가장 총애하여 아직까지도 둘은 축구팬들에게 모범적인 사제지간의 대명사로 기억되고 있다. 박지성이 아인트호벤을 떠날때 히딩크가 만류하며 섭섭해했다는 이야기가 나와 둘사이가 틀어지는 것은 아니냐 했지만 이후 박지성이 맨유에서 힘든 적응기를 겪자 언론을 통해 박지성은 훌륭한 선수이고 더많은 기회를 받을 가치가 있다며 그를 끊임없이 옹호해주는등 변함없는 애정을 과시했다[67]. 아직까지도 볼때마다 너무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운 제자라고 각별하게 생각할 정도.

박지성의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이 여러 매체를 통해 지속적으로 히딩크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표현한 바 있으며 항상 히딩크를 자신의 축구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해왔다. 박지성이 자서전에 쓴 내용에 따르면 부상당한 그에게 정신력이 훌륭한 선수라고 찾아와 칭찬을 해준것이 자신의 남은 인생을 바꿔주었다고 할 정도. 그만큼 히딩크 감독에게 심적으로 많이 의지했다고 한다. 무명 선수와 다를바없는 박지성을 히딩크가 월드컵 전부터 끊임없이 칭찬하고 언론의 비난세례를 받아가면서까지 그를 기용하고 지지해주었던 점을 생각하면 둘이 서로를 각별하게 최고라고 칭찬하는 것도 이유가 있다. 박지성이 은퇴하기 전 히딩크에게 미리 통보를 했는데 흔쾌히 지지해줬다고 한다. 박지성의 아버지 박성종씨 역시 박지성에게 히딩크는 그의 재능을 알아봐 준 감독이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연락을 자주 하고 잊을 수 없는 감독으로 생각하고 있고 그 고마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기도.. 그리고 은퇴식에서 박지성은 인생 최고의 감독으로 히딩크를 꼽으며 가장 큰 영향을 받았고 감사하고 있다고 인사했다.

한국 요리는 그다지 입맛에 맞지 않았는지, 갈비생선전외에는 좋아하는 한국 요리가 없다고 한다.그 중에서는 산낙지를 매우 질색하였다고 한다.[68] 그래도 한국이 결승에 진출하면 먹겠다고 말한 적은 있었다.독일 전 때 이놈들이 정말 결승 가면 어쩌지...하고 걱정했을지 모른다.[69] 의외로 마늘은 스테미너에 좋다고 해서 좋아했는데, 선수들과 고깃집에 갔더니 외국 사람은 마늘 싫어할 거라 생각한 주인이 안 주는 바람에 따로 요청하기도 했다고.[70]

2014년 1월 5일, 무릎 관절 수술과 복부지방제거, 이마거상수술을 받기 위해서 방한 예정이라고 한다.기사 연인 엘리자베스도 따라왔다고. 이후 홍명보 감독을 포함한 축협 간부들이 총출동하여 병문안을 가는 진풍경이 나왔고 히딩크 감독도 한국은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에서 첫 경기 러시아전을 최소한 비겨야 할 것이라는 조언을 하였다. 그리고 정말로 비겼다.

한국이 처참하게 월드컵을 마무리한 후에 올스타전과 박지성 결혼 때문에 방문했을 때는 한국 팬들이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투의 인터뷰를 했다. 정 아니면 자신이 했던 것 처럼 장기 합숙도 한 가지 방법이긴 하다고[71]



2012 K리그 올스타전에서 2002 한일월드컵 당시 박지성과의 포옹장면을 재현하며 수많은 축구팬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2014년 연말에 네덜란드 국왕과 함께 방한했다. 경제 사절단 담당 특사 자격으로 왔고, 양국 정상회담을 하는 자리에도 배석이 되었다.#

나이가 들면서 무릎이 좋지 않아 한국에서 줄기세포 치료를 받았다. 상태가 심각해서 한동안 휠체어 신세를 지기도 했는데, 현재는 골프칠때 카트 타지 않아도 될 정도로 회복을 했다고. 여러 모로 한국과의 인연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6. 트리비아

2002년 FIFA 월드컵 당시 한국에서 벌어들인 광고 수입과 인세를 실제보다 적게 신고했다는 혐의와 월드컵 직후 조세 피난처로 알려진 벨기에 아셀에 집을 얻은 뒤 거주지 허위 신고를 해 140만 유로(약 17억원)의 세금을 탈루한 혐의[72]로 인해 호주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시절이던 2006년 7월 탈세 혐의로 네덜란드 검찰에 의해 법정에 기소되었다. 이후 2007년 1월과 2월 각각 1, 2차 공판에 나서 본인의 무죄를 주장했으나, 결국 유죄 판결을 받고 징역 6개월 집행유예와 벌금 4만 5천 유로(약 5천 500만원)를 선고받았다.

히딩크 입장에서는 그나마 실형을 모면한 것이 다행스러운 점이라는 입장이었으나, 이로 인해 그동안 국제 축구계에서 쌓아온 명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것이 자명했기 때문에 히딩크의 커리어에 있어서 상당한 위기를 가져올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이후 히딩크는 러시아 축구 국가대표팀첼시 FC에서의 활약을 발판으로 부정적인 시선들을 어느 정도 거두는 데 성공했으나, 히딩크에 대한 비판이 나올 때마다 끊임없이 거론되는 사례로 남게 되었다.

7. 감독 기록

7.1. 리그 기록

연도구단순위경기승점
1987/88PSV아인트호벤13427521172859[73]
1988/89PSV아인트호벤1342455783153
1989/90PSV아인트호벤2342086943648
1990/91페네르바흐체53012810535344
1991/92발렌시아43820711634247
1992/93발렌시아43819109603348
1993/94발렌시아738141212555040
1998/99레알 마드리드[74]7241149463937
1999/00레알 베티스[75]18131668199
2002/03PSV아인트호벤1342662872084
2003/04PSV아인트호벤2342356923074
2004/05PSV아인트호벤1342761891887
2005/06PSV아인트호벤1342662712384
2008/09첼시[76]3131111241534
2011/12안지 마하치칼라[77]544191312544270
2012/13안지 마하치칼라3301587453453

7.2. 대회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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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2002년 월드컵 종료 후 이명박서울시장에 의해 명예 서울시민이 되었다. 히딩크는 하멜의 예를 들며 운명과도 같은 일이라고 평했고, 김대중대통령에게 체육훈장을 받은 이후에는 애국가를 들으면 가슴이 뭉클한 것이 한국인이 된 듯 하다고 했다
  • [2] 네덜란드 리그 종료 후 여름 시즌 미국 임대
  • [3] 네덜란드 리그 종료 후 여름 시즌 미국 임대
  • [4] 시즌 중도해고
  • [5] 시즌 중도취임
  • [6] 시즌 중도취임
  • [7] 시즌 중도취임
  • [8] 가깝다고만 했지 같다고는 절대 하지 않았다. 네덜란드어의 g는 유성 연구개 마찰음으로 무성 마찰음인 한국어의 ㅎ과는 다른 음이 난다. 다만 국립국어원에서는 네덜란드어의 g를 ㅎ로 표기할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관련 지역 유학 경험자에 따르면 히딩크 아저씨 고향 동네 가서 '거스 히딩크' 아냐고 물어보니까 그런 사람 모른다 그랬다고...
  • [9] 부전공으로 농구와 야구(!)를 공부했다고 한다. 네덜란드의 김재박?
  • [10]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수리남 출신으로, 네덜란드의 흑인들은 퀴라소 등지가 아닌 이상 대개 수리남 출신이라고 보면 된다. 네덜란드 시람들은 수리남 사람들을 자국인으로 여길정도로 우호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 클라렌스 세도르프 등이 수리남 출신.
  • [11]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지만 히딩크는 결혼도 했고, 장성한 아들도 있다. 하지만 부인과는 별거중이고 여자친구를 데리고 다닌 것. 우리나라 정서에 맞지 않는 감독이라고 언론에서는 나불나불 거렸지만, TV만 켜면 불륜 드라마가 나오는 나라에서 그런 소리를 한다는 게...
  • [12] 여담으로 농구와 야구 지도자 자격증도 함께 취득했다고 한다.
  • [13]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아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심지어 칼을 들고 교실에 들어온 아이도 있었는데, 따끔하게 타일러서 충공깽한 사태를 막아냈다고.
  • [14] 장애 때문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학생들을 상대하다 보니 자연히 심리전에 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네덜란드의 슈퍼스타들을 휘어잡은 것이나, 한국와서 안정환, 홍명보 등 스타급 선수들을 길들일 때도 유효했다고. 이러한 심리전은 상대팀을 위축시키기도 했는데, 1998년 당시 한국대표팀이 연습장에 도착한 걸 보고도 무시하고 30분 넘게 연습을 이어간 사례나 2002년 천하의 이탈리아를 생까고 8강전을 준비한다며 태연히 스페인과 아일랜드의 16강 경기를 관전하러 간 일 등등. 심리전에 강한 면모를 보였다. 괜히 지장이니 명장이니 소리를 듣는게 아니다!
  • [15] 아인트호벤은 이후로 다시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오르지 못했다.
  • [16] 나머지 여섯 명은 셀틱 시절의 크 스타인, 아약스 시절의 스트반 코박스, 맨유 시절의 알렉스 퍼거슨, FC 바르셀로나 시절의 펩 과르디올라, 인테르 시절의 조세 무리뉴, 바이에른 뮌헨 시절의 유프 하인케스
  • [17] 연봉 문제로 네덜란드 축구협회와 갈등이 있어서 취임이 무산될 뻔하였지만 어찌 저찌 잘 해결되서 결국 취임하였다.
  • [18] "Hiddink should stop putting his head in some players' asses."(히딩크는 몇몇 선수들한테 병신같은 짓을 하는 걸 그만둬야 한다.)라는 말을 라디오에서 했기 때문에...
  • [19] 다시 돌아오기까지 1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이 당시의 일화로는 다비즈를 쫓아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히딩크는 다비즈를 발탁하기 위해 그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보기 위해 다비즈와 따로 카페에서 만났는데, 다비즈는 전혀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히딩크는 "에드가. 커피값은 내가 내겠네." 라며 주저 없이 다비즈를 남겨두고 그냥 일어나 나갔다고 한다. 그 이후 오랫동안 다비즈를 거들떠 보지도 않다가 그가 진심으로 반성하는 기색을 보이고서야 다시 발탁하였다.
  • [20] 그 당시 잉글랜드는 이 대회에서 4강에 올랐다. 참고로 잉글랜드가 유로에서 4강 이상 올라간 건 이 대회가 유일하고, 월드컵까지 합쳐서 메이저대회 4강은 3회에 불과하다.
  • [21] 분노한 네덜란드 국민들은 전임 감독이었던 딕 아드보카트를 다시 데려오라며 아우성을 쳤었다고 한다. 훗날에 다시 네덜란드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아드보카트는 로2004 예선에서 체코에 밀려 플레이오프로 떨어진 후 스코틀랜드를 만나 원정서 1:0으로 패배하는 졸전을 펼치다 간신히 진출한 본선에서 결국엔 4강에 올랐으나 본선에서도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끔찍한 경기력을 보여주었고, 요한 크루이프, 마르코 판 바스턴 등 레전드들에게 이것은 네덜란드 축구가 아니라고 미친듯이 까인 끝에 결국 판바스턴에게 지휘봉을 넘겨야 했다. 물론 스코틀랜드에 졌을 때 네덜란드 국민들은 히딩크를 다시 데려오라며 난리를 쳤다고 한다.
  • [22] 훗날 인터뷰에서 경기 전 우리나라 선수들의 긴장과 두려움으로 가득찬 눈빛을 보고 대승을 확신했다고 한다. 2002년 이전 월드컵만 나가면 쫄아서 자멸했다던 많은 국대선수들의 인터뷰와 일맥상통한 이야기다.
  • [23] 일부러 쫄개 만들기도 했다. 당시 한국과 네덜란드는 같은 연습장을 썼는데, 한국대표팀이 도착한 후에도 히딩크는 일부러 훈련을 계속했다. 그런데 30분이 넘도록 한국쪽에서 아무런 항의가 없어서 얘들이 단단히 쫄았구나...라고 확신했다고. 당시에 우리나라 선수들이 죄다 순박해 빠져서 그랬지, 만약 이천수나 기성용같은 일진(...)들이 있었다면 역효과가 났을지 모른다.
  • [24] 1998년 유프 하인케스가 레알 마드리드 감독직에서 사임한 후 6월 17일에 후임 감독으로 부임한 사람은 따로 있었지만 코칭 스태프와의 갈등으로 인해 22일만에(7월 9일) 사퇴하면서 후임 감독은 거스 히딩크가 되었다.
  • [25] 현재 FIFA 클럽 월드컵의 전신.
  • [26] 이 대회를 치루기 전에 우승하면 콧수염을 자르겠다고 공약하였고, 우승 하였기 때문에 잘랐다고 한다.
  • [27] 수뇌부의 아들을 기용하라는 압박에 빡친 나머지 "이 팀은 좀 더 프로다운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말했고 그 말을 듣고 노한 회장 로렌조 산즈는 바로 짤랐다.
  • [28] 그 전에 남아공과 나이지리아 대표팀에서도 오퍼가 있었다.
  • [29] 현대중공업에서 대외업무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인물. 히딩크 감독 외에도 베르투 쿠엘류, 딕 아드보카트, 그리고 코치 신 고트비까지, 3명의 외국인 감독이 이 사람의 손을 거쳐서 영입되었다.
  • [30]핌 베어백 감독은 원래 히딩크 감독 선임 당시, 네덜란드 축구협회에서 수석코치로 추천해준 인물이다. 부드러우면서도 사리분별이 명확하기 때문에, 다혈질의 히딩크를 보좌할 수 있을 거라고.
  • [31] 히딩크가 자서전에 밝힌 바에 따르면 고향에 한국전에 참전한 용사가 있었다고 한다. 그 할배가 한국감독을 한번 맡아보라고 권유했다는데... 이 참전용사 분 아니었으면 2002년이 어땠을지..;;;
  • [32] 그나마 1998 월드컵에서 1:3 패배를 안겨준 멕시코산월드컵경기장에서 2:1로 이기며 설욕했다.
  • [33] 2001년 컨페드컵 A조에선 3팀 동률 2승 1패가 나왔는데, 프랑스오스트레일리아를 상대로 대충대충 경기를 하다가 일격을 당하는 바람에...
  • [34] 아시안컵을 우승한 일본과 오세아니아 네이션스컵을 우승한 오스트레일리아와의 친선 경기.
  • [35] 다만 이용수 당시 기술위원장의 회고에 따르면 월드컵에서 한조가 된 미국의 눈을 속이기 위해 최대한 전력노출을 막았다는 점 또한 감안을 해야 할수도 있다.
  • [36] 결정적으로 프랑스전에서 지네딘 지단이 부상을 당했고 그 여파로 프랑스가 오히려 망테크를 타고 만다.
  • [37] 첫 경기 에콰도르전은 2-0으로 완승했으나, 크로아티아에 1-2로 역전패한 뒤 멕시코와의 최종전에서는 피에로가 간신히 동점골을 넣어 1-1로 무승부를 기록.
  • [38] "한국팀을 상대로는 한 골이면 충분하다." 당시 뉴스데스크 보도 내용.
  • [39] 링거까지 맞을 정도
  • [40] 이것 때문에 히딩크가 집중적으로 체력훈련을 시킨 것이다.
  • [41] 월드컵 사상 최단 시간 실점 기록이다.
  • [42] 마이웨이-거스 히딩크. 이 자서전에 2002월드컵에 대한 모든 게 담겨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2월드컵에 관심있다면 꼭 읽어보길
  • [43] 그 뒤로 2006년에는 1승 1무 1패로 조별 예선 탈락, 2010년에는 아슬아슬하게 16강 진출을 거두었다. 그리고 2014년 현재 1무 2패로 조별 예선 탈락..
  • [44] 1954년 스위스 월드컵 : 2패, 예선 탈락 (조4위) / 1986년 멕시코 월드컵 : 1무 2패, 예선 탈락 (조4위) /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 3패, 예선 탈락 (조4위) / 1994년 미국 월드컵 : 2무 1패, 예선 탈락 (조3위) / 1998년 프랑스 월드컵 : 1무 2패, 예선 탈락 (조4위)
  • [45] 사실 떠날 마음이 있었긴 했어도 히딩크 본인도 "왜 축협이 재계약 하자고 적극적으로 매달리지 않지?"...라고 의문을 느낀적은 있었다. 축협 입장에선 이미 부쩍 명성이 올라버린 히딩크의 몸값을 감당할 수도 없거니와, 2002년 월드컵때만큼의 지원을 해줄 여력도 없었기에 팬들의 바램에 불구하고 재계약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국가대표 감독을 이후 한동안 공석으로 내버려 두었다. 도중에 김호곤이 임시로 국대감독을 하기도 했는데, 월드컵 4강이라는 따라가기 힘든 성적을 내버린 히딩크에 대해서 국내축구 지도자들의 시기와 질투를 대변하는 발언(히딩크 그XX)을 내뱉기도 했다.
  • [46] AC 밀란의 홈구장 산 시로에서 벌어진 1차전에서는 2:0으로 패했다
  • [47] 당시 에레디비지에서 주목할만한팀은 3강(아약스, PSV, 페예노르트), 3중(헤렌벤, AZ 알크마르, 트벤테) 정도. 00/01부터 07/08 시즌까지 PSV가 리그 우승을 못했던 건 두번 뿐이며, 그나마 그 두번은 AFC 아약스가 거둔 것이다. 게다가 챔피언스 리그에선 아인트호벤 말고는 다들 고전했으며 아약스는 챔피언스리그에서도 동네북되고(그것도 체코나 더 하위 랭킹으로 평가받던 팀에게 연이어 패했다) 심지어 유로파리그에서도 고전하고, 새롭게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강호로 떠오른 트벤테와 알크마르조차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동네북이 됐던 걸 생각하면 이 때 거둔 아인트호벤의 4강은 엄청난 성적임을 알 수 있다.참고로 2000년대 와서 에레디비지에 구단으로서 챔피언스리그 8강 이상을 가본 건 이때 아인트호벤 뿐이다. 2010년대 와서도 에레디비지에 구단으로 챔피언스리그 16강만 가도 영광인 상황이니 말 다했다. 2013-14 시즌만 해도 아약스가 유로파 리그에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게 1:6으로 참패하며 털린 걸 봐도...
  • [48] EPL의 커뮤니티 쉴드와 마찬가지로 리그 우승 팀과 KNVB 컵 팀이 격돌하는 단판제 대회
  • [49] 이 때 히딩크는 경기전 언론에서 "조국의 역적이 되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정도로 자신이 있었다는 것.
  • [50] 아인트호벤 외 다른 클럽팀에선 우승을 거둔 게 없던 징크스.
  • [51] 히딩크가 한국 대표팀 감독시절 밀당을 통한 길들이기를 가장 많이 한 선수가 홍명보였기 때문에 대표팀 터줏대감이었던 홍명보가 이를 기분 나쁘게 받아들였다는 루머가 많이 돌았다.
  • [52] 사진은 SBS에서 기획한 브라질 월드컵 특집 다큐멘터리 '두리아빠 축구바보 그리고 전설, 차범근' 中. 이 당시를 회상하면서 차붐에게 "그 때 한국 팀 감독이지 않으셨나요?"라고 물었고, 차붐은 "그 때 저를 정말 힘들게 하셨어요"라고 답했다.(...) 그 말을 듣자 히딩크 감독은 미안하다고 하면서 카메라 감독을 보더니 "이거 편집해주세요"라고 했다.
  • [53] 물론 이 때 바르셀로나와의 2차전은 역사에 남을 만한 오심 경기였지만...FXXXing Disgrace
  • [54] 참고로 터키로컵 2000 대회 예선에서는 독일을 상대로 1-0으로 안방에서 이겼고 원정에선 비겼다. 물론 당시 독일녹쓴 전차라고 하여 한물 간 것으로 평가받던 때였지만. 결국 유로컵 본선에서 포르투갈루마니아에게 덜미를 잡히면서 독일은 1무 2패로 허무하게 탈락 잉글랜드와 같이 하고 반대로 터키는 다른 조(이탈리아,벨기에,스웨덴)에서 1승 1무 1패로 유로컵 8강에 첫 진출하는 대조를 보였다.
  • [55] 감독으로 부임했을 당시 5:0 경기 때문이 오대영 감독이란 별명이 붙긴 했지만 98 월드컵에서 네덜란드 국대의 감독을 맡을 당시 한국을 5:0으로 발라버린 경기 역시 아직까지도 많은 한국인들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어 이 5:0이라는 숫자가 '축구경기에서의 참패'를 뜻하는 하나의 상징적인 수치가 되었다. 괜히 참담한 대표팀 실력을 볼 때마다 '5:0으로 지는 것 아니야?'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남긴 감독.
  • [56] 덕분에 차범근의 다큐도중 차범근과 만나서 담소를 나누다 98년도 네덜란드 국대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차범근이 "그때 저희를 참 힘들게 하셨어요"라고 농담을 던지자 미안하다고 너스레를 떨며 격하게 편집을 요구했다(...) 귀여우시다 이 당시 차범근 감독은 히딩크의 네덜란드에 발려서 대회 도중 경질되는 흑역사를 맞았기 때문. 한때 적으로 맞섰던 두 어르신들이 서로 땀을 닦아주며 미안하다고 오버액션을 날리는 귀여운 모습을 볼수있다(...)
  • [57] 놀랍게도 이 부분은 2010년대의 한국축구에도 어느 정도 들어맞는 편이다.
  • [58] 이 당시 하늘같은 선배들은 황당해 하고 후배들은 당황하며 모든 사람들이 쭈뼛거리는 와중에 원조 쎈캐 김남일이 걸어오며 "명보야, 밥먹자!!"를 외쳐 분위기가 풀어졌다는 전설이 있지만 김남일 본인은 강력히 부인하게되어 전설로 남게되었다(...)
  • [59] 한편, 이 사례는 의외로 경영학에서 자주 인용된다. 특히 다문화 이해를 중시하는 경영 기법(Inter-cultural Management)에서는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종종 인용되는 사례다.
  • [60] 최진철을 발탁하면서 "왜 여태 안뽑았느냐?"고 말한 일화가 있다.
  • [61] 허정무/거스히딩크축구재단에서 훈련받은 박재민이라는 선수가 나이키 모스트 원티드의 한국 대표로 뽑히기도 했다.
  • [62] 2002년 월드컵 후 중국이나 태국에서 러브콜을 날렸지만, 생깠다(...). 일본의 경우 2006년 호주대표팀을 맡으면서 밟아 놓아 한국팬들을 또 한번 즐겁게 해 주었다.(거기다 정의는 승리했다는 드립까지!) 하지만 북한의 경우는 예외로, 한국과 한민족이라는 정서를 알았던지, 기회가 된다면 북한 대표팀을 맡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치기도 했다.
  • [63] 실제 히딩크 영입때 찾아간 가삼현씨가 히딩크를 설득하면서 '이 기회를 거절하면 당신은 후회할 것'이라는 뉘앙스로 설득했다고 한다. 잉글랜드 대표팀을 맡았던 에릭손 감독이 빌빌 거리다 중국 리그에서 감독하는 걸 봐도 틀린 추정은 아니다.
  • [64] 출연한 광고 중에 하는만큼 딴만큼"하늘만큼 땅만큼"이라고 말하는 광고가 있었다.
  • [65] 국가원수급 뿐만 아니라 대통령이 보낸 특사급 인물과 각 국제기구 단체장이나 대통령 초청 특별 인물 방한시에도 더블 게이트를 통과하여 입국하였다. 예를 들면 IOC위원 이라든가.
  • [66] 히딩크 부모세대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물자공출로, 히딩크 또래의 세대들은 네덜란드병석유파동의 2연타로 10대, 30대 시절을 어렵게 살아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애초에 관상이란 게 '통계'에 근거한 유사과학이니 어쩔 수 없지만.
  • [67] 심지어 첼시에서 임시 감독을 맡을때 맨유 선발로 나온 박지성이 자기 팀을 박살내는 광경도 보았음에 불구하고, 박지성을 원망하긴커녕 부드러운 미소로 바라보는 모습이 사진으로 찍히기도 했다.
  • [68] 그런데 이건 히딩크 탓할 게 아니라 유럽만이 아닌 아랍 및 아시아 각지, 오세아니아, 중남미, 북중미에 이르기까지 산낙지에 대하여 굉장히 질색하고 놀라워한 걸 생각하면 산낙지를 싫어한다느니 뭐니하여 한국 우습게보네 이렇게 보면 안된다...가끔 산낙지를 즐겨먹는 외국인도 있으나 해외여행 블로그나 책자에서 외국인들이 기겁하는 한국 음식 가운데 산낙지는 단골로 나올 정도이니
  • [69] 당시 대표팀 코디네이터였던 얀 룰프스는 다리 한짝을 잘라먹긴 했다. 전설의 명장(…) 봉프레레의 경우 김치로 밥을 비벼먹을 정도로 음식 적응을 잘 했지만 해삼에게는 백기를 들었다고.
  • [70] 물론 생마늘은 못 먹고 구워 드셨다.
  • [71] 하지만 과거 FC 코리아와 같은 합숙은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상황이다. 일본처럼 사전에 계획적인 합숙이 방편이긴 하지만 경남FC 감독을 지냈었고 2014년 9월에 대구 fc 대표이사 겸 단장이 된 조뭐시기(...) 대표이사처럼 사사건건 비협조적... 아니 적대적으로 굴면 이 역시도 어렵다 하겠다. 유럽국가들도 일본처럼 사전에 계획적인 합숙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추가바람.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했지 꼭 그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고는 안했다
  • [72] 여자친구 엘리자베스가 주로 암스테르담에 기거했던데다 히딩크 본인은 해외팀 및 원정팀과의 경기로 인해 실제로 이 집에 거주했던 적이 거의 없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 [73] 당시에는 승리 시 승점이 2점이었다.
  • [74] 해고 당시 성적
  • [75] 중도 부임 후 시즌 종료 성적
  • [76] 중도 부임 후 시즌 종료 성적
  • [77] 중도 부임 후 시즌 종료 성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