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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수

last modified: 2015-04-04 22:06:04 Contributors

Contents

1. 강만수(姜萬守)
1.1. 약력
2. 강만수(姜萬洙)

1. 강만수(姜萬守)


이름 강만수(姜萬守)
생년월일 1955년 8월 24일
출신지 경상남도 하동군
출신학교 부산성지고등학교-한양대학교
포지션 레프트
신체사이즈 신장 194cm, 체중 100kg
소속팀 금성통신 (1980~1983)
현대자동차서비스 (1983~1984)
지도자 현대자동차서비스 감독 (1993~2001)
대한민국 배구 국가대표팀 감독 (1997)
수원 KEPCO 45 감독 (2009~2011)
아산 우리카드 한새 감독 (2013~2015)

前 국가대표 배구선수. 前 아산 우리카드 한새 감독.

1970, 80년대 대한민국 배구계를 풍미한 레프트로 '아시아의 거포'란 애칭이 있다. 당시 '컴퓨터 세터'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김호철(現 현대캐피탈 감독)과 대표팀 최강의 듀오를 구성했다. 당시 대한민국 국가대표 경기를 봤던 사람들의 회고에 따르면 김호철 세터조차 경기 후반 중요한 상황에서는 강만수에게 거의 모든 공격을 맡겼을 정도라고 한다.

1992년 친정 팀 현대자동차서비스의 코치로 복귀하여 1993년부터 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현대자동차서비스 감독 시절에는 호쾌하고 강력한 공격을 강조했다. 특히 높이의 배구로 블로킹이 강한 팀을 만들었으며, 이는 지금도 현대캐피탈의 팀 컬러이기도 하다.

선수 때의 명성과는 달리 감독으로써의 평가는 좋은 편이 못 된다. 물론 1990년대 초중반 려증권과의 라이벌리를 가졌던 시절에는 팀이 잘 나갔던 시절이라 그다지 부각되지 않았지만 대한민국 배구판을 집어삼켰던 모 팀이 창단한 후부터는 너무 판에 박힌 전술을 써서 상대 팀이 다 읽고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삼성화재의 리즈시절에 죽어도 삼성화재만큼은 꺾지 못해 현대자동차서비스 배구단을 콩라인으로 만들기도 했다. 결국 2001년 송만덕에게 감독직을 넘기고 물러났다. 그 후 한국전력의 감독을 맡았지만 2년 만에 해임됐다. 여기서도 강만수 감독 특유의 경직된 전술 사용으로 까였는데 항간에는 강토라레라고 까이기도 했다.

김호철의 후임으로 2013년 4월 30일 아산 우리카드 한새의 감독으로 선임됐으며, 5월 2일 정식 계약을 체결하고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팀의 성적이 영 좋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만수와 동명인 점을 따와 갓동니뮤ㅠㅠ로 놀림을 받기도 했다.

2015년 1월 8일 우리카드 총감독으로 추대되며 현장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아들 강성호는 야구선수로 경희대학교와 경찰 야구단을 거쳐 NC 다이노스에 신고선수로 입단했으나, 1년만에 방출되었다. 아버지 강만수가 194cm인데 아들 강성호는 KBO 프로필상 189cm로 아들이 아버지보다 작다.

1.1. 약력

1955년 경상남도 하동 출생.
1972년 성지공고 재학중 17세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
1973년 모스크바 유니버시아드 동메달. 이때부터 주전 멤버로 출전.
1974년 테헤란 아시안 게임 은메달.
1977년 소피아 유니버시아드 동메달.
1978년 이탈리아 세계선수권대회 4강. 방콕 아시안 게임 금메달.
1979년 멕시코 유니버시아드 금메달.
19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 동메달.
1984년 LA 올림픽 5위. 대표팀 은퇴. 일본유학.
1987년 와세다 대학교 봄철리그 우승.
1988년 실업팀 도레이 입단.
1992년 현대자동차 코치.
1993년~2001년 현대자동차 감독.
2009년 수원 KEPCO 45 감독.
2013년 아산 우리카드 한새 감독.

2. 강만수(姜萬洙)


1997년~1998년 대한민국의 제4대 재정경제원 차관을 했고[1], 2008년 2월 부터 1년간 기획재정부 장관을 했던 공무원.[2] 1945년생. 서울법대 65학번으로 윤증현 전 기재부장관과 동기. 그러나 그 둘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않다 카더라.

김재익 경제수석 밑에 있을무렵, 과장급 중 일을 가장 잘 한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 전부터 주요 경제 정책을 수립해 선거에 활용하였으며, 이명박 정부 출범 후에는 기획재정부 장관을 맡았다. 장관으론 고작 1년을 재임했지만, 대통령 임기 내내 든든한 신뢰를 받았으며, 때문에 정권의 실세로[3] 늘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특히 2008년에는 전국을 뜨겁게 달군 화제의 인물이었다. 그의 환율정책은 이엔드오덕들에게도 적이었지만 이 양반 때문에 유학생들은...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가장 큰 문제는 대한민국은 영토에 쓸만한 자원이 거의 없기에 거의 모든 자재석유 등을 해외에서 수입해오는 산업 구조를 갖고 있는데, 그럼에도 수출 잘 되라고 환율을 올려버렸으니 경제도 안 좋은데 원자재 값까지 올라서 모든 물건 값이 올라버리는 현상을 가져온 것이다. 비유를 들어서 말하면, 환율이 1 달러당 1000원 일 때 수입산 밀가루로 만드는 라면 한 봉지 제작에 드는 원가가 100원 이었다면, 환율이 1 달러당 1500원이 되었을 때에는 재료값 상승, 재료를 운반 할 때 드는 운송비 상승 등으로 인해 라면원가가 150원 이상이 되고, 제작사는 이윤을 남기기 위해 최종 판매가를 더 올려야만 하는 식으로 물가가 상승한거다. 월급은 많이 안 올려주면서(...). 당시 환율과 물가 뉴스를 검색해보면 당시 민심과 언론의 반응이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인 것을 볼 수 있다.창렬경제의 원흉

특히 이라크전의 여파로 석유값이 미친듯이 폭등을 할 때 환율 폭등 크리까지 터져버리자 운수회사들이나 택시 운전기사들은 거의 파산 직전까지 갔다. 그렇다고 운송비를 올리면... 국민 경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렇게 취임 초에는 환율이 올라가야 하고 주장했으나, 민심에 급격한 변동이 보이고 2008년 9월 세계금융위기가 터지자 입장 바꿔서 점심시간도시락 폭탄이라 불릴 정도로 외환시장에 달러를 쏟아 부었다. 한국 경제계의 윤봉길 의사 이로 인해, 대한민국 외환보유액2600억 달러에서 2000억 달러로 추락시켰다.

이 부분에서 참고해야 할 점은, 높은 수준의 외환보유라는 것은 이와 같은 위기상황에서 사용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한국을 비롯한 싱가폴, 대만 등 90년대 후반 외환위기와 그 파장을 겪은 국가들이 2000년대부터 대단히 높은 수준의 외환보유를 하고 있는 것(전세계 5위 부근)이 바로 이와 같은 이유이다.(물론 이는 당시 너무 심하게 겪은 것에 대한 심리적 요인이 크다) 경제규모의 외환을 과도하게 쥐고 있는 상태는 유동성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으나, 이것을 감소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전국가적으로 높은 수준의 불안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감소시키는 것 역시 어렵다. 그러면 결국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사용할 수 밖에 없는 것. 참고로 2015년 2월 현재, 3600억 달러 대의 외환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덕분에 세계금융위기에서 한국 경제는 크게 충격을 받지 않았다는 평가도 있다(…).[4] 당시 상황은 외국 자본이 철수하기 시작하고 자본 회수에 나섰기 때문에 외환위기처럼 국가도산까지 갈 수 있는 엄청난 위기 상황이었다는 것. 이 상황에서 원료를 대부분 수입하는 우리나라가 10조원에 달하는 환차손을 감내하면서 미국과 화스와프를 체결한 것은 경제 붕괴를 막아낸 신의 한 수로 평가되기도 한다. 반면 일본 수준의 경제도 아닌데 2004년 전설의 은포[5]의 한국판, 즉 한은포(한국은행포)를 마구 퍼부으면서 환율을 엉망으로 만들었고 치솟는 환율과 떨어지는 주가지수가 서로 교차하게 하는 "그랜드 크로스"를 만들었다는 엇갈린 평가도 있다. 요새 식으로 말하면 한국판 아베노믹스를 5년 먼저 실행한 사람(...). 다만 시기적으로 보면 세계 경제 위기는 2008년 후반기 이야기로, 고물가, 고환율은 강만수 취임 이후로 이미 반년 가까이 가속화 되었고 강만수는 그 부작용에 전혀 신경 안 쓴게 맞다. 그러다가 통화 스와프로 잠깐 반짝 하고 빛 난것은 맞는데, 그 몇 달뒤에 결국 잘렸다.

가장 유명한 명언을 꼽자면 "올해는 정말 원 없이 돈을 써 봤다." 당신이 쓴 돈이 국가예산의 1/4 ~ 1/5라는게 문제지만 말이지

그리고 IMF때 변명은 "6.25 때부터 누적되어 온 한국경제의 문제점을 내가 어떻게 해결하느냐?"였다. 그거 해결하라고 너 앉힌거잖아 그러나 차관 재직 당시 바로 이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다. 전지전능한 초월자라면 모를까 한국경제가 쌓아온 기간과 그의 재직기간을 비교해보면 당연하다.

이때 돈을 하도 써서 윤증현 장관 시절엔 이 정도의 환 정책이 다시 재개되지 못했다. 이것이 경제 관리 중심의 주류 "모피아"와 강만수계 모피아의 차이라고 평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이명박 전 대통령과의 으로 리만 브라더스(...)라는 별명이 붙었다(현행 리그베다 위키의 운영방침에 따라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장관 재직 중엔 모친상에 대통령이 찾아왔을 정도. 장관에서 물러난 즉시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으로 영전된 데 이어 대통령 경제특별보좌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참고로 2010년 3월에 한국은행총재 임명설이 돌아 루머만으로 화폐시장이 들썩거렸다. 진보언론들은 말할 것도 없고, 피아로 비판받던 일반 경제관료들과 조선일보에서도 비판적일 정도. 우리은행 회장 된다는 소문이 나돈 적이 있을 때도 분위기가 아주(...)

그런데, 세계적으로 잘 만들었다고 소문난 부가가치세를 만든 전적도 있다![6] 속설로도 유명하고, 본인도 직접 산업은행장 퇴임 후 인터뷰에서 발언했으나, 실제로는 주요 추진자는 강경식 前 부총리가 꾸린 "team"[7]이었으며 강만수 前 장관은 오재구 등의 관료와 실무를 맡은 것이다. 물론 지면 제한이 있는 언론 보도 특성상 인터뷰가 다 다뤄지지 않고 단독으로 부가세를 만든 것처럼 보도됐을 가능성도 있겠으나, 최소한 정정 보도 요청은 하는게 "거물"의 네임밸류에 어울리는 적절한 처신이었을 것이다..[8]

2011년 3월 산은금융지주 회장이자 산업은행 행장으로 낙하임명되어 산업은행의 민영화를 위해 다이렉트를 런칭하는등 노력했으나, 정권이 교체된 2013년 역시 낙하산 후임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물러났다.

2000년에 개정된 로마자 표기법에 큰 불만을 갖고 있어서, 언젠가 다시 개정해야 한다는 의지가 강한 분이기도 하다. 일단 관련 부처에 앉으신 뒤에나 생각하시는 게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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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하필이면 IMF 위기때라.. 위기마다 관료가 돼서 데자뷔 돋는다고 까였다. 그때 그 사람
  • [2]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있지만, 알고 보면 행정고시(1970년, 9회) 재경직 수석.
  • [3] 또한 환란 후 10년만에 주류에 재진입하는데 성공한 舊 재무부 인맥(세칭 모피아)의 대부로써 - 사실 여기엔 조금 논란이 있다.
  • [4] 하지만 그 대신 물가는 산으로 가버렸다. 물가 상승에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이분의 경제 정책도 한 몫을 했다. 반론 ; 외화를 풀은 것과 물가상승은 하등 관계가 없다. 물가상승은 외화의 재매입과정에서 발생하는 것. 차라리 이 경우는 외화를 풀기전 고환율정책과 관련이 있으나 해당 정책은 얼마 못가 파기되었고, 환율 역시 1000원대 아래로 떨어지게 된 바, 연단위의 중장기적 관점에서 볼 경우 환율정책이 물가상승문제를 일으킨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 [5] 본은행과 일본 금융 당국이 당시 를 막기 위해서 헤지펀드에 대항해 분당 10억엔, 35일간 30조엔의 달러 매입을 퍼부은 사건.
  • [6] 어디까지나 부가가치세, 비세 중에서다. 이 정책 자체를 비판하는 이들에게는 이것마저도 비판요소가 된다
  • [7] 30대의 젊고 쟁쟁한 경제 관료들이 주축을 이뤘다고 한다
  • [8] 사족을 달자면, 당시 팀장 역할을 맡은 강경식 前 부총리는 80년대 관가를 소재로 다룬 기사나 책자에 "유능한 경제 관료"로 그 이름이 나오곤 했을만큼 평판이 좋았다고 한다. 또한, 두 사람 모두 1997년 IMF 사태에 휘말려 공직생활에 오점을 남겨 뭇 사람들에게 회자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