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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웅

last modified: 2020-03-01 08:25:09 Contributors


삼성 라이온즈 No.87
강기웅(姜起雄)
생년월일 1964년 2월 25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대구광역시
학력 수창초-경상중-대구고-영남대학교
포지션 2루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7년 삼성 라이온즈 1차 지명[1]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1989~1996)
현대 유니콘스(1996) [2]
지도자 경력 삼성 라이온즈 2군 타격코치(2011~2012)
삼성 라이온즈 3군 타격코치(2013~현재)

1989, 1990년 한국프로야구 2루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김성래(삼성 라이온즈) 강기웅(삼성 라이온즈) 박정태(롯데 자이언츠)
1993년 한국프로야구 2루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박정태(롯데 자이언츠) 강기웅(삼성 라이온즈) 박종호(LG 트윈스)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6번(1989 ~ 1996)
정진호(1983 ~ 1986) 강기웅(1989 ~ 1996) 김태균(1997 ~ 2001)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87번(2012~ )
이경록(2011) 강기웅(2012 ~ )

삼성 라이온즈 역대 주장
김용국 강기웅(1993 ~ 1994) 이종도(1995~1996)

Contents

1. 소개
2. 선수 생활
3. 은퇴 후
4. 여담
5. 연도별 성적


1. 소개

삼성 라이온즈의 내야수이자 현 삼성 라이온즈 잔류군(3군) 타격코치. 선수시절 포지션은 2루수, 등번호는 6번이었다. 오른손 장효조, 천재라고 불리던 선수였다. 선수를 띄워주기 위해 천재라 불린게 아니라, 정말로 야구 센스가 뛰어났다.

삼성 팬들은 해태 타이거즈이종범이 있다면 삼성에는 강기웅이 있었다는 말을 할 정도다. 최고의 컨택 능력과 빠른 뱃 스피드가 결합되어 비교적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장타력을 갖췄고, 빠른 준족과 뛰어난 수비를 갖춘 2루수로 사랑받았다. 다만 천부적인 컨택 능력을 활용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타격경향 때문이었는지 볼넷 수는 적었고, 타율에 비해서 출루율이 그렇게 높지는 않았다. 물론 이런 선수들이 다 그렇듯이 삼진도 볼넷 못지않게 적었다.

2. 선수 생활

1987년 삼성에 1차 지명을 받지만, 1988년에 열릴 서울 올림픽 때문에 실업 팀인 한국화장품 야구단에 입단했다.[3] 삼성에 입단하기 전까지 2년 동안 실업 야구에서 활약하는 동안 홈런, 타점, 도루 세 타이틀은 모두 강기웅의 차지였다. 파워히터가 아님에도 1988년 봄, 상업은행과의 경기에서 전무후무한 5연타석 홈런을 기록했다. 또한 1988년 10월 25일 제일은행과의 경기 때에는 안타, 2루타, 홈런을 기록한 상황에서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하기 위해 홈런을 치고도 홈 플레이트를 밟지 않고 들어온 적이 있다. 누의 공과로 3루타로 인정받기 위해 그렇게 한 것. 그러나 상대팀에서 고의로 누의 공과를 어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필해야 아웃되는 상황에서 어필을 하지 않으면 아웃되지 않는 규정에 의해 결국 홈런으로 기록되었다.(…)[4] 기록을 만들기 위해서 한 일이라 비난을 받을만한 일이었지만, 하여간 강기웅은 실업 무대에서도 그만큼 독보적인 선수였다.

삼성에 입단한 1989년에는 19승을 기록한 태평양의 박정현에게 밀려 신인왕은 놓쳤으나 골든글러브를 획득했다. 이후로 1990년, 1993년에도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또 이 해에 타율에서 5리 차이로 밀려 타격왕을 놓쳤지만, 어쨌든 타선에서 장효조의 빈 자리를 메우며 1993년에는 정규시즌 MVP 후보에도 올랐다. 프로에 와서 타격 못지 않게 돋보였던 점은 몸을 사리지 않으며 화려하면서도 깔끔한 수비로, 특히 유격수 류중일과 키스톤 콤비는 역대 최고의 키스톤 콤비로 손꼽힌다.[5]

다만 체력이 약한 게 큰 단점으로 지적되었으며, 약한 체력으로 인한 탓에 훈련량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로 인해 '비운의 천재'라는 별명이 잇따랐다. 또한 한국시리즈 우승도 인연이 없었다.(1990년 LG에 준우승, 1993년 해태에 준우승)

1995년 5월 13일 한화와 경기에서 수비를 하던 중 이승엽과 부딪혀 발목 부상을 당하며 이듬해인 1996년에는 겨우 11경기 밖에 출장하지 않으며 결국 1996년 시즌 종료 뒤 백골프에 의해 외야수 이희성, 투수 광훈을 상대로 현대 유니콘스에 트레이드되었다. 하지만 강기웅은 삼성 라이온즈에서 뛰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며 현대 유니콘스에 트레이드된 후 현역 은퇴를 선언했고, 결국 그의 마음을 못 돌린 현대 구단으로부터 임의탈퇴 공시되며 그라운드를 완전히 떠나게 됬다. 이후 2010년 인터뷰에서 "심장에 푸른 피가 도는데 어떻게 유니콘스 옷을 입을 수 있었겠느냐."며 당시 은퇴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양신 말고 몸에 푸른 피가 도는 외계인이 또 있었네

강기웅이 이적을 거부하고 현역 은퇴를 선언해 버리는 바람에 현대 유니콘스는 결국 선수 2명을 삼성 라이온즈에 거저 준 셈이 됬다. 하지만 이희성도 삼성에서 1군 13경기에만 출장했고, 광훈은 아예 1군에 오르지 못해 이 트레이드는 양 구단에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3. 은퇴 후

은퇴 후에는 아예 야구계를 떠나 장인 소유의 병원에서 사무장으로 일하다가 2007년 병원이 부도나며 그마저도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2010년 1월, 인터뷰에서 프로 야구계에 복귀할 의향이 없음을 밝혔다.청과 유통업을 주업으로 주말에 대학팀 코치를 하는 듯.

강기웅과 황금의 키스톤 콤비였던 류중일 코치가 2011년 시즌부터 삼성의 감독에 선임되었는데 당시 팬들의 여론이 예전 황금 콤비였던 강기웅을 코치로 선임하라는 얘기가 많았다. 하지만 인터뷰를 보면 강기웅 본인은 현장을 너무 오래 떠난 탓도 있고 아직은 의사가 없다고 얘기했는데...



현역 시절 강기웅과 환상의 키스톤콤비였던 류중일 감독의 끊임없는 구애가 결국은 통한 것이 아닌가 하는 말이 있다. 어찌됐던 여러 사정으로 야구계에서 선을 긋고 있던 강기웅은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야구센스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타고난 센스와 두뇌를 가진 강기웅이니 만큼 코치로써 좋은 역할을 해줄것이란 기대가 많다. 2009년 말부터 강릉영동대를 시작으로 영남대와 경북고의 타격 인스트럭터로 활약했다지만, 강기웅 본인이 프로야구계를 떠난지 햇수로 16년이나 되었기 때문에 적응기간이 상당히 필요할듯 하다. 하지만 그것 역시 본인의 의지에 따라 그런 공백 따위는 문제가 안 될 수도 있다.

채천재가 급강하 모드로 빠졌을 때 2군에서 다독여 주고 타격 폼도 교정시켜 주는 등, 채태인의 부활에 기여했다. 그리고 결국 2013시즌때 오푼이의 삽질을 덮어준 맹활약으로 그를 욕하던 수많은 팬들은 좆잡고 반성하기 시작했고 2015년 들어서도 여전히 반성 중이다.

2014년 시즌부터는 카도쿠라 켄과 함께 삼성 라이온즈의 유망주 육성 프로젝트인 BB 아크의 육성 위원으로도 활동한다. 고자욱얼빠들은 김상엽이 이재학한테 죽빵갈겨서 신인왕 만들었던거 처럼 강코치가 죽빵 갈겨서라도 뜯어고쳐달라고 싹싹 비는 중이다.

4. 여담

마구마구에서 레전드 카드를 출시할 때 강기웅 레전드 카드 역시 출시된다고 발표하자 통산 600안타가 어떻게 레전드냐며 수많은 유저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고, 결국 출시가 취소된 일이 있었다. 엘리트 카드 추가될 때나 잠재력 시스템이 추가될 때엔 삼성에 이미 김성래가 있다는 이유로 엘리트 카드도 하이점프캐치도 받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마구마구 내에서는 이래저래 불운한 편. 거기에 더해 마구마구2014에서 강기웅 선수의 가명은 인도형이다.(...) 본격 돈구의 약빤 가명 작명 센스

2013년 넥센과 두산의 준플레이오프에 전력분석팀으로 갔다. 3차전 '장기영의 총검술'로 회자되는 번트 실패 삼진 상황 당시 1B 2S 되고 나서 장기영3루코치와 이야기하고 타석에 들어오고 나서 자세 잡고 흙 고르고 있을 때 '저 놈 저거 분명 번트댄다'고 예언했다. 다른 전력분석관들이 2스트 상황에 무슨 소리냐고 반박하는데 장기영 번트 아웃. 주위에 앉은 전력분석관들이 다 쳐다봤다고. 2013년 10월 15일에 방송된 사사구 92회에 나온 내용[6]이다.

5. 연도별 성적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1989삼성 라이온즈 95 351 .322
(2위)
113
(5위)
12 4 1 33 48 26
(4위)
1990 108 391 .271 106 16 3 15
(5위)
58 59 24
(3위)
1991 68 228 .303 69 14 3 6 26 30 10
1992 126 405 .304 123 19 3 16 56 68 13
1993 102 379 .325
(2위)
123 15 2 16
(4위)
75
(3위)
60 20
1994 107 332 .244 81 12 3 4 36 35 12
1995 55 177 .271 48 4 0 3 19 25 6
1996 11 24 .167 4 3 0 0 1 3 0
통산 672 2287 .292 667 95 18 61 304 328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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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지명 후 실업 팀인 한국화장품 야구단에 입단했다. 삼성 입단은 1989년.
  • [2] 본인이 흑역사로 치부하는 부분이다. 강기웅은 내몸에 파란피가 흐르고 있는데 어찌 다른팀엘 갈수 있겠냐고 울분을 토했고 1994년에 정동진 당시 태평양 감독이 강기웅에게 트레이드로 영입하겠다고 넌지시 말했을때 강기웅이 "정동진 감독님. 저 트레이드되면 야구 안합니다." 라고 못박았을 정도. 강기웅 본인은 삼성에서 뛰고 삼성에서 은퇴했다고 자부하는 상황이다.
  • [3] 당시만 해도 프로 선수는 국제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다. 송진우도 같은 케이스. 영남대학교 시절에는 훗날 같은 팀에서 뛰게 되는 류중일과 함께 LA 올림픽에 참가한 적도 있다.
  • [4] 홈런으로 인정받자, 강기웅의 소속 팀인 한국화장품 감독이 사이클링 히트로 만들어 주기 위해, 홈 플레이트를 밟지 않았으니 아웃이 아니냐고 오히려 항의했다고 한다.(…)
  • [5] 이 둘뿐만 아니라 1루수 김성래, 3루수 김용국까지, 그야말로 당대 최고의 내야진이었다. 그러나 은퇴할 때까지 삼성에서 선수로 몸담은 류중일을 제외하곤 모두 삼성과 갈등을 빚거나 하며 안 좋게 팀을 떠났다. 그리고 2011년 8월 10일부로 모두 다시 삼성 라이온즈에 모였다.
  • [6] 12분 40초부터 나온다.